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꿈꾸며 맨발 걷기 5
- 꼭 황톳길이어야 하나?-
맨발로 걷는 사람들에게는 믿음이 하나 있다. ‘맨발 걷기는 황톳길에서 해야 한다, 황톳길이 최고다’라는 믿음이 그것이다.
우리 동네 숲길에서 맨발로 걷는 이들도 예외는 아니다. 비가 오거나 눈이 녹으면 숲길 곳곳이 질척한 진창으로 변하면서 희끄무레하던 흙 빛깔도 때깔 고운 붉은색으로 바뀐다. 그러면 신비한 치유의 장소라도 되는 듯 너도나도 그 진창에서 한참씩 황토 밟기를 하곤 한다.
지난가을, 시에서 동네 숲길을 맨발로 걷기 좋게 정비해 준다고 했을 때 이구동성으로 요구하는 것이 계족산의 황톳길처럼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실상 숲길은 전 구간이 천연 황톳길인데도 그 위에 황토를 두텁게 부어달라는 것이었다.
이런 유별난 황토 사랑은 황토에 기대어 살아온 우리 민족의 생활 전통과 인식, 그리고 현대의 상업주의에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전 국토의 35%가량이 황토 토양으로, 어디에나 널려있다. 조상들은 이렇듯 지천인 황토를 이겨 집을 짓고, 황토밭에서 농사를 짓고, 황토물로 옷감을 염색하고, 지장수를 마시고, 심지어 해독제 등 약으로도 썼다. 그야말로 소중한 존재였다. 이렇듯 황토와 함께 살아온 생활 방식과 인식이 우리의 유전자에 각인되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이 오늘날의 상업주의와 맞물리면서 황토에 대한 맹목적이다시피 한 믿음은 급속도로 확산하였다. 포털에서 검색을 해보면 황토의 효능으로 해독작용, 혈액순환 개선, 통증 완화, 피부 미용, 습도 조절, 전자파 차단, 항암 효과, 항균 작용, 중금속 배출 등등 수많은 것들이 나온다.
이는 본초습유 등 몇몇 중국 의서(醫書)와 동의보감 등에 언급된 것들에 출처 불명의 자료들이 덧붙여져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어떤 것이 얼마나 사실과 부합하는지는 과학의 영역이다. 개중에는 옳은 것도, 과장된 것도, 허무맹랑한 것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불명확하고 검증되지 않은 근거자료를 토대로 가히 ‘황토 산업’이라 이름 붙여도 과하지 않을 만큼 다양한 분야에서 황토 마케팅이 펼쳐지고 있다. 또한, 이러한 자료들이 인터넷을 타고 무한 재생 유포되면서 황토에 대한 신화적 믿음과 황톳길에 대한 로망이 형성된 것이다. 음이온과 원적외선을 많이 뿜어내니까, 항균 작용을 하니까 등등의 믿음으로 황톳길을 찾고 황톳길을 조성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효능들에 대해 과학적으로 규명하지는 못할지라도 상식적인 선에서나마 따져볼 필요가 있다. 황토의 원적외선 효과는 황토방이나 찜질기처럼 뜨겁게 달구어져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설사 자연상태에서 음이온과 원적외선을 방출한다고 해도 그것이 일반 흙에 비해 얼마나 차이가 있고 건강에 더 도움이 될지는 의문이라고 한다.
황토가 항균작용 때문에 다른 토양보다 깨끗할 것이라는 믿음도 마찬가지다. 농약 등 화학물질에 오염된 경우가 아니라면 일반 토양이나 황토나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쯤은 상식으로도 판단할 수 있는 문제다.
황톳길을 걸어야만 몸속 활성산소가 더 잘 배출된다는 식의 주장이나 이론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맨발 걷기의 기적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신발과 양말을 벗고 맨발로 대지와 접속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돌이 깔린 길이든 진흙 길이든 바닷가 모래사장이든 어디든 맨발로 대지와 접속하면 되는 것이지 꼭 황톳길이 아니어도 된다.
물론 젖은 황톳길을 걸을 때 느낄 수 있는 매끈하고 몰캉한 촉감과 다른 흙보다 건강에 유익할 것이라는 기대심리나 만족감까지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맹목적으로 황톳길을 주장하고, 황톳길을 만들기 위해 어딘가의 멀쩡한 땅을 허무는 일은 없어야겠다는 생각이다.
너덜길을 만나면 너덜길을 걸어보자. 울퉁불퉁 솟구치고 가라앉고 누워있는 돌들의 그 차갑고 단단한 느낌과 발바닥 곳곳을 자극하는 기분 좋은 통증을 느껴보자. 절로 건강해지고 있음을 느낄 것이다.
솔가리 깔린 오솔길을 걸어보자. 레드 카펫의 폭신함과 부드러움, 예기치 못한 온기를 느껴보자. 우울하던 기분은 순식간에 풀어지고 행복과 손잡고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바닷가 백사장을 걸어보자. 젖은 모래의 촉촉하고 빈틈없는 감촉, 파도의 간지러움을 느껴보고 바다의 노래를 들어보자. 가끔 뒤돌아서서 파도에 흔적 없이 지워지는 발자국들을 보았다면, 이미 지나간 것들에 연연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갈 일이다.
잔디밭도 좋다. 작은 몸을 송곳처럼 꼿꼿하게 세운 당당함, 그러면서도 어떤 상처도 고통도 주지 않는 푹신함과 생명의 기운을 느껴보자. 잔디 사이로 고개를 내민 노란 민들레며 풀꽃들을 만나는 기쁨은 덤으로 주어지는 선물.
계곡이라면 꼭 발을 담가보라. 얼얼한 발바닥의 열기를 단번에 식혀버리는 냉정함, 복잡하던 머리가 맑아지고 온몸이 정화되는 상쾌함이라니......
꼭 황톳길이 아니어도 괜찮다. 울퉁불퉁 너덜길이든 솔가리 곱게 깔린 오솔길이든 바닷가 백사장이든 어디든 신발을 벗어보자. 그리고 귀 기울여보자. 자연의 소리를, 내 몸의 미세한 속삭임을 들을 수 있다면 어느 길에서나 기적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