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of Japan] 일본 산골마을 다이어리 #1
도망치듯이 한국을 떠났던 적이 있다.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서 현재와 다른 일상이 필요했던 나는 영국의 어느 시골 마을에서 채소를 기르고 닭을 돌보며 지냈다. 무엇이 현실인지 모를 미묘한 시간 속에서 조금씩 마음속의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떠나 볼 때가 된 것 같았다.
아무리 낯선 곳이라도 새로운 친구가 생기고, 누군가의 집에 초대를 받고, 함께 마주 앉아 밥을 먹게 되면
적어도 작은 마을 하나는 나의 장소가 된다.
나에겐 일본이 그랬다.
아이리가 사는 사이타마의 치치부, 다은이가 사는 도쿄의 하쓰다이, 모리 부부가 사는 교토의 가모.
셀 수 없는 얼굴들과 추억으로 가득한 그곳에 난 항상 가고 싶었다.
사람이든 도시든 무언가를 아주 오랫동안 좋아하다 보면 어느 순간 가까이 다가갈 용기가 사라져 버린다.
동경과 환상의 빛으로 뒤덮인 마음을 현실의 세계로 들어놓기란 두려운 일인 것이다.
하지만 집에서 가장 먼 곳으로 떠나보니 아무리 세상이 넓을지라도 비행기에 몸만 실으면 될 일이었다.
하늘을 나는 비행기보다 무거운 건 내 마음이었다.
도망치듯 떠났던 여행은 어디론가 다시 떠날 수 있는 약간의 용기를 선물해 줬다. 길었던 여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언제쯤 이곳을 떠나면 좋을지 생각했다.
"천만 원이 모이면 나갈 거야"
"왜 하필 천만 원이야?"
"천만 원 정도면 집을 얻을 수 있으니까"
오래전 보았던 어느 일본 영화의 대사가 갑자기 떠올랐다. 만들어진지 10년도 넘은 작품인지라 그때의 천만 원이 지금과 같지는 않겠지만 왠지 ‘천‘이라는 숫자가 꽤나 든든하게 느껴졌다.
“돈을 많이 벌지는 않더라도 항상 돈을 모아 놓아야 해. 그래야 너가 정말 하고 싶은 게 생겼을 때 쓸데없이 다른 사람에게 허락받을 필요도 설득해야 할 필요도 없어. 주저 없이 시작할 수 있는 용기는 돈에서 나오는 거야.”
처음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을 때 엄마의 첫마디는 얼마를 모을 것인지였다. 그때는 그저 내가 기껏 번 돈을 좋아하는 옷을 사는데 모두 써버리지 않도록 건넨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알고 있다.
엄마가 어떤 마음으로 나에게 그 말을 건네었는지.
그녀가 지금의 나와 비슷한 나이였을 무렵, 그녀 역시 너무나도 떠나고 싶었던 때가 있었고 떠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헤쳐왔는지 이제는 알고 있다.
때로는 자신의 과거가 어렴풋이 담긴 누군가의 말을 그냥 믿고 싶어지는 때가 있다. 나는 영화 속의 여자와 나를 낳아 준 여자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천만 원을 모으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동네 빵집에서 일할까, 좋아하는 옷가게에서 일할까 고민하던 중, 예전부터 줄곧 궁금했던 어느 공간 회사의 공고를 발견했다.
호텔과 주거가 결합된 지점이 홍대에 새롭게 오픈되어 그곳에서 일할 사람을 찾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여행자가 아닌 여행자를 맞이하는 사람이 되어보는 것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얼마 간의 시간이 지나
나는 운 좋게 그곳에서 일하게 되었다.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그날,
처음으로 제대로 된 직업이 생겨 이제야 어른이 된 것만 같았던 그날,
나는 천만 원이 모이면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