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철엔 텃밭의 농산물이 별로 없어서 먹는 메뉴에 제한이 많이 생긴다.
요즘 가장 많이 나는 건 가지와 제때 수확 못해 늙어버린 호박 두가지 정도다.
고추와 파프리카는 까맣게 구멍이 생기는 탄저병에 걸려버려 건강한 상태로 먹기가 어려워졌으니 결국 가지와 늙은 호박으로 먹을 궁리를 해야한다.
9월초 농업박람회에 참가했을 때 농막업체 대표님의 디자이너 후배가 알려준 냉토마토 딥, 굳이 비슷한 이름을 붙이자면 가스파초가 최근 발견한 최애 메뉴이다.
방토 최대 수확시기가 살짝 지난 시점에 알아서 좀 아쉬웠지만 그 레시피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양파를 볶아 감칠맛과 단맛을 내는 베이스 요리를 자주 애용하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추석때 시어머니가 양파를 한보따리 주신다고 했을 때 넙죽 받아왔다.
내 일정이 바빠질수록 뒤늦은 호박 농사 풍년으로 수확해온 늙은 호박 세덩이가 거실 구석을 차지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움직임도 표정도 없는 그것들이 나와 동거를 하는 기간이 길어질 수록 나는 점점 호박 눈치를 보게 되었다.
"아. 언젠간 해먹어야 되는데."
결국 그 압박에 못이겨 제일 오래되고 무거운 호박을 두 손으로 떠받쳐 들어올렸다.
여름 방울토마토 시즌 끝물에서 만난 가스파초의 레시피를 떠올리며 주 재료 두개를 준비했다.
호박을 먼저 깨끗이 씻어 반을 가르고 조각내어 전자렌지에 익혀주고, 커다란 들통같이 생긴 깊고 큰 냄비를 꺼내 채를 썬 양파를 넣고 소금간을 해서 볶는다.
스프의 깊은 풍미와 감칠맛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다.
그리고는 전자렌지에 익힌 호박들을 냄비에 넣어 믹서기로 한번에 갈아준다.
이 정도까지 하면 그 자체의 아주 자연스런 맛을 느낄 수 있는데 왠지 살짝 아쉬운 생각이 든다.
그럴 때는 치즈를 넣어 콤콤한 향과 진한 풍미를 더해주면 아주 근사한 스프가 완성된다.
치즈를 고를 때는 높은 함량의 원유와 유산균으로 발효시켜 만든 자연치즈를 사용해야 풍미와 감칠맛이 배가된다.
시중에 우리가 사는 치즈에는 원유보다 다른 화학첨가물이나 부재료를 넣어서 가공한 것들이 많으니 뒷면에 성분을 확인하면 알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두면 좋을 것 같다.
이 늙은 호박스프는 재료와 요리법은 간단한데 조리 시간이 그만큼 오래 걸려 정성이 많이 들어간다.
특히 호박을 익히는 데 제일 시간이 오래 걸렸다.
덩어리가 워낙 크다보니 자르고 익히는 이 시간이 제일 지루했지만 시작하기 전의 망설임은 과정에 들어가면 잊혀진다.
그러하니 일단 시작해보는 것이 답이 된다.
오랜 시간 끝에 완성된 늙은 호박스프의 빛깔이란 맑지만 깊이가 있어 품위있는 노란 색이라고 할까.
식욕을 돋우는 이 스프에 숟가락을 한번 갖다대면 멈추기 어려울 정도로 중독성이 강하다.
"와. 맛있네. 야 늙은 호박 이거 꽤나 쓸모가 있어."
스프 그릇에 숟가락질을 반복하는 내게 호박은 말한다.
'나야 늙은 호박. 그렇지만 속은 그만큼 꽉차고 깊다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