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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영 Mar 21. 2025

백수단상 7

감사, 한계, 삼라만상 일기일회

2024년 12월 30일 - 2024년을 마무리하며


감사

 2024년은 참 감사로 가득한 해였습니다. 많은 분들에게 과분한 관심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아직 한참 부족한 저와 인연을 맺어주신 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한데, 저를 좋은 사람으로 봐주셔서 정말 부끄럽고 고마웠습니다.

 올해 1월 1일, 정말 거창하게 신년계획을 세웠었습니다. 실천도 하지 못할 계획을 20개 가까이 마구 늘어놨는데요, 다행히도 ‘가식적인 가면 덜 쓰기’는 실천에 옮기는 것은 성공한 거 같습니다.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더 솔직한 나 자신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완벽한’ 모습만 보여주기보단 좋든 나쁘든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나누다 보니 이전보다 사람들과 더 진솔하게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20대 중반, 문득, 스스로가 많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수많은 후회와 고민, 시행착오와 반성을 거쳐왔습니다. 많은 고뇌를 거쳐온 덕분에 조금이나마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게 될 수 있었던 듯합니다. 물론 아직도 많이 부족한 만큼 더욱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한계

 무언가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나, 의지를 다지거나, 한계가 보이거나 의욕이 없는 날이면 꼭 생각나는 군대 선임이 있습니다. 선임은 똑똑하고, 매사에 솔선수범하고 인성도, 능력도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모두가 그 선임을 좋아했고 저도 좋아했습니다. 본받고 싶은 멋진 사람의 표본이었어요. 하지만 동시에 저에게는 제일 무서운 선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사람에 대한 통찰력이 정말로 대단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꿰뚫어 보는 그 능력이 제가 만났던 사람 그 누구보다(심지어 아직까지도) 제일 강력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마음이 음흉하고 생각을 잘 안 드러내는 저는 그렇게 사람을 잘 간파하는 사람이 제일 무섭습니다. 왠지 뜨끔하달까요.

 그런데 그 선임이 언젠가 저에게 해주었던 조언이 있습니다. 정확한 워딩은 아니지만 복기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너는 너 자신의 한계를 너무 잘 알아. 그리고 그 한계를 넘으려고 하지 않아. 본인의 역량대로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서야 발전할 수 있는 거야.’


 너무나 맞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잘할 수 있는 것만 하려는 사람이었으니까요. 한계에 도전하거나 노력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등 그런 열정 넘치는 삶은 저와는 거리가 멀었으니까요. 그 당시에는 나 자신도 간과하던 나의 모습을 그렇게 잘 파악했다는 것 자체에 놀랐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저에게 너무나 소중하고 귀한 조언이 됐습니다.

 전역을 하고, 공부를, 취업을, 업무를, 무엇을 하든지 저는 한계가 보이면 부딪히기 전에 뒷걸음질을 쳤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선임이 제게 조언을 한 그날, 그 순간을 떠올렸습니다. 그 말을 처음 들은 순간의 충격을 되새깁니다. 그러고 나면 ‘나는 또 도망가려 했구나. 비록 내가 온 힘을 다해 들이받지는 못하지만 내빼기보다는 한 발자국만이라도 앞으로 내딛어야겠다’ 하고 마음을 고쳐먹게 됩니다.

 그 말을 들은 22살은 10년이 지나 32살이 됐습니다. 25년에는 33살이 되고요(만 나이로 하면 31살이라고 박박 우깁니다). 그분은 그 말을 했다는 것을 기억조차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저 또한 아직도 한계를 과감히 깨부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그 조언 덕분에 물러서지 않고 아주 조금이나마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나이가 먹어서인지, 풍파에 내성이 생겨서인지, 조금 더 과감히 앞으로 나아갈 용기도 생겼습니다.


삼라만상 일기일회

 저는 인티제(INTJ)입니다. MBTI로 성격을 칼로 자르듯이 재단할 수는 없지만, 인티제라는 분류는 저를 꽤 잘 대변해 줍니다. 인티제에게는 지식, 인과관계, 진리 같은 이성적인 것을 추구한다는 대표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이런 특성이 강하게 발현되면 책을 무자비하게 많이 읽는다든가 공부를 좋아한다든가... 같은 취미가 생기기도 합니다.

 저는 그런 특성이 특이하게 발현돼 잡다한 정보를 최대한 많이 머리에 수집하고 싶어 하는 성향이 생겼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일이나, 친구들에 대한 정보 등 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모두 알고 싶고 기억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영역이 넓어지면 언젠가는 삼라만상을 제 머릿속에 담을 수 있을지도 모르죠. 만약 정보 과다로 머리 용량이 부족해지면 뇌에 칩을 심을지도 모릅니다. 정보 수집의 편리함을 위해 머리에 인터넷을 연결할 수도 있겠죠. 그렇게 최대한 많은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여러 가지 변화를 거치면 미래에 저는 인터넷에 제 자아와 의식을 업로드한 ‘전뇌인간’이 될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최대한 오래 살아 정보를 모으기 위해 뇌를 로봇에 이식한 불사의 존재가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본질을 잃는다면 삼라만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사람이 ‘사람’이 아닌 존재가 된다면 인간관계는 ‘인간’ 관계가 아니게 돼버립니다.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존재가 돼 버리면 인간관계에서 발생한 정보들은 그저 의미 없는 데이터에 불과할 것입니다.

 제가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하는 진짜 이유는 사람에 대한 애정과 관심 때문입니다. 저는 따뜻한 위로나 진심 어린 공감 같은 것은 잘 못합니다. 그래서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내가 인간관계에서 감정적인 교류가 부족하다면 난 뭘 해야 할까?’


 오랜 고민 끝에 나온 결론이 바로 최대한 많은 정보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내가 아끼고 소중하는 사람들에게 조금 더 관심을 기울이고 시시콜콜한 것들까지 기억하고 그러다 보면 더 잘 챙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전 주변 사람들의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 기억하려고 애쓰는 사람이 됐습니다.

 일기일회라는 일본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은 생애 단 한 번의 시간이며, 지금 이 만남은 생애 단 한 번의 인연’이라는 뜻입니다. 인연을 소중히 해야 한다는 의미지요. 저에게 영원과 영겁이 주어진 들 인간성과 인연이 없다면 저는 삼라만상에 도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일기일회는 언제나 존재합니다.


 올해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감사할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내년에는 일기일회에 조금이라도 더 보답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소중한 사람들의 최대한 많은 것을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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