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은 X 같은 년이었다.
‘슬럼프가 있었다’ 라던가, ‘최악의 한해였다’ 라던 가의 표현으로 순화해 몇 번을 고쳐 쓰다
도저히 이 말을 대체할 수 없음을 다시 한번 느꼈다.
누군가 지난 32년의 인생에서 언제가 가장 행복했냐고 물어본다면, 꽤나 복잡한 생각 속을 헤매어야 하겠지만
언제가 가장 X 같았냐고 묻는 다면 난 한치의 망설임 없이 2021년을 꼽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의 남은 인생에서도 그래야만 한다.
지난해에는 여러 가지 사건 사고가 많은 해였다.
코로나는 결국 해를 넘기고 말았고, 2020 도쿄 올림픽은 기어코 열리고 말았으며, 나는 스트레스로 회사를 2달 동안 쉬었고, 우울증과 공황장애로 병원을 다니게 되었으며, 거주 중인 자취방의 건물주가 사기 치고 도망가려고 했고, 발목을 심하게 다치고, 오래 만난 여자친구와도 헤어졌다. (차마 글로 전하지 못한 다양한 이야기가 더 있긴 하지만 이쯤만 하는 것으로 하자)
너무 안타까워할 필요는 없다.
시간은 제법 흘렀고, 나는 괜찮아졌으며, 대다수의 일은 나름의 방법들로 해결을 해냈다.
한 가지만 빼고.
혼자가 되고 그 간의 시간들을 리뷰하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지금까지의 연애사를 돌이켜보면, 그래도 나는 제법 운이 좋은 편이었다. 감사하게도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너무 가깝지도 또 너무 멀지도 않은 관계일 즈음 연애가 시작되곤 했다. 남사스럽게 먼저 좋다고는 못해도, 누군가 나를 좋다 하면 그저 그게 좋았던 나였다. 20살 이후로 연애를 쉰 적이 없었으니. 아마 지난 십몇년간 혼자였던 시간은 결코 길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엔 연애를 좀 쉬기로 했다. 제법 긴 연애들로 지쳤던 마음과 어차피 곧 있으면 장가도 가게 될 텐데,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또 혼자가 되어보겠는가. 그렇게 해서 나는 10년여 만에 자유 이적시장에 나오게 되었다. 평생을 바르셀로나에서 있던 리오넬 메시가 자유 이적시장에 나오던 바로 그 무렵이었다.
하지만 혼자로 보내겠다는 그 결심이 결코 자의가 아닌 것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메시보다 키도 12센티나 크고, 3살이나 더 젊으며, 더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나였지만, 이적시장에서 러브콜을 받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세상은 혼자서도 재미있게 노는 방법을 계속 만들어냈고, 코로나로 사람을 만나기는 더욱 어려워졌으며,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니 찌릿! 한 만남 같은 것도 있을 리 없었다. (물론 유교보이로서 번호 따기 같은 건 해본 적이 없기도 했다) 뭐 요즘 사람들은 소개팅을 통해 만난다고 하던데.. 사실 난 소개팅이라는 문화 자체를 좋아하진 않는다. (한 번도 못 해봐서 그런 게 아니다. 난 할 필요가 없었다고!) 애인이 없는 남녀가 시험장에서 만나 서로에게 점수를 매겨보고 합격을 하게 되면 서로 사랑을 하기로 합의를 한다. 심지어 지원서 제출 단계에서 탈락해 시험장에 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아! 이 얼마나 세속적인 문화인가. 도서관에서 같은 책을 뽑다 눈 맞는 상황을 생각하는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하지만 바야흐로 자기 PR의 시대가 아닌가. 몇 개의 단톡방을 뒤져 이적시장에 나왔음을 열심히 홍보했다.
SNS를 잘 하지도 않을뿐더러 프로필 사진으로도 티를 내는 것을 별로 안 좋아했었으니, 이미 사람들에게 나는 항상 연애 중인 사람으로 각인이 되어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제법 괜찮은 인생을 살아온 덕분인지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소개팅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
여사친들의 도움으로(시키는 데로 가 더 맞을지도..) 멋진 사진들과 궁극의 프로필을 만들어 퍼 나른 덕분이었다
키 181(필라테스하면서 더 커질 예정)
육군 병장 만기 전역(민방위)
연매출 40억 규모 스타트업 임원
필라테스, 축구, 한강 산책 등을 통해 건강한 삶 추구
재치와 유머가 뛰어남(다수의 행사 및 레크리에이션 MC 진행)
영화 매니아(왓챠피디아 상위 0.1%)
여의도 인근 전세대출 9평 원룸 자취 중 (거리두기 시간에도 만남 가능)
인내력이 좋은 장기연애자
외모 호감형 (속눈썹 예쁘다고 여자들이 물어봄)
소주 3병 내외(술 먹고 사고친적x)
유흥 안 좋아함(성매매 룸싸롱 원나잇 경험 무)
이성친구 적당히 있음(여사친 거의 시집가고 연락 안 됨)
양부모님 건강하시고 동생 대기업 다니고 가족 화목함
장기 연애 부분은 오히려 마이너스 요소라며 아직까지도 빼라는 사람이 많지만, 나는 잘 보이기보다는 나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으로 하고 싶어 넣어두었다.
진행력과 재치와 유머, 순발력, 발표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나에게 소개팅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였었다.
몇 개의 어리숙한 에피소드들이 있긴 하지만, 몇 번 해보니 기출문제라는 게 정해져 있어 대답하는데 어려운 게 없었다. 오히려 소개팅을 거듭할수록 더 유창한 답변이 나오게 되었다. 나는 이제 어떠한 질문도...
“민휘 씨는 어떤 사람이에요?”
“예?”
아씨.. 논술형...
나 다운 게 뭔데? 같은 90년대 청춘드라마의 대사를 뱉어낼뻔했다.
어? 근데 나 다운 게 뭐지?
어떤 일의 계기가 되는 것은 생각보다 거창하지 않기도 하다. 어쨌든 이러한 사유로 이번 2022년은 나 자신과 더 친해져 보기 위해 나 자신에 대해 '연구' 해보는 한 해로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제일 먼저 찾은 것은 사주풀이 집이었다.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를 이야기하고 숨죽이고 어떤 대답이 나올지를 기다렸다. 장가를 언제 가냐는 물음에 마흔 살 무렵에 간다고 한다.
"아니 선생님... 다시 한번 봐보세요 그거 제 사주가 맞나요?...
아, 아니면 요즘에 결혼은 하되, 혼인신고를 자식 학교 들어갈 때쯤 늦게 하는 경우가 많다던데 결혼식 기준인지 혼인신고 기준인지 그런 건 안 나오나요? ㅎㅎ"
사주가 메마른 땅의 기운을 가진 탓에 물의 기운인 여자가 들어와도 금방 빠져나간다고 한다. 태생적으로 물을 찾게 되는 사주로 물이 가까운 지역에 살게 될 것이며 수원이나 당산 같은 곳에서 살지 않았냐고 말해주셨다. 정확히 수원에 살다 당산으로 이사 온 나는 더 이상 따지지 않고 조언에 따라 물의 기운을 가까이하고자 어항을 주문했다.
살면서 알러지로 불편함을 느꼈던 것은 아니었지만, 원체 예민하지 않은 탓에 모르고 살았을 수도 있으니 검사를 받아보았다. 피를 뽑아 검사를 했는데 진드기에 알러지가 심하다는 것과, 새우, 복숭아에 약한 알러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애매하게 남은 소주를 비우기 위해 황도를 시키는 것은 차마 그만두지 못할 일이었을 테고. 자취방의 침대 매트리스를 바로 버렸다. 어차피 장가가면 새로 침대를 살 테니 미뤄왔던 일이었는데 어쩌면 마흔 살에 장가를 갈 수도 있으니...
집으로 보내준 키트에 침을 뱉어 보내면 유전자를 검사해준다고 한다. 바야흐로 21세기다. 침에 있는 유전자의 성분을 분석해 기능별 얼마나 좋은 유전자를 가졌는지, 유전될 확률은 얼마나 되는지를 분석해주는 검사인데 내 자식의 탈모 걱정은 덜게 되었으나, 근육 발달능력과 악력이 매우 낮은 수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된 이상, 내 자식은 몸캐보다는 지능캐로 키워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밖에도 건강검진, 수면다원검사, 타로카드 등 다양한 연구 주제들이 남아있다. 남은 기간 동안 성실히 연구를 수행해 나갈 예정이다.
그리고 이 밖에도 한 가지 더 해본 것이 있는데...
나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인터뷰집을 만들어주는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한 달 동안 하루에 하나씩 문자로 질문이 온다. 그럼 나는 하루 동안 고민하고 11시 59분까지 작성해낸다. 뻔한 질문들도 있으나, 때로는 생각해본 적도 없는 질문에 하루 동안 고뇌의 시간을 보내기도 하며 자신을 더 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여느 질문도 쉬운 것이 없었지만 가장 어려운 일은 제목을 정하는 일이었다. 나름 창의적인 사고와 네이밍에 자신이 있었던 만큼 더 신중했다. 그러니까, '화룜점정'이라고 마지막에 용의 눈동자를 채워 넣는 것처럼.
프로그램 편집 담당자에게 부탁해 원래 인터뷰집의 맨 앞쪽에 들어가는 자기소개 페이지를 빼고 기어코 '작가의 말'을 집어넣기로 했다. 이 페이지를 채우면서 기가 막힌 제목이 생각났다.
2022년은 나 자신을 연구해보는 한 해로 보내기로한 결심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내 이야기를 들은 친구가 추천해주어 알게된 프로그램이었다.
생각보다 비싼 비용과 매일 마감의 압박을 이겨낼 자신이 있었던 것은 아니였지만, 내 자신과 좀 더 친해져보기 위해 하루하루 창작을 해야하는 고통의 구덩이 속에 스스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 구덩이 속에 처음 들어갔을 때 나는 어떤 욕망과 싸워야했다. 내 자신을 좀 더 멋져보이는 사람으로 포장하고 싶은 마음과, 온갖 미사여구들로 글을 멋드러지게 꾸며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 먹고 벌거 벗고있기로 했다.
이 책은 많은 독자가 있을 필요는 없는 책이다.
오직 내가 사랑하는 두 사람을 위해 쓴 책이다.
스스로를 사랑하겠노라고 다짐한 내 자신과 이 책을 받아보게 될 당신.
당신이 이 책을 받게 된다면 꾸밈없는 내 자신을 고스란히 주었노라고 생각해도 좋다.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다른 사람들은 어떤 제목들을 지었을까? 누구의 하루, 누구의 오늘, 2022년의 누구 같은 제목을 짓지 않았을까.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추억이되어 책꽂이에 꽂아 놓은채, 먼지가 쌓일 때쯤 꺼내어 보는 졸업앨범 같은 책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이 그렇게 소중하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어느 특별한 날에 꺼내어 어떤 때를 회상하는 책으로만 소비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떤 고민들로 생각이 깊어질 때, 술에 취해 휘청일 때, 그냥 심심할 때 가까이 두고 언제든 꺼내어 보여질 수 있는 그런 책이 되어 너덜너덜해졌으면 좋겠다.
언제든 나를 만날 수 있게.
그래서 나는 제목을 이렇게 짓기로 했다.
애석하게도 아직 <10만원 짜리 라면받침> 은 아무에게도 전달이 되지 못했습니다.
주변에 괜찮은 사람이 있다면 제 프로필을 널리 홍보해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