한참을 걸어 도착한 면접장소는 템즈강 전경이 훤히 보이는 강변위치에 견고한 대리석으로 외부를 치장한 마치 박물관을 연상하게 하는 거대한 건물이었다. 내부에 들어선 순간 높은 천장 벽화가 내 눈에 들어왔고, 깔끔하고 우아하게 정돈된 내부장식은 나를 주눅 들기 딱 좋게 만들었다. 그런 첫인상을 뒤로하고 면접관을 기다리며, 내심 이 웅장하고 화려한 이곳에서 일을 했으면 참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며, 나름 적극적인 자세로 면접에 응했고, 그렇게 난 바람대로 그곳과 인연을 맺고 30십대의 대부분의 추억은 이곳에서 생성이 되었다.
난 그곳에서 나의 보스를 만났다. 작고 마른 체구를 가지고 여린 음색을 가진 항상 친절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온화하게 대하는 그러나 그런 외모와는 달리 내면이 단단한영국 신사분이셨다. 그 당시 난 갓 입사한 경력직 신입사원이고 그분은 20년이 넘게 재직하시며 회사 임원진들에게 신임받고 능력을 인정받은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소유한 인성 좋은 부장님이셨다.
그분의 지위가 내가 보기엔 한없이 커 보이는 분이었음에도 회사 출근길에 샌드위치와 주스한병을 사서 출근하시고, 다림질 안 해도 되는 셔츠 몇 장을 번갈아가며 입으시며, 밑창이 갈 때가 한참 지난 구두를 신고 출근을 하신다.
워낙 많이 업무영역에 연관이 있으시다 보니, 하루 종일 회의에 참석하시고 정작 업무는 모두가 퇴근한 이후부터 밀린 보고서 분석을 하시고 리뷰를 하신다. 나 또한 계속 쌓여가는 업무 양으로 퇴근시간이 늦어지는 날이 잦아지다 보니 마지막 기차 시간 확인하고 분주하게 퇴근준비하다 보면 내 상사도 나와 같은 처지이다.
그렇게 둘이 기차역까지 함께 퇴근하는 날이 잦아지면서 자연스럽게 개인적인 이야기를할 기회가 생기고그 분에 대해조금씩 알아가게 되었다.
왕복 4시간 출퇴근을 감행하면서, 샌드위치와 음료 한 병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하루 종일 격무에 시달린 후 자정 가까이 집에 도착하여 아내가 준비해둔 저녁을 간단히 드신 후, 새벽에 잠자리에 들고 그다음 날 출근을 위해서 새벽 5시에 기상을 하고 다시 출근그 생활을 20여 년을 하고 계신다 하셨다. 그런데 그분이 좋아하는 취미는 예상외로 록음악이었다. 그 온화한 인상을 하신 분이 하드록 콘서트장 맨 앞줄에서 록커들 록커들의 공연사진을 찍고 음악을 즐기는걸 너무 좋아한다는 말에 난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 분은 당신이 회계사가 되지 않았다면, 리챠드 브란슨처럼 레코드 사업인 음악 관련된 사업을 하고 싶었노라 이야기하셨다.
그렇게 살고 싶은 삶의 모습과 현재 그가 살고 있는 삶의 모습의 거리는 참으로 멀어 보였다.
그분에게는 똘망 똘망한 아이가 두 명 있었고, 그 아이들은 영민하게 잘 성장하고 있었고, 그런 아이들에게 아빠인 그분은 안정적인 재정을 바탕으로 좋은 교육을 시켜주고 싶은 책임감 있는 아빠였다.
시간이 흘러 나에게도 가족이 생겨 부양해야 하는 아이를 위해 오롯이 시간을 보내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고 난 고민 끝에 퇴사를 결심하고 40십대를 맞이라는 해에 그 화려하고 웅장한 첫인상을 뒤로하고 난 그 장소를 떠났다.
나의 보스또한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열심히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정성을 다 한 보람으로 아이들은 원하는 교육을 받는 막바지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퇴사하고 1년 뒤,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한창인 연말에 난 회사 근처 카페에서 보스와 티타임을 가졌다. 한결 수척되고 까칠한 외모가 마음에 쓰이긴 했으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우린 짧은 시간이나마 편안한 담소를 나누었다.
난 아이랑 퇴사한 후 둘이서 지방도시 여행한 이야기, 소소하게 이것저것 배운다는 이야기를 했다.
내 보스는 2년 뒤에 회사를 그만두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막내딸이 내년에 석사를 졸업하면, 당신은 이제 책임감에서 자유로와 진다며 엷은 미소가 입가에 번진다
퇴사 후 작은 레코드 판매사업을 구상 중이라며, 퇴근 후, 언더그라운드 록 가수 콘서트를 가는 게 즐겁다고 하신다.
내 보스가 오랜만에 설레는 계획을 이야기하는 모습에 나 또한 덩달아 흥분되었다. 그렇게 짧은 만남을 한 후, 우린 악수를 하고, 난 레코드 사업을 설립하고 회계사가 필요하면 연락달라고 실없는 농담을 주고 받으며, 회사퇴사하면 여유롭게 식사 한번 하자고 기약하고 우린 그렇게 헤어졌다.
그렇게 시간이 몇 주가 흘러 새해가 밝아왔고 난 내 자리에서 여전히 아이랑 시간을 보내는 전업주부의 삶을 보내고 있는 어느 오후에 전 직장 동료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내 상사가 소천하셨다고. 혹시 오타가 났나 싶어 바로 동료에게 전화를 했고, 동료는 한참 울다 잠긴 목소리로 흐느끼면서 새해 아침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고 전했다.
참으로 믿기지 않았다. 이제 거의 다 왔다고 그랬던 이야기들, 이젠 나의 삶을 살고 싶다고 이야기했던 내 보스
장례식장에 참석하기 전까지 믿기지가 않았다.
내 보스는 온몸으로 아버지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고, 그 덕분에 아이들은 누가보아도 멋진 어른으로 잘 성장하였다.
그렇게 내 보스는 20대의 꿈을 펼칠 아이들과 시간을 함께 하지 못한채 많은 이들에게 존경과 슬픔을 동시에 남기고 조용히 또 다른 별로 여행을 떠나버렸다.
회사 근처에서 잠시나마 만나 티타임을 했던 시간이 마지막이 될 줄 몰랐던 나 그리고 다음을 기약하는 우리
참으로 인간은 부질없는 약속을 하는 존재들이 아닌가 싶다는 생각을 한다.
웅장함과 화려함을 자랑하는 그 건물 안에 있는 사람들도 그 건물처럼 화려하고 멋진 삶을 살 거라는 환상을 가지고 그곳에 입사했었다. 그러나 그 화려한 이면에는 우리 모두는 각자의 인생숙제들를 하나하나 풀면서 인생의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때로는 그 숙제가 너무 버거워 쓰러져 쉬고 싶어도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 꺾인 무릎을 치켜세워 오늘도 파이팅한다. 내 보스가 그러던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