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CI로 봤을 때 나는 충동성이 높다.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바로바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을 생각하면 정확한 결과이다.
해외살이와 영어에 오래전부터 미련이 있던 나는 몇 년 전 그래머인유즈로 영어 공부를 시작하여 미국 간호사 면허를 취득했다. 그 이후로도 시간이나 에너지가 남을 때 야금야금 조금씩 공부를 해왔다. 최근엔 말해보카를 한 달 해본 뒤 스픽으로 넘어와 공부 중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의욕만 있다면 유튜브와 블로그 등을 통해 충분히 질 높은 정보를 얻으며 얼마든지 무료 혹은 적은 비용으로도 공부할 수 있는 것 같다. 언어란 것은 단번에 성취가 보이는 분야는 아니라 내 성격상 영어 공부를 붙잡고 있는 것이 쉽지는 않다. 뭐든지 곧바로 결과를 보고 싶어 하고, 시험이라는 시스템에 최적화되어있는 나는 은은하고 꾸준한 형태의 공부를 어려워하기 때문이다.
교사가 된 후 약 3년간은 직업적 고민을 치열하게 했던 것 같다. 정말 여기서 만족하는 것이 맞나, 내가 이 일을 하며 행복한 것이 맞나. 그런데 5년 차가 된 현재는 고민을 하는 동안에도 이 직업에 서서히 스며들어 결국엔 사랑하게 되어버린 것 같다. 활기차고 순수한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건 그것 자체로 큰 행복이자 행운이다. 처음에 선생님이 될 땐 내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만 생각했는데, 막상 일을 해보니 내가 아이들에게 배우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많다. 아이들에게 미칠 영향력에 대해 생각하며 스스로를 돌아보고, 좋은 어른이자 모범이 되고 싶어 노력하는 삶은 내가 더욱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해준다.
또, 애인과 한국에서 자리 잡을 것을 생각하면 이 직업이 꽤나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간호사 시절과 비교해 보면 일단 스트레스가 덜하니 기민하고 통제적인 부분보다는 정 많고 유연한 면이 우세해졌고, 워라밸과 복지가 좋아 일하는 것에 비해 받는 돈도 적지 않다고 느낀다. 이른 퇴근 후 저녁 시간들과 두 번의 방학을 휴식 혹은 자기 계발로 여유롭고 알차게 보낼 수 있다는 것 역시 참 좋은 점이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대안들을 찾아본 끝에 이 직업을 유지하면서도 미련이 남아있는 부분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 해외 파견/초빙이나 유학 휴직의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해외 파견일 경우 보건교사의 경우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의 나라로 갈 수 있고 유학 휴직의 경우는 영어권 나라라면 어디든 갈 수 있다.
해외 파견은 한국에서와 동일하게 월급을 받고 한인 학교에서 일을 하는 것이라면, 유학 휴직은 본봉의 50%와 정근수당까지만 받을 수 있다. 내 마음은 둘 중에는 유학 휴직 쪽으로 기울어져 있기는 하다. 영어권 나라로 가고 싶기 때문이다.
유학 휴직은 학사학위를 취득 or 어학연수를 위한 휴직 두 가지로 다시 나눠진다. 학사학위 취득을 위해서는 대학이나 컬리지의 교육 관련 석사에 입학을 해야 하며 신청을 하기 위해 받아놔야 하는 영어 점수 또한 꽤 높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해외에서 3년까지 있을 수 있는데, 사정에 따라 3년까지 추가로 더 있을 수 있어 총 6년을 나가있을 수 있다.
물론 해외에서 학사학위 취득까지 하고 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렇게까지 영어를 만들어 가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고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학비 부담이다. 미국 대학원은 연 학비만 6~7천만 원이고 공립이어도 4~5천만 원 선이다. 본봉의 50% 나오는 돈으로 렌트비는 어떻게 해결한다고 해도, 생활비까지 생각하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수준의 거금이 든다.
분명 해외에 직접 가서 최소 1년 정도는 살아봐야 진짜로 나가야겠다는 확신이 들던, 반대로 로망이 완전히 깨지던 할 것 같은데. 가능한 대안 중 가장 현실적인 것은 돈을 조금 더 모아서 유학 휴직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오는 것이다. 하지만 유학 휴직을 가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보내주는 건 아니다. 나는 나라에 소속되어 일하고 있는 공무원이고, 휴직을 내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교육청의 마음에 달려있다. 따라서 유학 계획서에 그동안의 나의 실적 및 유학으로 얻고자 하는 것을 연계성 있게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한동안은 이게 내 길일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것에 별다른 의욕이 없었지만, 이제는 직업에 애정도 생겼고 이 안에서 나의 꿈도 어느 정도 실현할 수 있겠다는 데에 생각이 닿자 마음가짐부터가 달라진다.
교장선생님께서 올해 나에게 제안하신 건이 하나 있다. 나는 지금의 학교에 5년을 있었기에 내년 3월엔 다른 곳으로 전보하게 되는데, 1년 더 이 학교에 있을 수 있도록 유임을 해주시는 대신 작은 부장 자리를 하나 맡아보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처음에 듣고는 솔직히 조금 기분이 상했었다. 우리 학교의 경우, 작은 학교이기 때문에 교사의 수도 적어 상대적으로 부장을 맡아야 하는 교사 비율이 높다. 어떤 분들은 부장을 맡아야 하는 해에 맞춰 휴직을 할 정도로 기피하는데, 교과도 아닌 나에게 부장을 제안하시다니.. 나와 같이 교감으로 계시다가 승진하시며 다른 학교로 가신 교장선생님께서는 나를 초빙하고 싶어 개별적으로 전화까지 주셨었는데. 그렇다면 내가 제법 잘 하고 열심히 하는 보건이라는 말이 아닌가? 올해 유임시킬만한 사람이 따로 없어 나에게까지 그 가능성이 온 것이라면 그냥 좋은 마음으로 해주실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걸 명목으로 그저 일을 더 얹어주시려는 것만 같아 서운하고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까지 흘러오며 생각이 달라진 건 그것 또한 내게 주어진 하나의 기회 같다는 것이다. 교장님께서 내가 제안 주신 분야는 진로복지부의 일부 업무였다. 진로복지부에는 다문화 관련과 세계시민교육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내가 만일 추후에 해외 연수나 해외 파견 업무를 신청하게 된다면, 이 업무를 맡아했다는 것은 하나의 좋은 경력이 될 것이었다. 내가 얼마나 해외 문화와 다문화 학생들에게 관심이 많은지, 관련된 업무를 맡아하며 노력을 기울였는지의 방증이 될 테니까.
제안이 있을 적에 마음이 복잡하여 주변 선배님들께 조언을 구했더니 첫 학교에서 그것도 보건에게 부장을 맡으라는 건 일반적이지 않기는 하나, 그 자체가 나의 능력을 인정하고 계신 것이라는 좋은 말씀도 들었다. 어쩌면 지금과 같은 순간순간의 기회들을 단지 부담된다는 이유로 거절하는 것보다, 되는 데까지라도 최선을 다해 임하다 보면 그것이 connecting dots가 되어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 역량도 함께 성장할 것이었다.
정리해 보자면, 여름 방학 전에 교장선생님께 찾아가 제안 주신 부분을 긍정적으로 고려해 보겠다고 답변을 드릴 것이다. 교감, 교장, 장학사로서의 승진은 전혀 내 관심사가 아니지만, 미래의 내가 지금의 경력들을 살려 어떤 분야로 진출할 수 있을지는 모르는 것이니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