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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휘 May 12. 2022

비포 벚꽃엔딩(봄날의 소개팅 후기)

비포 벚꽃엔딩(Before Cherry Blossom Ending, 2022) 1080p.BluRay.소개팅후기

- 글자수 제한으로 차마 담지 못한 원제는 이렇습니다







1. B


세상을 살다 보면 내가 열심히 하지 않아도 기어코 이루어지고 마는 것들이 있다. 계절의 변화가 그러하다.

계절은 대개 뭔가를 이루어야겠다는 어떤 생각들과 함께 찾아오곤 한다. 이번 봄 이야말로 뭔가를 이루어야 할 때였다. 유난히 길었던 겨울을 보내고 늘 그러하듯 찾아오게 될 새로운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매년 새로운 도전을 하나씩 하는 내가 지난해에 새로이 시작한 도전이 있다면, 그것은 소개팅이 될 것이다. 자만추파이자 장기연애파인 나에게 소개팅이란 일종의 플랜 B였다. 가만히 자만추의 순간을 기다리는 것으로는 뭔가 이루어질리 만무했고 어떤 변화가 필요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소개팅이 너무 재미있어져 버렸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사람들을 알게 된다는 그 자체와 더불어, 자기소개를 하며 새롭게 정의되는 나 자신을 발견해 나가는 것, 대화하다가 떠올려지는 잊혀진 에피소드들, 혼자라면 가지 않았을 맛집들을 발굴해 내는 것,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장소에서 하는 데이트들, 소개팅 주선자와 생기는 어떤 은밀하고도 끈끈한 의리 같은 것도 너무 좋았다. 연애와 사랑이라는 단계까지 넘어가지 못했는지, 아니면 안 했는지는 헷갈리지만 소개팅이 재미있어진다는 것은 목적 전치 현상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제 소개팅은 더 이상 특별한 이벤트가 되지 못했다. 이따금씩 찾아오는 허탈함과 반복된 새로움들이 이제는 제법 지겨워져 그만하고 싶어 지던 찰나였다. 그렇지만 지난 주말에 했던 소개팅은 제법 특별했다. 단톡방에서 소개받을 사람 손! 해서 얻어낸 소개팅이나 주변에 괜찮은 친구 좀 없니? 라며 삥 뜯어낸 소개팅과는 조금 달랐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소개팅이라는 것을 해보고 느꼈던 고찰을 담아 작성한 에세이*(지난 에세이 <제목을 입력해주세요> 참고)를 보고, 그리고 지난 몇 차례 나를 만나보시고 좋은 청년의 이미지를 느끼신 어느 의인께서 <10만원짜리 라면받침>을 줄 만한 사람이 있다며 소개팅을 주선해주셨다. 글을 보고 매칭 된 인연이라니, 이건 뭐랄까 그냥 소개팅보다 좋은 명분이 있는 것 같았고, 더 낭만이 있는 만남이 될 것이 분명했다.



[카톡]

경희님 안녕하세요!

소영님 통해 연락처 전달받게 되었습니다

좋은 분이라고 소개해주시더라구요

정민휘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하지만 그날 저녁에도, 밤에도, 새벽에도, 다음날 아침에도 확인해봤지만 답장은 없었다. 하지만 괜찮다. 어차피 나는 이모티콘도 안 보냈고, 그렇게 반가워하지도 않았으며(아씨 느낌표 하나 썼네), 카톡도 데이터 차감 안 되게 와이파이를 사용했으며, 어차피 회사일도 바쁘기도 했었으니까. 소개팅한다고 동네방네 소문나 있는 거야 악성루머라고 무마하면 되고, 에세이 소재야 다른 걸 찾으면 되니까.


보통 소개팅 첫 카톡에 이 정도로 답장이 없는 경우는 세 가지 정도가 되는데

첫째는 카톡 프로필 사진을 보고 커트당하는 경우

둘째는 업무가 너무 바빠 밤샘 야근을 하다 아침에 집에 들어가 잠드는 경우

셋째는 답장을 하려던 찰나에 괴한에게 납치를 당하는 경우


이미 사전에 무려 4장의 사진을 보여주고 패스를 받았기 때문에 커트를 당했을 리는 없고, 회사를 다니지 않는다고 하셨으니 야근을 하지도 않으셨을 텐데....
그렇다면.....

걱정에 지새우며 뜬눈으로 밤을 보내고, 다음날 저녁때쯤이었다 '핸드폰을 수리 맡기는 바람에 오늘에서야 찾아와 뒤늦게 확인했다'라는 97년도 어느 영화 소재로 쓰기 좋을 듯한 제법 클래식한 사유로 그녀는 무사하다는 안부를 전해왔다.  












2. Before


그녀를 만나기 전 젊은이들이 다니는 요즘 미용실로 가 머리를 자르고 , 그녀가 살고 있다던 공덕으로 향했다. 공덕이라 하면 예전에 오래 만나던 여자 친구가 살았던 곳이었으므로, 사실상 나도 반 공덕인으로서 홈 어드벤테이지가 있었다. 이를 테면 쉽게 괜찮은 소개팅 장소를 찾아낸다거나, 갑자기 생길지도 모를 2차 하기 좋은 술집이라던가, 길을 걸어가다가도 다양한 에피소드들(도화나 애오개 지명의 유래 같은...)을 꺼낼 준비가 되어있다는 뜻이었다.


토요일은 약속이 있었으므로, 일요일 오후 5시에 만나기로 했다. 코로나로 오래 시간을 보내기가 어렵기도 했고, 다음날 출근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다. 젠틀맨인 나는 사전답사 겸 좋은 자리 사수를 위해 오후 4시가 조금 지났을 무렵 이자카야로 들어갔고, 사장님은 ‘이라샤이마센’같은 일본어 대신 대걸레질을 하다 ‘엇?!’ 이라는 정겨운 우리말로 나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때는 4월 첫째 주 주말이었고, 이는 곧 3일 후에는 에세이를 마감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아마 소재가 없어 초조해하고 있던 찰나였는데, 노을 진 바오밥나무 앞에서 V를 하고 있는 프사의 누군가로부터 ‘슬슬 에세이 쓰셔야죠?’ 라는 어떤 압박의 아니 응원의 메시지를 받은 상황이었으므로 에이시안 헤밍웨이가 되어 이자카야에서 글을 쓰며 그녀를 기다리고 있기로 했다.


약속시간이 되어 그녀가 나타났다. 사진보다 실물이 더 예뻤던 그녀는 다섯 시에 이자카야에 오는 건 처음이라고 했다. 나도 그렇다고 했다. 우리는 뭐랄까...같은 처음을 맞이한 것이였다...★ 그녀는 나와 같은 나이였다. 그러니까 우린 백말띠로 태어나 IMF 때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6학년 때 월드컵을 봤으며, 09학번으로 대학생활을 시작했다는 공통점을 가진 사이였던 것이였다...★ 그녀는 인터넷에서 보던 ‘코끼리를 접어 냉장고에 넣는 일’을 한다는 ‘대학원생’이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녀는 아동심리 박사과정을 다니는 중이라고 했는데, 나의 어떤 심리가 간파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는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고 있는 각자의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라던가, 취미라던가 이상형이라던가를 이야기하며 제법 오랜 시간을 보냈다. 자리에서 나와 공덕역까지 함께 걷기로 했다. 어색하게 나란히 서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다 무심코 올려다본 곳에 아직 틔우지 못한 벚꽃나무가 있었다. 어떤 용기가 생겨 다음 주 주말쯤이면 한창 예쁘게 차오를 것 같다고,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되거든 벚꽃을 보러 가자고 말해버리고 말았다.


“좋아요”


그녀가 분명 좋다고 말했다.

벚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잠시 봄을 잠시 스치우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벚꽃을 보러 가기로 했으므로, 바로 다음 주 주말에 다시 만나게 될 것이었다.

하마터면 봄이 온 줄 모른 채 지나가버릴 뻔했다










3. Before 벚꽃엔딩




분리수거를 핑계로 오늘의 날씨를 정찰하러 밖으로 나갔다.

좋아. 마음이 살랑거리기 좋은 볕의 봄날이다.


♪ ♫♪♫ 모닝콜 없이도 눈이 번쩍, 라랄라라- 너와의 첫 데이트
이불을 박차고 널 만나러 간다 Hello, Hello- ♪ ♫♪♫


스윗소로우 메들리를 크게 틀어놓은 채 몇 차례 옷을 입었다 벗었다를 반복하며 꽃단장을 한다. 겨우내 입었던 니트들을 모조리 정리했지만, 우연히 아직 핑크색 니트가 남아있던 이유는 틀림없이 오늘을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각자 점심을 먹고 오후 두시쯤, 벚꽃 핫플레이스가 있다고 하여 이번에도 그녀가 살고 있는 공덕역으로 왔다. 그날의 공덕역 1번 출구는 매우 많은 사람들로 왔다 갔다 했었고. 나처럼 누군가를 기다리는 한껏 꽃단장을 하고 온 남자들 역시 많았다.

이 중에서 그래도 내가 제일 괜찮지 않나 라는 생각을 했다.
아마 그들도 그러했겠지만...


그녀는 오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경희 씨를 만난 지도 1주일이나 지나 얼굴도 가물가물하고, 마스크를 쓰고 다니기에, 그녀를 바로 알아봐야 한다는 걱정이 있었지만 , 예쁜 눈을 가지고 있는 그녀를 찾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았다.




경희 : 안녕하세요~ 오래기다리셨죠 ~ 일이 좀 늦어져서 ㅠ_ㅠ


민휘 : 오! 안녕하세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얼마 안 됐어요


경희 : 오랜만에 보니까 또 어색하네요 ㅎㅎ


민휘 : 하하 그런가요? ㅎㅎ



이자카야에서 제법 친해졌던 우리는 다시 새롭게 만나는 것 같은 기분으로 잠시 동안의 침묵을 보냈다.



민휘 : 그... 가실까요? 어디로 가면 되죠?


경희 : 아..! 네 이쪽으로...




회색빛 빌딩 숲 사이에 놓인 녹색의 푸르른 잔디와 그 위를 채우고 있는 새하얀 벚꽃, 푸른 하늘이 만나고 있던 그 공간은 제법 아름다웠다.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사람들과 흐드러지게 펼쳐진 벚꽃 아래를 걷고 있었고, 나도 그들처럼 그렇게 섞이게 될 것이었다.




민휘 : 와 이런 곳이 또 있네요


경희 : 네 여기서부터 가좌까지 철로를 따라 벚꽃길이 쭈욱 나있어요



날씨가 좋다는 얘기, 사람들이 정말 많다는 얘기들을 하며 길을 따라 걸었다. 가끔씩 살랑거리는 바람에 꽃잎들이 떨어져 내려 아주 낭만적이었다.

할 말이 떨어질 때쯤이면 귀여운 강아지들에게 말을 붙이기도 했다.




민휘 : 어머나~ 너무 귀여워라 안뇽~ , 경희씨는 강아지 키워보신 적 있으세요?


경희 : 저희 아빠가 수의사 셔서 어렸을 때부터 강아지랑 가깝게 지냈었고 많이 키우기도 했었어요

         민휘씨도 강아지 좋아하시나봐요 강아지 키우신 적 있으신가요?


민휘 : 아 강아지를 제가 키운 적은 없는데요, 예전에 재택근무하던 시절에 강아지를 맡아서 1주일 정도 봐줬던 때가 있었어요.

경희 : 아 정말요? 어떤 아이였어요?


민휘 : 그 뭐더라 장모치와와였는데요, 흰색에 살구색 얼룩이 있어서 이름이 살구였는데요,
         성격이 정말 개 같았죠. 유난히 저에게만 쌀쌀맞게 굴어 저는 쌀구라고 불렀어요.

         집에서 작업하다가 인형 던져주고, 밥 먹고 산책도 한 번씩 시켜주고 그랬어요


경희 : ㅋㅋㅋ일주일간 기르셨으면 정도 많이 드셨겠다


민휘 : 네 맞아요, 밤에 한강 산책을 한 번씩 하곤 하는데 몰래 강아지들 훔쳐보고 그래요. 저번에는 쌀구와 비슷한 개를 보고 와서 영감을 받고 집에 돌아와 5분 만에 작곡을 한적도 있어요


경희 : 와 진짜요? 작곡도 하세요? 대단하시다


민휘 : 아 저도 처음에 5분 만에 작곡하고 천재인 줄 알았는데요, 그 이후로는 뭐가 더 안 나오더라고요.
        제가 원래 영감을 받고 뭔가를 만드는 거를 좋아해서 ㅎㅎ


경희 : 와 어떤 곡이에요?


민휘 : 그냥 짧은 동요예요 ㅎㅎ 우리 커피 한잔 마시고 갈까요?




제목이 <전 여친네 강아지> 라는 사실을 얘기하는 것은 TMI 인 것 같아 주제를 황급히 넘겼다.


벚꽃이 가득 차오른 그날의 경의선 숲길에는 서울시 사람들을 몽땅 때려 박아 놓은 것 같았다. 몇 차례 자리가 가득 찬 카페들을 서성이다 겨우 한자리를 발견하고 카페에 들어갔다. 벚꽃길과 카페의 경계쯤이 되었을 테라스석에 앉아 우리는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고, 얼음을 아사삭 씹어먹고 있을 무렵 카페 바로 앞 가까운 곳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벚꽃이 휘날리는 그 아래 중고등학생쯤 돼 보이는 15명의 소년소녀들이 합창을 하고 있었다.




민휘 : 벚꽃이 휘날리는 아래서 커피 한잔에 BGM으로 합창까지.. 아주 낭만적이군요


경희 : 그러게요 민휘씨는 노래 잘 하세요?


민휘 : 예전에 수원시에서 했던 K-POP경진대회 출신이에요


경희 : 와 그럼 노래 진짜 잘하시나보다


민휘 : 아니요 뭐 노래를 잘하는건 아니고요 제 장기 중 하나가 GD모창이거든요ㅎㅎ. 노래를 좋아하는 건 아닌것 같고 그냥 새로운 경험하는 걸 좋아해요. 그래서 노래자랑도 나간거구요 노래자랑 출신이다~ 까지만 말하고 이제 입싹 닫고있으면 다들 노래 고수인줄 알더라구요 ㅎㅎ


경희 : ㅋㅋㅋ오~ 결과는 어떻게 되었어요?


민휘 : 뭐 회식가서나 잘 하시라는 평가와 함께 광탈했죠 뭐 ㅎㅎ 덕분에 '회식GD'라는 별명을 얻었답니다 ^_^


경희 : ㅋㅋㅋ 민휘씨랑 얘기하면 항상 새로운 사실들이 계속 나오네요. 일도 바쁘시고, 취미생활도 축구에 필라테스에 피아노레슨에 작곡도 하시고 글쓰기도하시고, 회사 동아리 모임에, 독서모임도 하시잖아요


민휘 : 연애를 안하니까 할게 없어서 할거리들을 찾은거죠. 요즘은 독서모임만 나가는 것 같아요 저 막 그렇게 바쁘게 사는 사람은 아니랍니다 ㅎㅎ


경희 : 그렇군요.. 저는 대학원 일정도 그렇고 학회일이랑 논문 쓰는 것들때문에 평소에 좀 바쁜편이라...


민휘 : 아하!;; 사실 저도 코로나때문에 못했었지 축구도하고 헬스도 다시 시작해야죠 일도 바쁘기도 하고요



제법 오랜 시간 동안의 합창단 공연이 끝나고, 얼음을 몽땅 씹어먹고 나서 자리를 나왔다. 자리에서 일어날 때 바깥의 사람들을 보니 이 자리 역시 금방 다시 채워질 기새였다. 우리는 다시 길의 한 복판에 합류해 계속 걸었다. 걷고 또 얘기하다 보니 어느덧 저녁식사를 할 때쯤이 되어 서로 알고 있는 몇 가지 가게들을 이야기하다 둘 다 처음 가보는 미슐랭 빕 구르망에 선정되었다던 어느 태국 음식점에 가기로 했다.



태국 음식점은 정말 태국 현지의 가게를 삽으로 떠 서울에 그대로 가져다 놓은 듯했다. 태국에 가본 적은 없었으나 라오스에서 이런 분위기를 느꼈으므로 그러할 것 같았다. 맥아리 없는 스댕 숟가락과 꽃무늬가 그려진 원색의 식기들, 쩍 달라붙는 장판 같은 테이블보 까지.. 굳이 다른 것이 있다면 가격이 10배 정도 된다 라는 것 (라오스에서는 1,200원에 쌀국수를 먹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었다. 낭만과 갬성이 없는 아마도 멜론 탑 100을 그대로 틀어놓은 듯한 아이돌 노래들이 나오는 것.



민휘 : 와 여기 진짜배기 태국 스타일이네요 노래만 빼면 말이에요


경희 : 그러게요ㅋㅋ 민휘씨는 어떤 가수 좋아하세요?


민휘 : 저는 서태지요. 예전에 우리 고등학교때는 PMP에 영상 누가 받아오면 옮겨가지구 다같이 보곤했잖아요 <서태지 심포니>라고 .. MBC에서 오케스트라랑 같이 편곡한 곡들로 공연을 했었거든요 그 공연보고 서태지 좋아하게 되었어요. 제가 처음 썼던 핸드폰도 서태지 폰이였답니다 ㅎㅎ


경희 : 오 서태지요? 서태지 좋아하는 사람 첨 봤네요 또요?


민휘 : 이승환이요. 이승환 이야말로 장르의 경계가 없는 가수죠. 그동안 작업해온 노래가 워낙 많아서 새로운 발견을 하는 재미도 있구요, 서태지에 비하면 음반도 자주 내는 편이고, 만든 곡들을 보면 깊이가 있어서 요즘 가수들보다 더 세련되었어요. 아니면 김동률도 좋죠. '진짜 가수'는 자기가 하고싶은 말을, 자기가 지은 음악으로 만들어서, 자기입으로 불러야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그런 '진짜 가수'들을 좋아해요


경희 : 와 되게 옛날가수 좋아하시는 구나. 우리때는 god나 신화 이런 가수들 좋아했을 때인데 ㅎㅎ 뭐 요즘아이돌은 안좋아하세요?


민휘 : 아 저도 요즘 아이돌도 좋아하죠, 뭐 빅뱅이라던가, G드래곤이라던가, GD & TOP 이라던가...


경희 : ㅋㅋㅋ 얼마전에 노래 나왔던데?


민휘 : 맞아요, 그래서 요즘 아이돌이죠 ㅎㅎ, 경희씨는 어떤 가수들 좋아해요?


경희 : 저요~? 저는 그냥 평범한거? 발라드?


민휘 : 아 약간 유희열이나 이적 뭐 이런 라인이시구나


경희 : 아니요 뭐 혁오나 스탠딩에그 ~~ 등등 ㅎㅎ 어떤 느낌이신지 모르시죠?ㅋㅋ


민휘 : 그 뭐랄까, 약간 검정치마 뭐 이런느낌 아니에요?


경희 : ㅋㅋ 네 뭐 비슷해요 ㅋㅋ




태국 음식점에서 쌀국수에 볶음밥 깔라만시 맛이 나는 작은 맥주를 세병 까먹고 나와 또 한참을 걸었다. 그녀는 걷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가끔씩 몇 시간씩 혼자 걷고는 할 정도로. 나도 그랬다. 우리는 어딘가를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특별한 목적지는 없었고 그냥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목적에 이따금씩 배경만 바꾸어주곤 했다. 배도 부르고 술도 한잔 할 겸 칵테일 바에 들렀다. 옆으로 나란히 앉아 칵테일을 홀짝이며 계속 대화를 나누었다.




민휘 : 경희씨는 애교가 있는 편이신가요?


경희 : 저요~? 왜요?


민휘 : 그냥 뭐 물어볼때 마다 저요~? 저요~? 하시니까 ㅎㅎㅎ


경희 : 음~ 내가 애교가 있던가~? 제가애 교가 잘 없다고 생각했는데~ 대학원 언니들이나 교수님들이 자기한테 이러지말고 남자한테 가서나 해~ 이런거 보니까 있다는건가~? ㅎㅎ 애교있는 사람을 좋아하시나요?


민휘 : 그렇다기 보단 제가 애교가 있는 편이라서 ㅎㅎ 아 그렇다고 여자들한테 막 흘리고 다니는건 아니고요.. 애인말고는 개싸가지죠 ㅎ


경희 : ㅋㅋㅋ아 맞다 소영쌤한테 딸노릇하는 아들이라고 들었어요 ㅎㅎ

민휘 : 아 그런 이야기를 또 하셨군요 ㅋㅋ 또 어떤 얘기들으셨어요?


경희 : 음 유교보이라는거? ㅎㅎ




우리는 요즘 사회에 화두가 된 주제들로 토론을 통해 서로 가치관을 확인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깻잎은 잡아줘도 되지만, 새우는 가운데에 같이 까주는 것으로 의견을 맞추었고, 남사친 여사친 어디까지 가능한가? 에 대한 주제로 토론을 이어갔다.



경희 : 저는 여중, 여고, 여대, 대학원이어서 남사친 자체가 없어요. 어렸을 때야 친구의 남자친구들 정도가 남사친이였는데 요즘에는 뭐 그런게 없죠. 민휘씨는 여사친들 많으실거 같은데?


민휘 : 아 저는 뭐 예전엔 많았었나? 그런 것 같기도 하긴 한데 뭐 지금은 다 시집갔으니까. 근데 뭐 간혹 있긴 하죠 ㅎㅎ 사실 저는 여사친을 떠나서 원래 1대 1로 술 먹는 걸 좋아하긴 하는데.. ㅎ


경희 : 그럼 유교보이가 아닌거 같은데?? ㅎㅎ


민휘 : 도대체 유교보이가 뭐죠..? ㅋㅋ 그래도 저는 유교보이라 술마시더라도 친구사이에 불미스러운일이 안일어나게 하죠 ㅎㅎ 아 물론 애인이 싫다고 하면 안만나야 되구요


경희 : ㅎㅎ 서로 소개시켜주고 괜찮은 사람이다 싶으면 만나도 되고 그렇죠 뭐 ㅎㅎ


민휘 : 원래 질투가 좀 있는 편이신가요?


경희 : 저요? 아니요 저는 질투 잘 없는 편인거 같아요ㅎㅎ

혹시 서로에게 예전 여자친구 남자친구 얘기하는 것들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민휘 : 글쎄요 저는 괜찮을 것 같은데요? 연애를 한다는 건 그 사람의 세계를 받아들인다는 거니까


경희 : 저도 그래요 그 사람의 전 애인과 에피소드를 통해서 어떤 걸 더 조심해야겠다라던가, 더 신경 쓸 부분들을 알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민휘 : 그러게요 좋네요 ㅎㅎ




대화를 하다 보면 이 사람은 지금까지 만났던 사람들과는 달리 뭔가 어른 같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녀와 함께라면 나도 어른의 연애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경희 : 그때 우리 이자카야 갔을 때 이상형 얘기해주셨었잖아요, 근데 그런 거 말고 외모에 대한 이상형 같은 건 없어요?


민휘 : 어 저 그때 얘기했는데? 웃을 때 예쁜 여자


경희 : 에이~ 그런 거 말구요


민휘 : : 왜요? 진짠데, 웃을 때 예쁜 여자는 울 때도 예쁘고 가만히 있어도 예쁘죠


경희 : ㅋㅋㅋ 뭐야 그럼 그냥 예쁜 여자 만나야겠네요


민휘 : : 예 그쵸 뭐 그래서 여기 나와 있는거고 ㅎㅎ

근데 성격도 상냥하시고, 질투도 안하시고, 똑똑하시고, 예ㅃ .. 그 아름.. 그 미소가 좋다? 로 하겠습니다


경희 : 예? 뭐하시는거에요? ㅋㅋ


민휘 : 예ㅎㅎ 하여튼 외모도 '저기'하신데 왜 연애를 못하고 계신가요 인기 많으실거 같은데


경희 : 그러게요. 소개팅도 많이 들어오고 에프터도 항상 받는 걸 보면 인기가 없진 않은것 같네요 ㅎㅎ

아마 타이밍이 잘 안 맞았던 것 같아요. 전에 만났던 사람은 파일럿이었는데 시민권 때문에 미국 들어가는 바람에 애매해졌고, 어떤 사람은 소개팅 중에 그분이 화장실 가는 사이에 번호를 따이는 모습을 보이는 바람에 난처해지기도 했었죠. 뭐 다 좋은 사람이긴 했었는데 타이밍이 잘 맞지 않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민휘 : 그러게요 저도 전에 만나던 사람과 관계가 괜찮았었는데 서로 엇갈리게 코로나 한 번씩 걸려서 못 보게 되고, 그분이 몸 괜찮아지면 다시 연락 주신다고 했는데 아직도 안 주고 있는 거 보니 아직도 아프신 건가..? ㅋㅋ



그래. 타이밍. 벚꽃이 끝나기 전에, 우리 시작할 수 있을까? 예쁘다고 말하는 것은 무척 쑥스러운 일이기에 차마 하지 못했지만, 나는 용기를 내어 뭔가를 말해야 했다.




민휘 : 저번에 얘기해주신 이상형 있잖아요. 우리 지금 벌써 8시간째 얘기하고 있는 거 보니 제가 재미있고 말 잘 통하는 건 맞는 것 같고, 직원분들 대하는 거 보면 저 예의 바른 사람도 맞는 것 같죠? ㅎㅎ 근데 제가 똑똑한 사람이 맞나 라는 생각을 집에 가서 곰곰이 좀 해봤는데요.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나는 테이블에 손가락으로 원을 그리며 이야기했다


자 여기 세상의 모든 지식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똑똑한 사람들은 이 큰 원안에서 각자의 작은 원들을 그리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사실 진짜 똑똑한 사람은 이 큰 원의 범위를 넓히는 사람들이죠. 뭔가를 만들어내는 창의적인 사람들이요. 그래서 창의적인 사고를 가진 저는 똑똑한 사람이다 라는 결론을 내렸어요. 이제부터 누가 물어보면 저 똑똑한 사람이라고 하고 다니려고요


경희 : 아 안 그래도 저도 그날 집에 가서 좀 생각해봤는데 제가 말을 잘 못했던 것 같더라구요.

제 분야에서는 잘 알고 있으니까 제가 모르는 분야에 강점을 가진 사람이면서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을 말하고 싶었던 거였어요, 뭐 어디 학교 나오고 어디까지 배우고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닌데, 혹시 오해했을까 봐 걱정했어요.


민휘 : 네 어떤 말인지 알겠어요 ㅎㅎ 근데 어쩌죠? 저는 이미 스스로를 똑똑한 사람이라고 자기 최면을 걸어버렸는데..?


경희 : ㅋㅋㅋ 그래요 그럼 그냥 똑똑한 사람 하세요






칵테일 바에서 나와 우리가 처음 만났던 공덕역 쪽으로 되돌아가기로 했다. 이 말은 즉슨 헤어질 때가 다와 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우리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 늘 그래 왔던 현실의 월요일을 준비하게 될 것이다. 오후 두 시에 만나 12시가 다되어가니 우리는 근무시간보다 더한 시간을 서로의 이야기를 하고 들어주는데 썼다.

되돌아가는 길은 깜깜해져 우리가 낮시간에 왔던 길과는 조금씩 달라 보이기도 했다.

우리는 말없이 벚꽃이 흐트러진 아래의 그 거리를 걸었다.


뭐를 더 얘기해야 되나...



경희 : 어! 저기 아까 우리 갔던 카페다!


민휘 : 아 가게 이름이 ‘목수의 딸’이였구나 아까는 자리 잡는데 정신이 팔려서 못 봤네요 사장님네 아버님이 인테리어 짜주셨나 보다, 제가 원래 네이밍에 관심이 많아서 간판 보는 것들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우리는 말없이 그 거리를 걸었다.





뭔가를 더 이야기해야 했다






민휘 : 아 저.. 경희씨한테 하고 싶은 말 있는데..


경희 : 아...어떤거요?

민휘 : 아까 말했어야 했는데 타이밍을 놓쳤어서요...


경희 : ??


민휘 : 그... 혹시... 칵테일이라는 말의 유래를 알고 계신가요?


경희 : ㅋㅋ 뭔데요?


민휘 : 몇 가지 설이 있긴 한데요. 제가 생각했을 때 가장 유력한 설을 이야기해보자면, 요즘에야 기호에 맞추어 칵테일을 먹지만, 예전에는 외국 시골에서 땅도 넓고 술 사 오려면 멀리까지 나가고 해야 하니까, 술이 모자랄 때 섞어서 마셨다고 해요. 그때 수탉 꼬리 깃털로 저어서 섞었는데 그때부터 칵테일이 되었다 라는 이야기가 있어요


경희 : 아 진짜요?


민휘 : 진짜인지는 모르죠 뭐.. 그때 살았던 사람들 다 죽었을 테니까



그녀가 웃었다.


그리고 우리는 말없이 그 거리를 걸었다.










경희 : 민휘씨


민휘 : 예?


경희 : 제가 민휘씨가 많이 편해졌나 봐요. 아무 말을 하지 않고 걸어도 불편하지가 않네요


민휘 : 그러게요 저도 왠지 그게 느껴져서 말하지 않았어요








그래. 우리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말없이 그 거리를 걸었다.










바람이 살며시 다가와 나뭇가지를 머물렀다 가는 사이 벚꽃잎들이 사르르 떨어졌다.
그녀는 떨어지는 벚꽃잎을 잡으려는 듯 두 손을 펼친 채 뽀르르 달려갔다.


뒤돌아 본 그녀의 입이 샐쭉 나온 것을 보니 실패한 모양이었다. 남겨진 꽃잎 몇 장들만이 휘날리고 있을 때
나도 읏차 하고 뛰어올라 한 움큼 잡아내어, 다섯 장의 꽃잎을 펼쳐진 그녀의 손바닥에 한 장씩 놓아주었다



경희 : 우와 엄청 잘 잡으시네요 키가 크셔서 그러신가?


민휘 : 키 커서 그런 거 아닌데...


경희 : 그럼요?


민휘 : 제가 원래 기회를 잘 잡거든요





서로를 슬쩍 바라보다 멋쩍어하고 앞을 보고 걸었다

어떤 생각에 휩싸여 각자의 웃음을 짓고 있었다.


또 한 번 일렁이는 바람에 벚꽃이 휘날렸다.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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