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보면 첫째 아이 임신때와는 달랐다.
첫째 아이 임신했을 때는 아이가 뱃속에서 크기도 했고 걷기 운동을 해야 자연분만으로 낳을 수 있다기에 열심히 걷고 또 걷고 먹는 것도 잘 먹었다. 입덧이 잠깐 있긴 했지만 말 그대로 잠깐이었고 먹기도 잘 먹었다.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는 유독 걷는 것이 힘들었다. 조금 걷다가 너무 힘들고 숨이 차서 많이 걸어 다니지도 못했다. 뭘 하기만 하면 힘에 부쳤다. 입덧도 참 힘들게 했다. 먹기만 하면 토하고 힘들어서 정말 어떤 날은 손으로 넣어 뱃속에 있는 아이를 꺼내고 싶다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둘째 아이 임신했을 때는 너무 힘들었던 기억이다. 그저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하고 말았다. 어느 날은 산부인과에 갔는데 팔, 다리가 좀 짧다는 이야기도 들었었다. 불안한 마음에 검색을 해보니 뱃속에서 팔, 다리가 좀 짧았는데 대부분 별 이상 없이 출산했다는 이야기들 뿐이어서 안심을 했다.
낙엽이 비처럼 쏟아지던 날. 그즈음으로 기억한다.
둘째 아이가 태어났다.
출산 전이었던가? 출산하고 나서였던가? 기억이 벌써 가물가물하다. 선천성대사이상 검사를 신청했었다. (선천성대사이상 검사란 주요 대사이상 질환을 선별하는 검사를 말한다. 생후 3~7일 혹은 5~7일 이내 채혈해서 검사를 하는 것이다.)
아이를 낳고 그 기쁨도 잠시, 큰 병원으로 가봐야 할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무슨 수치가 높다면서. 지금도 그렇지만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말은 언제나 들어도 겁부터 난다.
대학병원에 예약을 해두고는 마음을 졸이며 이런 상황이 있는 사람은 혹시 없는지, 괜찮아지기는 하는 건지 인터넷으로 찾아보고 또 찾아봤다. 다시 재검사를 해보니 수치가 정상으로 나왔다는 사람이 대부분이어서 속으로 '괜찮을 거야. 우리 아기도 괜찮을 거야.' 되뇌며 한 편으로는 또 혹시 모를 일이니 초초하고 불안했다.
이전이었던가 이후였던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몹쓸 기억력. 출산 후 산부인과에 있을 때 검사를 한 것일 텐데 청력에도 이상이 있다고 했다. 대학병원에서 난청검사를 받아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귀도 안 들린다고? 자꾸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심장이 또 쿵쾅쿵쾅거렸다.
대학병원에서 다시 재검사를 받고 결과를 또 기다렸다.
결과는 내가 원하는 결과가 아니었다. 수치는 여전히 높았고 페닐케톤뇨증 같다며 지금 당장 청주에 있는 병원으로 가보라고 전화가 왔다. 그 전화를 받고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내 아이가 정상이 아니라고? 페? 뭐라고? 이게 무슨 말이야. 듣도 보도 못한 병명이었다.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지고 정신이 하나도 없어진다. 당장 가보라고는 하는데 남편은 일을 가고 없어서 친정 엄마에게 연락을 드렸다. 엄마가 부랴부랴 오셔서 청주까지 데려다주셨다. 청주에 있는 병원에 도착하니 사람이 북적북적. 자기 차례도 아닌데 들락날락거리고 처음 그 병원의 느낌은 도떼기시장 같았다. 대학병원도 아닌 여기서 내 아이의 이름 모를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 차례가 되어 들어갔는데 페닐케톤뇨증이라고 하셨다. 그때는 그 단어가 익숙지 않아서 '페뭐라뭐라고'하는 소리로만 들렸었다. 당장 입원을 시켜야 한다고 했다. 심장이 쿵쾅쿵쾅 거린다. 선생님이 질문을 하시는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머릿속이 하얘지고 아무 생각이 안 나서 말이 안 나왔다. 옆에서 엄마가 대신 대답해 주셨다.
바로 입원을 시켜야 한다고 하셨어서 태어난 지 며칠 되지도 않는 둘째 아이를 그 병원에 입원시키고 나는 엄마와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이 어땠었는지 아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기를 거기에 입원시켜 두고 나는 매일 그 병이 뭔지 찾아보고, 매일 또 울었다. 그 병에 대해 나와있는 것도 별로 없었지만 나와있는 몇 개 마저도 뇌에 손상이 가서 좋지 않은 모습뿐이었다. 암담했고 우리 가족은 불행해질 거라고 생각했다. 치료비, 병원비로 경제적으로도 힘들 것이고 가정이 잘 유지될 수 있을까 싶기도 했다.
매일 슬퍼서 울다가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하고 살았어,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나를 왜 이렇게 힘들게 해, 나는 이제 더 이상 착하게 살지 않을 거야 하며 분노했다. 또 밤이 되면 둘째 아이와 어떻게 죽을까 생각했다. 혼자 보내는 건 너무 미안하니 내가 같이 가야겠다 싶었다. 첫째는 아빠도 있고, 양쪽 할머니 할아버지가 다 계시니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첫째 아이에게도 둘째 아이에게도 참 미안한 생각이었다.
남편이 일을 하기도 하고 우리는 청주에 살고 있지 않기도 해서 일주일에 한두 번밖에 보러 갈 수가 없었다. 가까우면 혼자라도 매일 다녀올 텐데 그러지도 못했다. 아이를 버렸다고 생각했는지 병원에서는 왜 아기 보러 안 오냐며 전화가 오기도 했다.
한 번씩 가서 입원해서 혼자 누워있는 둘째 아이를 보자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지금 나랑 같이 집에서 뒹굴뒹굴하고 있어야 하는데 저기서 잘 있는 걸까. 아이를 낳긴 했는데 볼 수가 없었다. 이렇게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잠깐 보는 것 이외에는 말이다. 발 뒤꿈치에는 바늘 자국이 여러 개 있었다. 수치 검사를 했어야 하는데 채혈을 발 뒤꿈치에서 한다고 하셨다.
아이를 보러 가서 우리는 한 번도 안아보지도 못하고 창 밖에서 바라만 보다 나왔어야 했다. 가뜩이나 엄마 아빠도 잘 못 봐서 웃는 모습을 보여줘도 모자란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하염없이 울다가 돌아오곤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모유를 짜는 일과 그 선생님을 믿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이를 낳았는데 집에 아이가 없으니 이상했다. 그냥 슬프고 나쁜 생각들이 아이의 빈자리를 채웠다.
남편은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나만큼 그 병이 뭔지 많이도 찾아본 것 같았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좋은 이야기는 없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