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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함이 글을 쓰게 만든다

by 밥반찬 다이어리

어떤 이유에선지 모르겠지만 마음이 너무 편안하거나 평화로울 때는 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

그럴 때는 그냥 잘 써지고 못 써지고가 아니라 아예 글을 쓰는 행위로 넘어가지지 않는다.


내가 문학소녀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아주 어린 시절,

그때의 내가 매일 쪼그리고 앉아 일기를 썼던 것도 나를 불편하게 했던 것들이 주변에 가득했기 때문이다.

어른들한테 혼났던 기억, 우리 집이 더 잘살았으면 좋겠다는 불만. 이유는 많았지만 뚜렷하게 근거를 댈 수 없는 수 많은 감정들.

그렇다고 친구들한테 구구절절 말하는 타입이 아니었던 내가 그 불편함의 먼지들을 털어버리는 유일한 방법은 내 안의 생각과 감정을 글로 옮기는 것이었다.


늘 모든 사람에게 잔소리를 퍼붓던 이모가 어느 날 나 모르게 칭찬했던 적이 있었다.

"반찬이는 글은 잘써."

잠깐 이모집에 머물렀을 때 열받았던 것들을 나도 모르게 기록해놨었던 일기를 보고는 친척들한테 했던 말이었다.

수많은 불편함과 나를 억누르는 것들이 많았지만 어린 내가 커다란 그녀에게 대항하기 어려웠었기 때문에 일기장을 펼쳐 밤이건 낮이건 생각날 때 마다 무언가를 써내려갔었다.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그 때 무언가를 써내려갔던 나에 대한 기억이 잊혀지지 않는다.

내 평생 글을 가장 많이 성실하게 썼던 때가 그 시절이었다.

그때의 불편했던 감정들이 뭐였는지는 어슴푸레하다.

그러나 일기를 썼던 기억만큼은 선명한 걸 보면 감정의 액체를 휘발시키는 데 글을 쓰는게 확실히 효과가 있는 것 같다.


직업을 바꾸고나서 살아가는 스타일도 조금 바뀌었지만 직장인 시절의 9 to 6를 지키는 건 거의 그대로다.

사실 퇴근시간은 못지키고 있는데 일어나서 활동하는 시간은 정하는 게 필요하다 싶었기에 최소 9시 이전에는 컴퓨터 전원을 키고 무언가를 하려고 시동을 건다.

그렇다고 글을 바로 쓰는 건 아니고, 늘 문서를 열었다가 딴 짓을 하다가 결국엔 한 글자도 못쓰고 문서 창을 닫곤 한다.

'오늘도 못썼네 이런.'


누가 쓰라고 한 것도 아니고 나와의 약속을 지킨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것임을 요즘따라 더 실감한다.

이유를 들자면 디자인과 건강에 더 집중을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도 가끔은 불편하고 배고프고 분노(?)에 잠겼던 그 때의 내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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