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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읗 Apr 29. 2022

조금 다를 뿐인데, '돌연변이'라니요.

어느 공무원 집안 자제의 변(辯)



10년째 지겹게 듣는 말이 있다. 아니, 어쩌면 영원히 들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게, 공무원 하라니까. 왜 말을 안 들어."


물론, 화자는 언제나 아빠다. 평생을 바쳐 인천 행정직 공무원으로 재직하신 우리 아빠. 올해는 퇴임 후 벌써 5번째 해를 맞으셨다.


우직하고 정의로웠던 젊은 시절의 아빠는 기능직 공무원인 엄마를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고, 그 이듬해 이란성쌍둥이를 품에 안았다. 그때가 바로, 내가 보수적인 기독교 집안의 둘째이자 막내로 태어나게 된 해였다.


평온했던 우리 집에 때아닌 (내 기준) 지각변동이 일기 시작한 건, 지금으로부터 대략 10년 전. 제대 한 (고작 1분 차이로 먼저 태어난)오빠가 난데없이 공무원 도전을 선언한 것이다. 근데 붙어 버렸다. 그것도 엄청나게 빨리. 몇 년 뒤 오빠는 입사 동기였던 여자 친구와 결혼까지 골인하며, 일생일대의 '업적'마저 남긴다.


집안에 '전현직' 공무원이 무려 4명. 일명 '공무원 집안'이라는 스페셜한 네이밍이 기독교 집안에 추가된 것이다. 실로 업적이라 표현해 마땅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 이후, 이 집안의 '문제아'가 됐다.




공무원 집안에서 나의 첫 취업은 그야말로 '뜨거운 감자'였다. 사무실이 아닌 매장이, 나의 첫 번째 일터였으니 말이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바로 '저 말'을 듣기 시작한 게.


주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공무원만큼 안정적인 직업이 없으니까, 공무원만큼 시집 잘 가는 직업도 없으니까, 엄마 아빠가 공무원이니까, 오빠도 공무원이니까. 그랬다. 한 마디로 '당연히' 공무원을 했어야 한다는 얘기. 사회 초년생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벽에 부딪힐 때마다, '공무원'으로 시작하는 핀잔 섞인 말만 돌아왔다. 그 당시 나한테 '당연'이라는 건, 어쩌면 '반항'이었다.


공직 생활이 인생의 전부였던 부모님, 특히나 촉망받는 행정 공무원이셨던 아빠는 내가 하는 일이 당최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었을 거다. 하지만 인정해 줬으면 했다. 이해는 바라지도 않았고. 그저 믿고 지지해 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아빠의 미간 주름은 깊었고, 그 깊이만큼 나는 이 집안과 어울리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인생을 통째로 관통할 만큼' 꽤 아프고 서러웠던 기억이다.


넌, 이 집안의 '돌연변이'야.



피와 땀, 그리고 젊음을 갈아 넣어 슈퍼바이저이자 영업 담당자가 됐다.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나는 8년 차 직장인 아닌 8년 차 '돌연변이'로 진화의 진화를 거듭했다. 어쩌면 순도 90% 농담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때 확신했다. 인정을 받긴 힘들겠구나 영원히. 사실은 방에서 조금 울었던 것 같기도 하다.


'가장 폐쇄적'인 조직이라 일컫는 '공직 사회'가 삶의 전부였던 사람. 그런 나의 아빠는, 서울의 4년제 대학을 졸업한 내가 그저 평범한 직장인으로서 '안정된 삶'을 살길 바랬을 거다. 그게 '커리어 패스가 손바닥에 훤한' 공무원이었다면 더할 나위 없었을 거고. 아빠로서는 이해할 수도 감히 예상할 수도 없는 그런 고생길을 내가 제 발로 기어 들어 간 거다. 그게 한없이 아깝고 안타까웠을 나의 아빠는, 할 줄 아는 건 투박한 말뿐이라 그렇게 내내 모진 말만 뱉었다. 


30대 중반, 마침내 나는 아빠의 삶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갔을 그 마음도 함께. 내가 먼저 이해하고 인정하자,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는 듯 했다.




태어나 지금까지 공무원 부모님이 자랑스럽지 않은 적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 약 10개월 만에 9급 공무원 시험을 패스한 오빠는, 나는 감히 전설적 인물이라 여긴다. 사실은 누구보다 든든한 내 가족이 있어, 어쩌면 조금 다른 길로 가는 게 무섭지 않았다. 그 안정된 울타리가 없었더라면, '어두울 때 출근하고 동이 터서 퇴근해도, 추가 수당은커녕 씻기만 하고 다시 출근해야 했던' 그런 삶은 아마 진작에 포기했을 거다.


나는 현재 비자발적인 퇴사 후 약 7개월째 안식년을 갖고 있다. 무려 '미혼'인 상태로. 그렇다. '전현직' 공무원들로서는 결코 이해하기 힘든 그 대단한 걸 내가 또 해내는 중인 것이다. 하하. 어쩌면 나는 이 집안에서 영원히 문제적인 인간으로 남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게 나이고, 이런 나를 그저 무심한 말로 안아주는 사람들이 바로 여기 있는 걸.


나는 아마 앞으로도 '저 말'을 종종 듣게 될 것이다. 바라건대, 더 이상은 '미간'이 아닌 '눈가의 주름'이 함께 하길. 웃을 때 자연스레 생기는 깊고 진한 그 주름이길 바라고 바래본다. 


"아빠, 맘고생시켜서 내가 미안해."



- 아빠의 망할 딸년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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