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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마이 Apr 01. 2022

믿지 않음을 믿는 것

<불신지옥>(2009) 리뷰




<불신지옥>

(Possessed, 2009)

한국/106분/공포

감독 : 이용주

출연 : 남상미, 류승룡 외












 아무리 생각해도 한국 최고의 공포영화를 꼽으라면 이 영화를 뽑을 것이다.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어도 내심 아쉬운 부분이 드는 것은 당연함에도, 그러한 아쉬움 하나 없이 깔끔하게 펼쳐지는 이 영화. 우리에겐 <건축학 개론>으로 익숙할 이용주 감독의 전작이자 데뷔작이다. 이런 엄청난 데뷔작을 만든 그가 언제쯤 다시 공포 장르에 발을 들일지 늘 기대하고 있는 중이다.



 이용주 감독은 <건축학 개론>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건축학과 출신의 감독이다. 그 부분은 <불신지옥>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영화의 중심 배경이 되는 아파트를 활용하는 방법이 그러하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아파트는 지하실부터 옥상까지, 층간의 관계, 방과 방 사이의 구조, 베란다의 디테일까지 빠짐없이, 훌륭하게 사용된다. 이 영화에서 '연출이 섬세하다'라고 느낄 수밖에 없는 부분이 여기에 있다. 그는 공간을 활용할 줄 알고, 그것을 관객들로 하여금 느끼게 만드는 능력이 있는 감독이다.



 <불신지옥>이라는 다소 자극적인 제목은 영화 내에서 우리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 믿음이 무엇일까? 믿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우리는 어째서 무엇인가를 믿게 되는 것일까? "난 지금이 지옥이야, 알아?" 극 중 희진이 엄마에게 내뱉는 대사이다. 기도를 해야 천국을 갈 수 있다는 엄마의 말에 희진은 울분을 터트린다. 희진은 달동네에서 자취를 하고, 아르바이트를 몇 개씩 하고, 감기를 달고 살면서 대학에 다닌다. 2009년 작품이나, 그녀의 삶은 지금의 청년들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들은 '지옥'을 살아간다.














 그리고 이 영화가 '한국' 공포영화 중 최고라고 생각하는 이유 중 가장 큰 부분은, 어쩌면 가장 '한국'적인 영화이기 때문이다. 비단 희진의 삶이 한국 청년들의 삶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 아니다. 미디어가 잘 드러내지 않는 허름한 아파트의 모습, 등장인물들의 리얼리즘, 어느 것 하나 과장되게 느껴지지 않고, '영화'이기에 납득되는 부분이 한 군데도 없다. 모두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느껴왔던 것들로 가득하다. 특히나 '한국'의 기독교의 모습과 가장 '한국'적인 무당이 연결되는 부분은 어째서 이것이 '한국' 공포영화로써 큰 가치를 지니는지에 대한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공포영화의 미덕은 관객들에게 '공포'를 주는 것이다. 그리고 관객들에게 공포를 주는 가장 쉽고, 어쩌면 가장 게으른 방법은 마구잡이로 놀래키는 것이다. '점프 스케어'가 그 대표적인  예시일 것이다. 점프 스케어가 나쁜 것은 아니겠지만, 감독의 엄청난 역량을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부분에 있어 <불신지옥>이 대단하다는 것이다. 점프 스케어 하나 없이 관객들에게 공포를 심어준다. 그리고 그 부분은 앞서 서술한 '한국'적인 영화의 내용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삶과 밀접한 등장인물, 모습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공감'을 유발한다. 이 공감은 영화 속 등장인물이 처한 상황을 더욱 몰입하여 느끼게 만들고, 결국 이 지점이 <불신지옥>이 '공포' 장르로써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는 가장 큰 이유인 것이다.
















 배우들의 열연도 굉장하다. 희진 역의 남상미는 연기를 가장 잘하는 배우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이 '희진'이라는 역할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임에 틀림없다. 심은경의 신들린(리터럴리 '빙의') 연기는 두말할 것 없고, 태완 역의 류승룡도, 장영남도 훌륭하다. 그러나 가장 뛰어난 건 '엄마' 역의 김보연 배우라 생각한다. 이 배우들의 연기가 없었다면,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인 '공감'의 힘은 굉장히 약해졌을 것이다.




  <4인용 식탁>과 <독>이 말하고 싶었던 것들이 이 영화에 담겨 있다. 또한, 대한민국을 강타한 <곡성>의 밑그림이 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불신지옥>은 '한국 문화권'을 경험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작용하는 힘이 너무나도 다르다. 한국 문화권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아주 특별한 경험으로 다가올 것이라 확신한다.




 영화의 캐치프레이즈는 '믿습니까?'이다. 영화는 끝없이 우리에게 질문한다. 당신은 당신이 믿는 것을 믿느냐고, 나아가 당신은 '무엇을' 믿느냐고 묻는다. 우리는 영화가 끝난 후에도, 아마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계속해서 고뇌해야 할 것이다. 무엇을, 어째서, 어떤 방식으로 믿느냐고.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믿지 않음을 어떻게 믿느냐고 말이다.
























+) 스포일러 있음












1) 영화에 등장하는 독특한 구조로는 '신병'이 있다. 신이 깃들리기 전 이유 없이 아픈 것을 뜻하는데, 감기를 달고 살던 희진이 그러했고, 태완의 딸이 그러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빙의가 일어난 이후, 옥상에서 희진은 단 한 번도 기침을 하지 않는다. 태완의 딸은 갑작스럽게 병이 치료되어 희진에게 보였던 학을 바라본다. '학'을 매개로 신이 옮겨감을 알 수 있으며, 소진이 사라진 날(사망한 날)부터 희진에게 귀신이 보임으로 말미암아 원래 이 '신'은 소진에게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겠다.







2) 희진은 현대 과학, 혹은 무신론을 의미하고, 엄마는 기독교, 소진은 무속신앙을 의미한다고 보았을 때, 이 3개의 믿음이 교차하는 영화로도 해석해 본다. 마지막 옥상 장면에서 무속신앙은 이미 죽어 있다. 무신론과 기독교는 대립하다 결국 두 종교 모두 '추락'하고 만다. 그리고, 그 순간 무속신앙은 다시금 살아 있음의 가능성을 넌지시 던진다. 이 지점을 통해, 감독은 어쩌면 우리가 흔히 '과학적'이라 여기는 것들도 결국 과학적인 것이 더 훌륭한 것이라는 '믿음'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어찌 되었든 신이 있다는 증거도 없으나 없다는 증거도 없는 것은 사실이며, 우리가 신이 없다는 사실을 '맹신'하는 굉장히 모순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음을 역설하는 것 같기도 하다.







3) 희진은 병원을 믿지 않는 엄마를 못마땅해 하지만, 결국 본인도 병원에 가보라는 약사의 말을 거절한다. 이는 이후 경찰을 믿지 않는 엄마에 대한 태도로도 드러난다. 결국 본인도 종국에는 경찰들의 말을 믿지 않게 된다. 그리고 절체절명의 순간, 소진이가 부활했다는 엄마의 말에 희진은 분명 소진이가 죽었다고 '믿음'에도 불구하고, 소진이가 '살아났다'라는 믿음으로 인해 뒤를 돌아본다. 이 참으로 역설적인 장면은 결국 우리에게 믿음에 대한 회의감을 안겨주기도 하며, 어쩌면 믿음의 통합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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