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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고 Apr 07. 2022

바람 부는 날 독립선언

아이는 홀로 가기를 원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기억의 공간은 일상의 크고 작은 일상의 사건사고로 차곡차곡 쌓이면서 그 공간이 꽉 차게 되면 사사로운 기억들은 망각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또 다른 기억들로 그 공간은 채워나간다. 그런 반복 과정을 통해 우리는 예전 기억이 희미해지고 그때의 그 기억마저 잘못된 착각으로 이해하는 경험들을 종종 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으로 잊혀지지 않는 마치 어제

일처럼 기억이 되는 강렬한 순간들이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나의 경우엔 그중 하나의 기억이 10여 년 전 우리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의 찰나이다. 아이가 태어나기로 한 예정일을 이주나 훌쩍 넘어 병원에서는 유도분만과 온갖 방법을 동원해 자연분만을 하기 원했으나, 뜻하지 않게 결국은 수술대에 올라 두 시간 만에 제왕절개를 하고 아이와 드디어 만났다

그 환희의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무통주사의 효력 덕에 정신이 온전한 상태에서 아이가 태어나는 수술 과정을 다 인지하고 있던 순간,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었고 그때 의사는 허공 위로 아이를 살짝 안아 보여주며 " 축하해! 고생했어"라는 눈으로 이야기해주었다.

수술대를 빠져나와 간호사가 나를 회복실에서 입원실에 올려주기 위해 내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었고, 그때 담요에 폭 감긴 우리 아이가 내 옆에 와서 나의 품에 안겼다.

뜨거운 숨결을 할딱할딱대며 본능적으로 내 젖꼭지를 찾으며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음에도 입술을 오물오물하고 오로지 먹겠다는 의지만이 보이는 오롯이 나에게 100퍼센트 의지한 존재가 나에게 생긴 것이다. 이렇게 작고 여리여리한 아이에게는 이 아이가 원하는 건 다 해주겠다고 다짐하였고, 아이가 행복할 수 있는 그 길을 항상 응원하겠노라 내심 생각했던 그 순간의 기억은 내 기억공간에 아주 깊숙이 각인이 되어 어떤 다른 기억들도 그 공간은 차지할 수 없을 것이다.


그 기억을 뒤로하고 아이는 성장했고 지금도 성장하고 있다.  어디를 가든 내 그림자를 의식하듯, 엄마가 주변에 있음을 안심하고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엄마가 있다는 강한 믿음이 이었던 유년기를 지나 이젠 그 끝길에 다다르고 있다.


지금은 유년기의 마지막 고개를 넘고 다음 단계의 고개를 넘어가려고 준비를 하듯 아이는 요새 들어 혼자 할 수 있음을 나에게 자주 표현한다.


아이가 혼자 골프장에 연습라운딩을 나가면 100미터 전방에서 항상 동행을 해 주었는데, 이젠 그것마저 괜찮다고 이야기한다. 혼자 3시간 넘게 연습을 할 수 있다고 이젠 데려다주고, 데리고 와 달라고 부탁한다. 나 또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내심 갈등하지만, 겉으로는 대범한 엄마 코스프레를 하며 그렇게 하라고 이야기해준다.


꽃샘추위가  나 여기 있어요! 라며 존재감을 한껏 뽐내듯, 히스꽃이 만발한 언덕에 위치한 작지만 거친 기질이 강하게 느껴지는 이곳 골프장에 우린 아침에 도착했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아침에 14세 미만 청소년 지역 배 골프 경기가 첫선을 보이는 날이다. 서 있기만 해도 바람 때문에 서 있기도 힘든 이곳에서 여리고 나만 의지했었던 10여 년 전 아가가 10년 동안 무럭무럭 성장해서 이젠 혼자 가서 경기를 하겠다고 독립선언을 한다.

그렇게 하라고 꼭 안아주며 아이를 보내고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본다. 이젠 내가 아이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은 바람이 좀 덜 불었으면 하는 바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렇게 아이가 독립선언을 하며 한걸음 한걸음 전진할 때 나 또한 과감한 마음을 갖고 깊은 믿음과 사랑의 마음으로 아이의 행복의 길은 찾는 과정을 응원하고 싶다.


바람이 좀 덜 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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