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만에 크리스마스 시즌을 해외에서 맞이했다. 우리 가족은 코로나19 이전까지 크리스마스에 맞춰 연말 여행을 다녔다. 1년을 무사히 살아낸 모두를 위한 포상 휴가였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물론 아내 회사도 연차 소진을 위해 연말 휴가를 독려했다. 우리는 큰 부담 없이 크리스마스 여행을 계획할 수 있었다. 정해진 예산에 맞춰 갈 수 있는 동남아시아 휴양지를 찾아다녔고, 열심히 손품을 판 덕에 따뜻한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었다. 저렴하면서 좋은 시설과 서비스가 갖춰진 호텔에서 수영장 선배드에 누워 감자튀김을 먹을 수 있는, 특히 추운 날씨를 피해온 겨울의 동남아는 여름휴가보다 더 휴가다운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우리가 여행한 12월의 유럽은 우리나라처럼 완연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뽐냈다. 로마나 피렌체의 아기자기한 장식보다 '빛의 도시' 파리의 크리스마스가 한국인의 감성과 잘 맞았다. 파리 시내 번화가인 오페라 지역에 있는 쁘렝땅(Printemps)백화점과 갤러리 라파예트(Gallery Lafayette)의 절제된, 그러나 화려한 장식들. 물론 우리나라 백화점의 작정한 듯한 휘황찬란함과 비교할 순 없지만, 그들의 빛들은 19세기 건축물과 잘 어우러지면서 전형적인 '서양의 크리스마스'를 떠오르게 한다. "'역사 공간'과 시민의 '생활공간'이 분명하게 나뉘어 있지 않고 오래된 건축물도 모두 살아 숨을 쉰다"고 유시민 작가는 '유럽 도시 기행'<생각의길>에서 말했다.
짧게 머물다가는 관광객 입장에서 파리의 크리스마스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은 샹젤리제 거리와 앞서 언급한 오페라가 아닐까. 7년 전 출장으로 12월에 파리를 찾았을 때는 샹젤리제의 크리스마스를 살짝 엿볼 수 있었다. 거리가 넓어 집중력이 떨어진 탓인지 개선문 인근을 제외하면 스잔한 분위기로 기억한다. 개선문에서 콩코드광장 방향으로 한참 내려오면 볼 수 있는 크리스마스 마켓은 추운 날씨로 사람들이 별로 없었고, 요란하게 거리를 내달리는 슈퍼카들만 바빴다. 나중에 물어보니 돌아다니던 슈퍼카는 돈을 내면 10여 분간 태워주는 놀이 기구처럼 운행했다.
'여유로운 유럽 여행'을 추구한 우리 가족은 아내의 쇼핑과 아이의 휴식을 위해 숙소에서 도보 거리인 오페라를 택했다. 쁘렝땅(Printemps)백화점과 갤러리 라파예트(Gallery Lafayette)는 신세계백화점과 롯데백화점처럼 서로 경쟁하듯 크리스마스 장식을 선보였다. 라파예트백화점은 메인 건물 내부 천장에서 떨어지는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했다. 특정 시간마다 음악과 함께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트리는 쇼핑객의 이목을 사로잡는다. 유리로 된 돔 천장을 그대로 살린 건축물이 현대적인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나면서 멋스러움이 배가 됐다. 한국에 돌아가서도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동영상으로 담았다.
쁘렝땅백화점은 1층 바깥 쇼윈도에 각 테마별로 움직이는 인형 장식으로 유명하다. 7년 전 출장 때 묵었던 호텔은 쁘렝땅백화점과 가까웠는데, 그때도 움직이는 인형을 보려는 인파로 북적였다. 1층 쇼윈도는 주로 명품 브랜드들이 대표 제품들을 전시해놓는 가장 비싼 공간인데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인형 장식으로 대신한다. 물론 브랜드도 살짝 노출시킨다. 두 백화점만 돌아다녀도 한나절은 보낼 수 있다. 아내는 백화점 개점시간에 맞춰 쇼핑했고, 내가 '루브르박물관 어린이투어'를 하고 있는 아들을 데려오고 나서도 계속했다. 이날은 쇼핑하는 날이었다. 아들은 장난감을, 나는 여행용 보스턴백을 둘러봤다.
쁘렝땅백화점과 라파예트백화점은 주변 몇 개 건물로 나눠져 있어 수시로 바깥 공기를 맡을 수 있었다. 이날은 금요일이었는데, 백화점 안보다 밖이 더 붐볐고 그야말로 크리스마스가 다가왔음을 물씬 느낄 수 있었다. 아들은 백화점 옆 건물로 이동하다 산타 복장을 한 두 강아지를 안고, 구걸하는 중년의 노숙자를 만났다.
"아빠, 저 아저씨한테 동전 좀 주면 안 돼?"
"응, 되지. 근데 왜 저 분을 도와주고 싶니?"(주변에는 다른 노숙자도 있었다.)
"강아지들이 있잖아. 강아지들이 배고프면 어떻게."
아들은 강아지를 좋아하지만 기르지는 않는다. 내가 강아지 털 알레르기가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기르다가 헤어졌을 때 그 감정을 우리 가족 누구도 감당하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다. 대신 아들이 1살 때부터 함께 한 강아지 배게 인형이 있다. 아들은 어딜 가더라도 이 강아지 인형을 데리고 다닌다. 이번 유럽 여행에도 짐을 줄이고 줄였지만 강아지 인형은 꼭 챙겼다. 강아지 인형이 여권이 있었다면 사증에 도장이 다 찍혀 갱신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들이 원했던 '호두까기 인형' 장난감이 없었다. 아내와 나는 아들이 몇 번의 힘든 가이드투어를 잘 따라준 데 대한 상으로 장난감을 사주기로 했고, 아들은 이탈리아 리나센트백화점에서 본 '호두까기 인형'을 갖고 싶다고 했다. 우리가 봐도 유럽 냄새가 풀풀 났다. 가격도 괜찮았다. 하지만 우리는 "비행기에서 부서질 수 있으니 파리에 가서 사주겠노라"고 설득했다. 당연히 '현존하는 지구촌 최고의 문화도시'(유시민 작가의 말)인 파리에 그만한 호두까기 인형은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호두까기 인형이 너무 '고전'이었을까. 로마보다 세련된 쁘렝땅백화점에도, 라파예트백화점에도 팔지 않았다.
아들에게 '유럽 선물'을 사주지 못한 것이 아직까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포로 로마노'나 '샹젤리제 거리'에 못 간 것은 후회되지 않는데도 말이다. 가족과 함께 하는 여행이 앞으로 알마나 될까. 귀한 이 시간을 생각하면 아들에게 더욱 미안하다. 용서를 비는 마음으로 올해 크리스마스 때는 '선물 2개'를 약속했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가정에는 평안이 임하는 크리스마스가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