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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외계인총각 Dec 15. 2022

가을_3. 결혼 10년을 생각하다

"결혼 10주년이 되면 꼭 다시 오자."

하와이 마우이섬, 태평양과 맞닿아 있는 포시즌스 호텔(Four Seasons Hotel) 수영장에서 아내와 약속했다. 10년 후에 아이를 데리고 여기에 다시 오자고. 인생에서 돈을 물 쓰듯 펑펑 쓸 수 있는 날이 몇 안되는데 신혼여행이 그중 하나다. 아내와 나는 '할레아칼라 산'이 있는 마우이섬과 하와이 '와이키키 해변'이 있는 오하우로 신혼여행을 갔다. 이날을 위해 몇 년간 모아놓은 돈을 썼는데 아깝지 않았던 여행이었다.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2012년 10월 신혼여행을 하와이로 갔다. 마우이섬 포시즌스호텔에서 10년 후에 꼭 다시 오자고 약속했다.

아이가 생겼고 자가를 얻었고 빚은 없었다. 회사 일은 힘들지만 가정은 평안했다. KBS 클래식FM의 애청자가 됐고 인문학 도서를 읽으면서 마음이 차분해졌다. 큰 슬픔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잘 견뎌내고 있다. 아내와 나 사이는 예전 같진 않지만 '그래도 잘 살고 있다'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는다. 뒤늦게 '아이가 1명 더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만약 그랬다면 '아빠 육아휴직'은 꿈도 못 꿨을 것이다.


아들은 내년(2023년)에 초등학교 3학년이 된다. 인생에서 아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육아휴직을 신청했다. 아들과 아빠가 함께 하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맞벌이하는 아내에게 손을 벌리지 않으려고 틈틈이 돈을 모았다. 결혼 10주년에 육아휴직을 하려고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돌이켜보면 인생의 톱니바퀴가 저절로 맞춰진 느낌이다.

하와이 마우이섬 할레아칼라 산 정상 캠프에서 본 전경. 마우이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이다. 2012년 10월.

보수적인 아내는 '아빠 육아휴직'을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아내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나름 애를 쓰지만 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자주 충돌한다. 아내는 회사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 스타일이다. 굳거나 화난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온다. TV가 없는 집에서 아내는 많은 시간을 스마트폰으로 보낸다.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다. 나는 전적으로 아들을 돌보면서도 아내가 퇴근 후 집안일을 하지 않도록 가사를 전담하고 있다. 생활비를 보태주진 못하지만 아내에게 돈 달라고 한 적도 없다. 아내는 여전히 나의 육아휴직을 못 마땅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몇 차례 대화했지만 똑 부러지는 이유를 듣지 못했다.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다.)

사회 초년생 시절 큰 마음을 먹고 장만한 결혼 반지.

결혼 10주년을 맞아 여행을 계획했다. 기획과 준비, 실행은 항상 내 몫이다. 아내보다 지리에 밝고 꼼꼼하기 때문이다. 아내는 본인의 요구사항만 반영하면 특별히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우리 가족이 여행을 가는 가장 편한 방법이다. 10년 전 약속했던 하와이는 포기했다. 원달러 환율이 크게 오른 데다 미국 내 인플레이션이 심했다. 다행히 아내와 아들은 하와이보다 유럽을 선호했다. 아들은 한동안 그리스 로마 신화에 빠져 있었고, 어디서 알았는지 프랑스 파리 '에펠탑'을 보고 싶어 했다. 아내는 몇 년 전부터 로마에 가고 싶어 했다. 그 전에는 파리를 동경했다. 최근에는 '전생에 피렌체 사람이었던 것 같다'라고 했다. 나는 어디든 상관없었다.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아들이 초등학교 1학년 때 오른 서울 아차산 정상.

2022년 11월 깊어진 가을. 아내와 아들, 그리고 나는 이탈리아 로마와 피렌체, 프랑스 파리를 여행했다. 길지 않은 일정에 세 도시를 돌아다녀야 했다. 하루하루 알차게 투어하면서도 지치지 않도록 여유로운 계획을 짜야했다. 로마와 파리의 소매치기, 사기꾼에 대한 후기들은 우리를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다.


"다음에 또 와야지."

'또 오겠다'는 마음으로 일정을 잡으면서 옥석 가리기가 쉬워졌다. 욕심도 버렸다. 마음 가짐이 중요하다. 로마와 피렌체, 파리는 역사지구가 많아 가이드투어가 필수적이다. 우리는 '1일 반나절(3~4시간) 투어'를 하고 투어가 없을 때는 먹고 마시고 쉬었다. 오전 투어-오후 휴식, 오전 휴식-오후 투어 이런 식이다. 이번에 못 했던 투어는 다음에 하면 된다. 우려했던 소매치기나 사기꾼은 그림자도 보지 못했고, 코로나19 이후 심해졌다던 '동양인 차별'도 느낄 수 없었다. 아내와 아들 모두 만족한 여행이었다.

프랑스 파리 비르하켐 다리에서 본 에펠타워. 2022년 11월.

"현지에 사는 사람처럼 옷을 입자."

물론 누가 봐도 '동양인'이고 '관광객'이지만, 결과적으로 이 전략이 효과를 거뒀다고 생각한다. 아내와 나는 현지에서 번듯한 직장에 다니는 사람처럼 옷을 입기로 했다. 정장까진 아니지만 평소 출근할 때 입는 옷과 신발을 입었다. 저녁을 먹으러 갈 때는 살짝 튀는 복장도 서슴치 않았다. 청바지나 조거팬츠, 맨투맨, 후드티 같은 캐주얼은 아예 가져가지 않았다. 여행을 이끌어야 하는 나는 셔츠에 코트를 입고 구두처럼 보이는 검은색 스니커즈를 신었다. 공항에서든, 거리에서든, 식당에서든, 매장에서든 그들은 우리를 존중했다. 좀 보수적으로 표현하자면 불친절을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어떤 식당들은 매니저가 직접 우리 테이블에 와서 메뉴 선정을 도와줬다. 우리 또한 그들을 존중했고 감사했다.

이탈리아 로마 트레비분수 2022년 11월.

"왜 유럽에 여행 오는지 알겠다."

"유럽에 또 오자."

"다음에는 (유럽)어디로 갈까?"

여행 내내 아내는 말했다. 이전까지 아내는 유럽에서 영국 런던만 가봤다. 나는 스페인 바르셀로나, 스위스 베른, 프랑스 파리를 출장으로 다녀왔다.


로마 도착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트레비분수'로 달려가다시피 했다. 오전 8시 이전에 가면 관광객이 없어 여유롭게 사진을 찍으며 감상할 수 있다고 했다. 오전 7시 40분에 트레비분수에 도착했다. 우리 가족 외에 4~5팀 정도 있었다. 우리는 찍고 싶은 대로 사진을 찍고 마음껏 둘러봤다.


그리고 각자 트레비분수를 등지고 앉아 동전을 2번 던졌다. 1번 던지면 로마에 다시 돌아오고, 2번 던지면 사랑이 이뤄진다고 한다. 동전 3개를 던지면 지금 사랑이 깨지고 4개를 던지면 새로운 사랑을 만나다고.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다. 우리는 오른손에 동전을 쥐고 왼쪽 어깨 너머로 동전을 던졌다. 로마에 다시 오고 사랑도 이뤄지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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