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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농암 Apr 08. 2023

제15차 단체교섭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계절이 지나고 해가 바뀌는 동안 노사 간의 교섭은 진척이 없었다. 일찍 꽃을 피워낸 나무들은 어느새 열매를 익히고 있었고, 한여름 뙤약볕에 첫 꽃을 피우는 풀들도 있었다. 폭염과 열대야에 지친 조합원들의 마음은 이미 콩밭에 있었다. 곧 있을 여름휴가를 앞두고서 어디서 무엇을 하며 피서를 할 것인지가 대화의 주된 주제였다. 장기간의 파업에도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한 노조 집행부의 마음은 급했고, 교착 상태에 빠진 교섭의 출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여름휴가가 시작되기 전에, 추석 연휴가 오기 전에, 크리스마스 연말이 가기 전에 교섭을 마무리 짓지 못하면 집행부의 존립이 위태로워진다는 것이 정설에 가까웠다. 회사의 입장은 사뭇 달랐다. 생산해야 할 물량이 적으니 잔업과 특근이 필요 없었다. 노조의 잔업 거부는 생산에 지장을 주지 않았다. 두 공장의 통합으로 유휴인력이 있으니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히 줄어들면 좋은 일이었다. 거래선의 축소나 시장에서의 신뢰 회복은 그다지 문제 되지 않았다. 시장에서는 이미 과점적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었고, 초기 설비투자 비용의 문제로 신규 진입이 어려운 탓이었다. 이제 경영권을 물려받은 최기철 사장은 민주노총을 정상적인 노동단체로 생각하지 않았고, 와해시켜야만 하는 악의 축으로까지 몰아세우는 처지였다.



 인사, 노무 업무를 담당하는 관리팀장과 노조의 대표자인 지회장은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관계에 있다. 소속 근로자들의 문제는 곧 회사의 문제인 동시에 노조의 문제이기도 하다. 때로는 경쟁 관계에 있다가 또 때로는 협조적으로 우호적으로 서로를 인정할 수밖에 없기도 하다. 역학관계의 문제인지 체면과 위신의 문제인지 알 수 없으나, 우경은 관리팀장으로 복귀한 날 제일 먼저 이규태 지회장을 찾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덕담을 주고받았고, 하루속히 이 지루한 싸움을 좋게 끝내자는 동상이몽의 환담도 오고 갔다. 공식적인 자리인 만큼 형식적인 호형호제는 없었고, 우경도 더는 이규태 지회장을 형님으로 부르고 싶지 않은 듯 보였다. 평탄한 관계유지와 원만한 협상 타결을 위해 응원차 내뱉은 말은, 노조에서 회사로, 회사에서 다시 우경에게 독침으로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 뭉게뭉게 퍼진 풍문이었다.



 우경이 관리팀장으로 복귀한 후 7월 15일 제15차 본교섭이 열렸다. 노조에서 금속노조 부양(부산양산) 지부의 간부 2명과 이규태 지회장, 박동규 부지회장, 사무장 등 5명이 참석했다. 회사에서는 최기철 사장과 이우경 관리팀장 등 5명이 교섭위원으로 참석했다. 최 상무가 사장으로 승진하기 전에도 사측의 대표교섭위원으로 참여했으나, 명실상부한 권한과 권위를 갖춘 지금의 본교섭은 분위기가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횟수로만 치면 그보다 더 자주 만났던 것이 사실이나, 노사 간 교섭에서 차수가 중요한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 창원공장 폐쇄와 구조조정은 기정사실로 마무리 단계였고, 노조도 이에 대해서는 체념한 듯 보였다. 이제 노조 집행부는 조합원 수 기준에 따른 근로시간면제(time-off)의 최대한도인 6,000시간 확보, 풀타임면제자에 대해 고정연장근로수당 30시간분 지급, 기본급 8% 인상, 창원공장 폐업 위로금 조합원 1인당 300만 원 지급, 창원공장 출퇴근 인력을 위한 기숙사 확보 및 조합사무실 확보를 최대의 과제로 삼았다. 평조합원 들은 임금인상과 여름휴가 전에 교섭이 타결되면 지급될 위로금의 규모에 더 큰 관심을 두었다.



 노조 측의 대표교섭위원인 금속노조 부양지부의 조직부장이 발언했다. 


 “창원공장을 폐쇄한 것과 코로나19의 경영위기에 공감하고 일정 인원을 조정한 것에 노조도 더 이상 왈가왈부 하지 않겠습니다. 즉 이 문제는 사측의 진행대로 동의한다는 우리 측의 대폭적인 양보 안을 제시합니다. 이제 사측의 전향적인 태도 변화가 없다면 우리 조합은 특단의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회사가 우리의 요구를 수용한다면 사장님의 새로운 출발에 힘을 보탤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끝까지 대결 구도로 가겠다는 뜻으로 알고 투쟁할 것이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이어 이규태 지회장은 집행부의 요구사항을 그대로 읽어 내려갔다. 



 최기철 사장은 이에 답변했다.

 “제가 굳이 말씀드리지 않더라도 현재의 회사 사정에 대해서는 더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코로나 19라는 전대미문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창원공장을 폐쇄하고 매각하는 일은 쉽지 않은 결단이었습니다. 정든 직원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일도 가슴 아프고 뼈를 깎는 아픔이었습니다. 다소 부족하고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겠습니다만, 노와 사는 한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건어야 하는 운명공동체라 생각합니다. 기본급은 호봉승급분을 포함하여 6% 인상, 협상 타결 일시금 전 직원 100만 원, 조합사무실은 식당 휴게실로 대체, 타임오프는 3,000 시간에 풀타임 면제자 1명만 인정, 기숙사 문제는 추후 노사협의로 다른 절충안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사측의 최종안입니까?” 노측 대표교섭위원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최기철 사장이 답했다.

 “사장님! 저희를 물로 보지 마십시오. 오늘 이 시간부로 더 이상의 추가 협상은 없습니다.” 노측 교섭위원들은 각자의 수첩을 일부러 소리 내어 접고 의자를 아무렇게나 밀쳐 넣으며 회의실을 박차고 나갔다.

 본관 3층 소회의실 천장의 시스템 에어컨은 한기를 내뿜었고, 사측 위원들의 침묵만 남은 자리는 여름인지 겨울인지 모를 냉기만 가득했다. 최기철 사장도 회사 업무수첩을 탁 접었다. 



 “다들 노조가 양보할 수 없는 핵심 요구사항이 무엇인지, 타결 가능한 지점은 어디인지, 특단의 결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등 우리 회사의 노사관계 정상화 방안에 대해 고민해 보고, 오늘 퇴근 전까지 요약 보고서를 제출하세요!” 이는 다분히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 가서 눈 흘기는 식의 화풀이였다.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으나 최기철은 문을 나섰다. 우경은 평소 생각해 둔 바대로 정리해 둔 보고서를 곧장 제출했다. 조합원의 투쟁 동력이 떨어져 있다는 사정, 타임오프나 조합사무실보다는 여름휴가 전 타결 일시금으로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자 하는 욕구, 강경파와 온건파의 노선 대립, 다수의 무관심 등 판단의 근거를 내세웠다. 퇴근을 앞둔 무렵 지회장으로부터 카톡이 왔다. ‘퇴근하고 내원사 계곡 옆 오리불고기집 고궁에서 좀 봅시다.’ 우경은 이유도 묻지 않고 그렇게 하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장마가 그치고 칠월도 절반을 넘어 서산의 해거름은 노을만 붉게 태우고 있었다. 저녁 여섯 시를 조금 넘긴 시각. 이규태 지회장은 내원사 계곡물이 흘러넘치지 못하도록 인공으로 만든 둔치를 따라 설치된 방갈로에 박동규 부지회장과 단둘이 앉아 있었다. 다섯 시에 퇴근하고 곧바로 온 모양인지 불판에는 고기가 타고 있었고 탁자 위에는 소주 두 병이 텅 빈 채로 세워져 있다. 


 “어서 온나. 이팀장. 어... 어... 이제 부장 되었으니 반말하면 안 되는 거 아인가? 어서 오십시오. 우리 하나뿐인 관리팀장님.” 지회장은 우경에게 소주잔을 건네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꺼. 우리 사이가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이고, 또 찬물에도 아래위가 다 있는 법인데,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우경도 아무렇지 않은 듯 건들건들 소주잔을 단숨에 비우고, 그 잔을 지회장에게 되돌려 준다. 박동규 부지회장은 일언반구도 없이 자작으로 술잔만 비우다가 우경을 보고 웃기만 했다. 마치 우경의 속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미소만 지었다. 


 “그저 술 한잔하자고 부르지는 않았지예?” 우경이 지회장의 눈치를 슬쩍 보며 묻는다.

 “뭐 그리 성질이 급하노. 그냥 술만 한잔해도 좋고, 안 그래도 좋고. 요새 노조 일 해묵기가 힘들어서 신세 한탄도 좀 하고 싶고. 그라고 교섭도 마무리 지어야 하는데 영 돌파구가 없어서...” 지회장은 요점 없는 말을 주저리주저리 내뱉다가 주문벨을 눌러 해물파전과 막걸리를 시킨다. 우경도 좋아하는 안주와 술이었다. 우경은 굳이 콕 찍어 천성산 막걸리를 시켜달라고 부탁했다. 붉은 노을은 다 타고 회색빛 재만 남았고 동쪽 하늘에는 푸르스름한 여름 별이 밤을 재촉했다. 천성산에서 내원사 계곡을 따라 불어오는 산풍은 술맛과 풍미를 더했고,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방갈로 천장의 백열등은 세 사람의 춤추는 그림자를 그렸다가 지웠다가를 반복했다. 세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침묵했고 소쩍새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그들은 벌써 막걸리 다섯 통을 비우고 있는 중이다.

 “규태 형님... 아니... 지회장님, 올해는 그만 하시지예.” 우경은 그들만 이해할법한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우경이 니, 그 말 잘했다. 나도 마 휴가 전에 대충 마무리 지었으면 좋겠다. 규태만 저래 안 하면 우리 벌써 양보 안 냈을끼다.” 그간의 침묵을 깨고 박동규 부지회장이 불쑥 내뱉은 말이었다.

 “우경아... 아... 아... 동규야... 아... 이게 지금 나 혼자만 좋자고 하는 일이가. 느거도 알겠지만 다 같이 인간답게 살아보자고, 안전하고 편하게 일하고 일한 만큼 충분한 대가를 받자고, 그라고 상급단체도 보고 있고...” 이규태 지회장은 상급단체인 민주노총과 금속노조를 말하는 지점에서 말꼬리를 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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