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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마이 Apr 18. 2022

잔인한 '착한' 어른들

<아무도 모른다> 리뷰


<아무도 모른다>

(Nobody Knows, 2004)

일본/140분/드라마

감독 : 고레에다 히로카즈

출연 : 야기라 유야, 키타우라 아유 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의 GV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당신이 반드시 만들고 싶었던 영화가 이 <아무도 모른다>이다. 스가모 아동 방치 사건을 토대로 한 이 영화는, 차마 어떤 말을 얹기도 곤란한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장기인 다큐멘터리 촬영기법이 가장 잘 드러나는 영화이면서도, 그 지점이 어쩌면 가장 '영화적'인 연출로 느껴지는 작품도 <아무도 모른다>일 것이다.



영화는 정말이지 잔인하다. 영화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아이들은 어느 누구도 울지 않는다. 유일하게 눈물을 보이는 사람은 다름아닌 '엄마'이다. 엄마가 떠난 후, 아이들은 단 한번도 울지 않지만, 그 모습을 보고 있는 관객들은 분노하며 눈물을 흘리는 기이한 광경이 펼쳐진다.



영화 속 아이들에게 두드러지게 결핍되어 있는 특성은 바로 결여된 사회성이다. 베란다로도 나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들이 사회성을 기를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다. 문제는 단지 사회성 뿐만이 아니라, 이들은 기본적인 감정의 교류도,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도 배우지 못했다. 어느 순간에서 화를 내야하는지, 어느 순간에서 눈물을 흘려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영화에서 유난히 많이 보이는 장면은, 바로 아이들이 '혼자' 노는 모습이다. 아이들이 다 함께 노는 장면은 그야말로 '영화적'인 모습으로, 판타지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들에게 다가온다. 그 순간이 아니고서는, 아이들은 모두 혼자다. 그 아이들이 해맑게 웃으며 노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이 영화를 보고 있는 나 자신이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어진다. 어쩌면 <기생충>보다 보기 힘든 영화가 바로 <아무도 모른다>일 것이다.













엄마는 말한다. '나는 행복하면 안돼?' 그리고 말한다. 자신이 나쁜 것이 아니라 도망친 아빠들이 나쁜 것이라고, 전혀 틀린말이 아니다. 이런 방식으로 감독은 관객들로 하여금 엄마에게 이입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놓는다. 선악의 구분을 잘 하지 않는 감독다운 설정이다. 엄마가 떠나기 전까지, 아니, 다시 돌아오지 않기 전까지 관객들은 어머니와 아이들의 관계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못한다. 그야말로 행복해보이는 이 가족의 모습에서 엄마가 겪었을 고난을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럼에도 보호자들을 옹호할 수는 없다. 특히나 아빠(라고 부르기도 부끄럽다.)들의 태도는 그야말로 끔찍하다. 그런 아빠에게 찾아가는 아키라의 모습에서는, 아빠를 향한 일말의 분노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그 지점은정말이지 공포스럽게 느껴진다. 아키라는 어른들에게 분노하지 않는다. 분노하는 법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키라가 친구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놀 때,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나머지 3남매의 모습, 그 친구들을 바랄 수밖에 없는 아키라의 모습. 어느 관객이 아키라를 욕할 수 있겠는가? 피아노를 사겠다며 모아둔 돈을 아키라에게 건네는 교코, 베란다로 나가면 안된다는 말에 장난감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시게루, 아폴로 초콜렛을 엄마가 온다고 약속했던 본인의 생일까지 아껴둔 유키까지. 이 아이들의 행복한 지옥은 관객들로 하여금 굉장한 고통을 안긴다.




아이들은 엄마의 사랑을 원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모른다. 그렇기에 교코는 엄마의 화장품을 떨어트려 엄마의 관심을 얻고, 돌아오지 않는 엄마의 옷을 버리려는 아키라를 온몸으로 막아서며 본인의 마지막 희망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이미 교코는, 세뱃돈 봉투에 적힌 다른 필체로 엄마가 돌아오지 않음을 알고 있다.













유키는 죽음을 맞이한다. 이 잔인한 영화는 결국 끝까지 죽음 이후의 유키를 보여주지 않는다. 유키의 죽음에 대처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더더욱 잔인하다. 죽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들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혼란스러워한다. 아키라는 유키에게 비행기를 보여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유키를 트렁크에 넣는다. 그 때 교코가 말한다. 이사 올 때 트렁크에 잘 들어가서 온 유키가 그새 커버렸다고. 그리고 교코와 시게루는 비행기를 보러 가는 유키를 보며 말한다. 이제 유키와 안녕인거냐고. '죽음'은 그저 '사요나라'라는 가벼운 일상의 인사로 변한다.




이 영화의 독특한 지점은 바로, 정말 철저하게 '아이들'의 시선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큰 도움이 될지는 않을지언정, 아이들에게 직접적인 가해를 하는 어른도 없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생들은 아키라의 누명을 벗겨주고, 세뱃돈에 적을 이름을 대신 써주고, 폐기음식들을 몰래 전해준다. 또한 이웃들도 아이들의 모습이 처참하게 변해감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그저 귀엽다며 인사해주고 가는 것이 전부다. 집주인 역시 이미 쓰레기통으로 변한 집을 보고서도 그저, 다시 돌아갈 뿐이다.



그리고 이 직접적인 가해를 하지 않는 '착한' 어른들이, 얼마나 폭력적인 모습임을 역설한다. 아이들은 머리를 자르지 않아 산발이고, 더 이상 물도 가스도 나오지 않아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빨래를 하고 물을 퍼다 쓴다. 이 잔인한 어른들은 이 모습들을 그저 넘긴다. 아무도 아이들에게 화도 내지 않는다. 정말이지,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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