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 시간 전 회사 정문 앞 선전전 당번이 보이질 않는다. 피켓을 든 서너 명의 조합원이 지키고 섰어야 할 출입문 통로 주변도 텅 비어 있다. 전면 파업에 돌입하자는 지회장의 파업 지침에 집행 간부와 대의원들이 반기를 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회사는 칠월 마지막 주와 팔월 첫째 주에 여름휴가를 주겠다고 선언했고, 이 기간 공장 가동을 전면 중단하여 전기세 등의 고정 비용이라도 줄이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파업이 성공하려면 회사의 생산에 지장을 주어야 한다. 무엇보다 전면 파업은 회사의 정상적인 업무에 심각한 타격을 주어야 하는데, 여름휴가를 일주일 앞두고서 조합원들의 결속력도 낮았고 투쟁으로 쟁취해 보자는 사기도 바닥이었다. 하물며 다음 주부터 회사는 자체 생산계획에 따라 2주를 쉬겠다는데, 월요일 전면 파업을 시작해 본들 5일 동안 얼마만큼의 피해를 줄 수 있겠는가. 이규태 지회장의 마음은 조급해 보였다. 회사가 우리를 정상적인 노동조합으로 인정해주지 않으려고 하는데 다른 무슨 방법이 있을 수 없다고, 최기철이 대표이사로 승진하고 처음 하는 단체교섭인데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고, 양산공장 사람들이 이렇게 물렀으니 회사가 우리를 우습게 보는 것이라고, 지금 콘크리트처럼 서로를 보듬고 뭉치지 않으면 우리는 금방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등.
집행 간부와 운영위원, 대의원까지 모인 확대운영위원회에는 15명의 사람이 모여 있었으나 지회장을 제외한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지난 연말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던 사람들이 맞나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만장일치에 가까운 득표로 지회장에 당선된 사람의 지도력은 땅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확대운영위원회는 30분 만에 종료되었고, 여름휴가 복귀 후 임시총회를 통해 전체 조합원들의 의견을 다시 묻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날 잠시 쉬고 오겠다던 이규태 지회장은 정문 옆 주차장 승용차 안에서 쓰러진 채 있었고, 점심시간 회사를 순찰하던 경비원에 의해 발견되어 양산부산대학교병원 응급실로 후송되었다.
빈손으로 휴가를 떠나게 된 조합원들은 수군거렸다. 민주노총과 금속노조를 등에 업고 벌이는 첫 교섭이라 기대가 적지 않았다. 양산공장에 노조가 없던 시절에도 해마다 여름 휴가비로 얼마간의 금전이 지급되었다. 이제 조합원들은 노조가 없는 것보다 못하다는 푸념까지 늘어놓았다. 그런데 알고 보면 양산공장에 휴가비를 지급했던 것은 최 회장이 대표이사로 있던 시절 노무관리 전략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창원공장과 사업장이 떨어져 있고 독립적으로 운영되긴 했으나 실상은 하나의 사업이었고, 금속노조가 있는 창원공장 소속 직원들에게만 지급하게 되면 양산공장에도 노조가 설립될 것이 뻔해 보였기 때문이다. 최기철 사장은 비조합원에게만 일정 금액을 지급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만, 조합원에 대한 불이익 취급 또는 노조의 단결력을 약하게 만들고자 하는 지배나 개입의 부당노동행위에 해당할 수 있다는 참모들의 의견을 존중하여 없던 일로 한 참이었다. 주머니 사정이야 어떻든 쉬어도 월급이 깎이지 않는 2주간의 유급휴가는 적지 않은 복지였다. 인근의 다른 중소 회사들은 길어도 3일이나 4일이 고작이었고, 그것조차도 개인의 연차휴가로 대체하는 회사가 대부분이었다. 칠월의 무더위와 짜증스러움도 달콤한 휴가를 상상하는 달뜬 마음들을 어쩌지는 못했고, 휴가 내내 내원사 계곡의 명당자리에서 야영을 계획하고 있던 어떤 직원은 퇴근하자마자 냇가 버드나무 아래 평평한 곳에 텐트를 치기 바빴다.
금요일은 오전 근무만 했으므로, 사실상 금요일 오후부터 여름휴가는 시작되었다. 우경은 언제부턴가 혼자 침잠해 있는데 익숙해져 있었고,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은 일부러 피하게 되면서 시기가 집중되는 휴가철에 반감이 컸다. 사람들은 무엇하러 명절을 지내고 기념일을 만들고, 여름에는 휴가철이다, 연말에는 또 연말 분위기를 억지로 만들어 내려고 하고, 어디 갈 곳도 마땅치 않고, 꼭 가봐야 할 곳도 없었고, 누가 반기며 오라는 곳도 없는 지금이 꼭 돌아갈 데 없는 철새처럼 처량했다. 혼자 사무실에 앉아 멍하니 바라본 곳에는 하얀 솜사탕 같은 소나기구름만 가득했다. 그러나 비가 올 모양새는 아닌 것이 구름보다는 맑은 하늘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잡념과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스스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종잡을 수 없어 막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그때 부지회장이 들어왔다.
“이 팀장, 지회장 병문안은 가봤더나?”
“아, 네에, 아직 응급실에 있어서 형수님 얼굴만 보고 왔습니더. 그래 지금 퇴근하시는 길입니꺼?”
“응, 그래 니도 퇴근할 모양인가 본데 같이 나가자. 그때 못한 말도 있고 해서. 저 밑에 메기 매운탕 잘하는 집 있다. 송림가든인가 솔마루든가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내랑 같이 가보자.”
두 사람은 회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송림가든이라는 식당에 마주 앉았다.
“아직은 좀 이른 시간인데. 무슨 급하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습니꺼?” 우경은 짐짓 불안한 기색을 감추기 위해 큰소리로 먼저 말문을 열었다.
“일단 안주하고 술부터 시키고 보자. 이 집에 메기 매운탕이 그래 맛있다고 회사 내 소문이 자자하다. 오늘 내가 한턱 낼끼니까 관리팀장이 노조 간부 마크맨(감시와 선전) 활동한답시고 지갑 먼저 열지 말그래이.”
“아, 참, 형님도. 웬만한 일 아니면 법인카드 쓰기 어렵습니더. 사전 승인이 원칙인데. 요새는 누구를 만나 무얼 하는지, 뭘 먹는지, 뭣 때문에 만나는지, 얼마까지 쓸 계획인지 등 서면 보고서 제출해야 하니까. 우리 간부급 관리직들도 그냥 자기 돈 쓰고 말지 그런 사람이 더 많습니더. 참 씁쓸하지예.” 우경은 진짜 씁쓸한 입맛을 다시듯 막걸리 한 사발을 그대로 다 비웠다.
부지회장은 그 후로도 여러 번 뜸을 들이다가 결심한 듯 내뱉었다. “우경아, 이규태 지회장 하고는 같이 못 가겠다. 집행 간부들 대부분 그리 생각하고 있고, 내하고 오랜 세월 한솥밥 묵고 있는 동생들도 비슷한 생각이다. 아무래도 복수노조를 만들어야 할 성싶다. 니가 좀 도와주면 좋겠다.” 부지회장도 말을 마치자마자 막걸리 한 사발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이고 형님도 참, 제가 그거를 한다면 불법인 거 잘 아시면서 말씀을 너무 쉽게 하시는 거 아닙니꺼. 제가 뭐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관리팀장이 제2 노조 설립에 관여했다는 것이 소문이라도 나는 날에는 또 어떡하실라고 그랍니꺼. 형님 답답한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마는 그렇다고 복수노조 만드는 거는 다시 생각해 보시는 편이 어떨까 싶습니더.” 우경은 누가 엿듣기라도 하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헛기침을 했다. 그러면서도 갑자기 생각이 바뀌기라도 한 듯 들릴 듯 말 듯한 음성으로 부지회장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제가 뭘 도와드릴까예?”
부지회장은 다시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의자를 앞으로 당겨 앉으면서 말했다.
“나도 불법이라는 거 정도는 알지. 그래 니가 뭐 나서서 어떻게 하라는 건 아니고. 내하고 몇 명이서 여름휴가 기간을 이용해 돌아다니면서 조합 탈퇴서를 받을낀데, 혹시 누가 니한테 전화할 수도 있을끼고, 또 니가 이 지회장 하고 평소 친분이 두터웠으니 미리 말해놓는기 좋을 거 같아서. 그러니까 뭐 나도 어디서 주워들은 말이기는 한데, 그 뭐라카더노, 부작위에 의한 작위라고 할 수도 있겠고...” 부지회장은 더 할 말이 있었으나 그즈음에서 말끝을 흐렸다.
“행하지 않음으로써 행한다.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음으로써 일을 성사되게 한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저보고 방해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달라는 그런 말씀이지예? 그런 일이라면 저한테 굳이 언질을 주거나 다짐을 받지 않아도 좋을 거 같습니더.” 우경은 취기가 오른 듯 노자의 도덕경에서나 나올법한 선문답으로 응수했으나 부지회장은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잔을 높이 들어 보였다.
“형님, 그나저나 자신 있습니꺼?”
“뭐 말이고? 과반 확보하는 거 말이가? 그거야 해봐야 알겠지만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충분하지 않겠나 싶다. 이 지회장이 마음에 걸려 그렇지만, 이거는 뭐 지회장을 몰아내려는 것도 아니고, 하필 지금 때가 이상하게 돼버렸지만 그렇다고 내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것도 아니고, 솔직히 힘들었거든. 일하는 재미가 하나도 없더라.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겠고, 무엇 때문에 노조 활동 하는지도 어디서 의미를 찾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는데, 어떻게 여기서 그대로 한 걸음 더 같이 가보자고 할 수가 있어야지. 나는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우리 직원들이 다 같이 원하는 거라 생각한다. 이왕이면 조금 더 편하게 일하고, 일터에서 다치는 일 없이, 쉬고 싶을 때에는 마음껏 쉴 수 있어야 하고, 퇴근하면 직장 선후배 동료들끼리 우애를 다지면서 서로 좋은 이야기 나누면서 술 한잔 기울일 수 있는 곳. 내가 여기서 일하는 이유는 그것뿐이다. 지금 상황에서 복수노조가 아니고서는 다른 길이 없어 보인다. 이 정도면 충분한 설명이 됐는지 모르겠다.” 부지회장은 숨도 쉬지 않고 속내 깊은 말들을 내뱉었다. 그러면서 이제야 숨이 차는지 자작으로 몇 술잔을 연거푸 들이켰다. 우경은 그런 부지회장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만 볼 뿐 술을 권하거나 빈 술잔에 술을 채우는 시늉조차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부지회장은 평소 말수가 적었고, 오늘처럼 심각하고 진지한 분위기를 만들며 많은 말을 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부지회장은 그만했으면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우경더러 먼저 나가보라고 일렀다. 같이 술 취한 모습으로 함께 가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 편이 좋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한여름의 저녁은 길었다. 해는 아직도 영축산 능선을 한참이나 내려다보고 있었고 알 수 없는 후회가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