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를 한글파일 한 장 + 1/3 정도로 풀어쓴 이야기
학창 시절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낱개로 남은 기억은 군데군데 뭉쳐 자존심 아니면 쪽팔림이라는 두 가지 공간으로 흩어졌다. 10살 무렵 매일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로 친했던 친구가 다른 친구와 더 친해졌을 때 어느 말도 하지 않은 자존심, 17살에 잘생긴 어떤 선배한테 거절당한 쪽팔림 뭐 이런 것만 모여서 내가 만들어졌다. 며칠 전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났다. 나는 애들 앞에서 큰 소리로 비꼬던 몇몇 선생님만 기억나는데 걔네는 모든 선생님의 생김새, 성함, 별명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은 잊었던 추억을 주먹으로 한 움큼 쥐어 품 안에 통째로 안겨주고 떠났다. 정말 좋아하는 중학교 친구는 우리가 몇 반이었는지 기억한다. 심지어 본인과 하나도 친하지 않고 나랑 친했던 친구가 몇 반인지 알고 있다. 난 그런 게 기억이 안 난다. 말로 하기 싫을 만큼 쪽팔렸던 날이 어제 같을 뿐이다. 똑같은 남을 떠올리는데 친구들은 남을 생각하고 나는 나를 생각한다. 정확히 말하면 친구들은 남과 함께 어울리던 ‘나’를 기억하고 나는 남에게 보이는 ‘나’를 기억한다.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어릴 적부터 남이 많이 보였다. 그들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비언어적인 표현들이 차고 넘쳤다. 보이는데 보이지 않는 것처럼 사는 건 굉장히 어려워서 항시 눈을 부릅뜨며 살았다. 덕분에 얻은 능력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남을 참 많이 사랑하는 일이다. 이는 오래 보고 싶은 존재들에게만 적용된다. 알다시피 사랑은 나쁘지 않다. 무조건 좋을 수 없다는 사실조차 용인하게 만드는 유일한 감정이다. 넓히면 넓혔지 좁히고 싶은 능력은 아니다. 문제는 남은 하나다. 이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고 가끔 없애고 싶다. 누군가에겐 사회성의 척도로 불리는 그 단어는 눈치다. 오랜 눈치 시절을 보낸 후, 눈치가 없다는 말을 ‘듣는’ 사람이 눈치가 가장 빠르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그들은 중간에 끼어들거나 눈치 빠르게 행동하면 얼마나 귀찮은 일이 펼쳐질지 잘 안다. 여기서 다시 두 부류로 나뉘는데 한 부류는 남에게 피해 입히지 않고 적당히 할 일을 하며 체력이 남으면 남을 조금 돕는다. 다른 부류는 남에게 피해 끼쳐도 가만히 눈만 껌벅인다. 후자보다 전자가 되고 싶었는데 내가 어떤 사람일지는 모를 일이다. ‘적당히’라는 단어만큼 애매하고 주관적인 말은 없으니까. 나를 겪어본 100명이 입을 모아 적당하다고 해주는 게 아닌 이상 알 수 없다. 아, 스무 살엔 이런 거만 궁금했다. 나는 남에게 무슨 평가를 받고 있나. 제일 예뻐 보이고 가장 똑똑해 보이고 매우 재밌어 보이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지금은? 100명이 하는 평가를 왜 듣고 있나.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 그 시간에 커피 마시고 책 보는 게 현명하다.
삶의 비율이 [나 : 남 = 1 : 9]였을 땐 남이 없이 나를 설명할 수 없었다. 어른이 되면 탐나는 남의 방을 모조리 가진 내가 되고 싶었다. 새로운 마지막으로 나아갈 생각은 당연히 없었다.*
조금 더 살고, 내게 관심 없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고, 나와 남을 약간 포기하고, 읽기와 쓰기에 관심을 가질 때쯤 삶의 비율이 [나 : 남 = 4 : 6]으로 균등해졌다. 나는 나고 남은 남이라는 간단한 필터로 사람을 보니 꼬여있던 마음이 조금 단순해졌다. 행복과 기쁨과 질투와 열등감을 애써 해석하거나 비교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언젠가 ‘슬프다’는 단어가 한 번도 들어가지 않는 슬픔을 쓰고 싶다. ‘애써 긍정하지’ 않는 마음, ‘일부러 사랑하지’ 않는 마음, ‘구태여 힘내라고’ 하지 않는 마음을 함께 담아서.
그리하여 이 글을 썼다. 여기엔 내 찌질함이 극소량 담겨있다. 슬픔을 쓰려면 솔직해져야 한다. 아직 슬픔을 쓸 용기가 없어서 대신 찌질한 걸 들고 왔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솔직하다는 말은 거짓이나 숨김이 없이 바르고 곧다는 뜻이다. 나 또는 남에게 상처를 주는 솔직함은 솔직함이 아니다. 그 안에는 바르고 곧은 마음이 없다.
이 글은 고르고 골라 쓴, 경계가 심한 솔직함이다. 나와 남에게 보여주어도 편안한 솔직함을 쓰기 위해 나를 더 알아야 한다. 나를 알아가는 건 우주를 탐사하는 일이다. 평생 우주를 탐사하는 과학자들은 끝이 없는 우주를 보며 본인이 미물로 느껴져 우울하다고 한다. 어쩌면 어른이 되는 일이 그렇다. 아무리 탐사해도 수많은 내가 나오니, 대체 나는 누구인지 알 수 없어 우울해지곤 한다. 그러나 수많은 독립적인 행성이 다른 행성과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본인의 정체성을 찾아 빛나듯이 사람도 그럴 것이다. 남과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수많은 나를 탐사하면 어느샌가 어른이라는 우주가 되어있을 것이다. 나 혼자만 빛나려고 하지 않고, 남만 빛내려고 하지 않는 그런 우주가.
그러므로 ‘어른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그대로 되묻겠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어른이다.
* 글쓰기 수업(5주 동안 4번의 글을 씀)에서 첨삭을 도와주시는 작가님께서 주마다 제시해주신 글감을 아울러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