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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읗 Jul 24. 2023

여행을 좋아하는 연인이 있다는 것

여행을 좋아하는 연인이 있다는 건,

어쩌면 정말 눈물 나게 고마운 일일지도 모른다.








1년에 한 번뿐인 여름휴가가 삶의 유일한 낙이었던 시절,

꽤나 다이나믹하고 고달팠던 직장 생활은 언제나 쉬이 지쳤고 또 도망가고 싶은 나날의 연속이었다.



남들은 계절마다 가는 여행.

여름휴가 그 며칠에 목을 매고 사나.

물론, 그 며칠조차도 핸드폰, 노트북과 한 몸이었으니 참 웃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던 내 인생에 비로소, 여행이라는 키워드가 제법 자주 등장하게 되었으니.

때는 아이러니하게도 전염병이 창궐하시절이었다.



더 아이러니하게도,

그 원동력은 내 인생에 다시 깊게 창궐한 홍길동 뺨치는 남자친구. 그의 온전한 공이었다.







1

어디든 걷기를 좋아한다. 더 정확히는 언제 어디서나 여행하듯 걸어댄다. 참된 뚜벅이 상이라고 해야 할까.

동네 마실도, 데이트도, 초행길에서도 언제나 새로운 길을 개척한다. 우리 동네 지리를 나보다 더 잘 아는 이상한 애다.




2

30년을 넘게 살았어도 내게 찾기란 언제나 어렵다. 낯선 곳에서 화장실이라도 다녀올라치면 내가 어디로 들어왔는지조차 감이 안 오기 일쑤.

반면, 남자친구는 길을 잘 찾을뿐더러 지도를 그렇게 좋아한다. 종이와 구글도 가리지 않는다.  번 누르기만 하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세상. 당최 어디서 가져온 건지도 모르겠는 종이 지도에 코를 박고 있는 너의 뒷모습이란...

전생에 혹시 홍길동이었니. 아님 김정호의 후손인가.




3

자꾸 여행을 가자고 한다. 'OOO 여행지 모음'이라든지 'OOO 어디까지 가봤니?' 따위의 링크 공유와 함께. 대략 한 달에 한 번꼴. 월례 행사와도 같다.

언제나 여행에 목마른 나는 이 연락 하나에 꽤나 기분이 좋다. 하지만 이내 온갖 제약을 끌어모아 여행 가기 어려운 이유에 대해 나열하기 시작한다. 그게 바로 실행력이 부족한 계획 변태 잇프제의 최약점. 여행을 향한 향수는 언제나 몹쓸 계획성에 철저히 무릎을 꿇었다.

그럼에도 불구, 감수성과 상상력, 그리고 이상한 추진력이 있는 인프피는 그런 나를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 꼬드긴다. 며칠 뒤 정신을 차려 보면 어느새 고속버스 안. 무서운 인간이다.






나는 재산과 시간과 체력의 밸런스가 가장 훌륭하다는 30대 중반 여성이고 심지어 n개월 차 백수(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던 무렵)였다. 무려 미혼이고.

그럼에도 여행을 떠난다는 건 언제나 많은 고민이 뒤따랐다. 상황이 좋던 나쁘던. 바쁘던 바쁘지 않던. 아마도, 제약과 눈치 투성이 속에 살았던 잇프제의 나쁜 습관 때문이겠지.

그가 아니었다면 재작년부터 쌓아 올린 무수히 많은 추억들은 절대 내 인생에 존재하지 않았을 거다. 장담할 수 있다. 백수 자취 기간도 허투루 보냈다며 분명 후회했겠지. 눈물이 찔끔날만큼.


여행, 그게 뭐라고.



이제 여행이라면 무조건 '콜'을 외치고 본다.

"카르페디엠(현재 이 순간에 충실하라)"이라는 말을 가장 좋아한다는 인간 덕에, 내 인생 조금씩 풍요로워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니 말이다.








다음 여행지는 어디가 될까.

벌써부터 궁금해지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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