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순례자들은 생장에서부터 론세스바예스까지 24km를 하루 만에 걷는다. 순례길에서 하루 20키로대는 평균적으로 걷는 거리다.(사람마다 천차만별이긴 하지만) 단, 이 루트에서는 피레네산맥을 넘어야 한다는 게 문제다. 순례길은 대부분 평지와 얕은 오르막/내리막으로 이루어지는데, 첫날만큼은 적응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산맥을 넘어야 하는 것이다.
생장에 9시경 도착하는 일정이었으므로, 그때부터 걷기 시작해서 론세스바예스까지 가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다. 오후 4-5시까지 쭉 걸어야 할 텐데 한여름에 그렇게 걷는 것은 골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또 이쪽 지형 특성인지 뭔지 몰라도 산에 나무 그늘도 없어서 11시부터는 내리쬐는 땡볕을 온몸으로 견뎌야 한다.
피레네산맥 중간에는 두 개의 알베르게가 있다. 오리손과 보르다. 거기까지는 생장에서부터 7~8km(약 3시간)만 걸으면 됐다. 첫날이기 때문에 무리를 하지 않으면서 짐의 무게를 느껴보고 더위도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나는 둘 중 보르다 알베르게를 미리 예약해두었다. 커뮤니티 식사 등 평이 더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생장에 도착해서 출발하기 전 해야 했던 것은 1. 순례자 사무소에서 순례자여권(크레덴시알) 받기 2. 등산 스틱 사기 3. 약국 들러 콤피드,감기약 사기 4. 마켓 들러 생수 사기
순례자 사무소에 도착하자 한국인 봉사자분이 계셨다. 내가 도착한 날이 마지막 근무일이고 그 다음 날 귀국하신다고 했다. 운이 좋았다. 한국어로 자세히 설명도 듣고 편하게 질문도 할 수 있었다. 2유로를 내고 순례자의 상징인 조개껍데기를 받아서 가방에 걸었다.
마지막까지 나와 함께한 조개껍데기
사무소를 나서자 바로 앞에 등산용품을 파는 가게가 있어서 등산 스틱을 구매했다. 한국에서 쓰던 접이식 등산 스틱이 있었으나 기내 반입이 된다 안 된다 말이 많길래 그냥 가서 싸구려 스틱을 사서 쓰고 버리자 결심했었다. 하지만 사실 전혀 싸지는 않았다. 3만 원이었음.. 어쨌든 지나고 보니 접이식 스틱을 갖고 왔더라도 순례길에서는 접었다 폈다 할 일이 없어 유용하지 않았을 것 같고, 오래 걷다 보니 나중에는 스틱이 조금씩 망가져가는 것도 느꼈다. 새로 사서 막 쓰고 다니길 잘했던 것 같다.
(나중에 보니 다른 데보다 비싸게 파는 것 같았다. 이걸 보시는 분이 있다면 이동하는 길에 다른 가게도 있으니 가격을 비교해 보고 사시길..)
초록색을 골랐다
계획대로 약국에 들러 콤피드와 감기약을 샀고, 순례길 시작점으로 이동하던 중 구움과자 냄새에 홀린 듯 들어가 휘낭시에도 샀다.
플레인, 레몬, 아몬드였나? 기억이 잘..
드디어 순례길에 올랐다. 파리에서는 내내 비가 오더니 화창한 날씨가 나를 반겨주었다.
진짜 순례길 시작
한 시간 정도는 하나도 안 힘들었다. 덥기 전이라 걷기 수월했고 풍경도 색달라서 재미있었다. 유럽의 산들은 이렇게 생겼구나.
나는 해외에 가면 되도록 산을 가려고 한다. 도시와는 다른 느낌으로 이국적이기 때문.
중간중간 앉아서 발을 말려줘야 한다.(물집방지)
그러다 정오가 되어 해가 머리 위로 올라오고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되며 슬슬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더위에 취약한 나는 땀을 비 오듯이 흘렸다. 가져간 양우산을 쓰고 걸으니 조금 나아지는 듯했으나 큰 차이는 없었다. 너무 힘들어서 사진도 없음....
중간에 앉아서 쉬던 중 중국인 Tumaokai를 마주쳤다. (발음을 도저히 모르겠어서 이름을 영어로 적어달라 했다.) 사실 그는 별로 스몰톡을 하고 싶어 보이지 않았는데 ㅎ 아시안을 만난 게 반가워서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기차에서 서로 너를 봤다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직장을 다니는 스물여섯 살의 청년으로, 휴가를 이용해 이곳에 왔고 원래도 여행을 매우 좋아한다고 했다. 나도 영어를 잘 못하는데 걔는 더 못해서(;;) 서로 번역기를 열심히 이용해서 대화했다.
와 죽겠다싶었을 때 드디어 오리손이 보였다. 나는 오리손에서 묵을 것은 아니기에 점심만 먹으려고 앉았다. 메뉴를 보고 있는데 Tumaokai가 도착해서 앞에 앉아도 되냐고 물었다. 당연하지!라며 함께 먹자고 했다. 그는 콜라, 나는 오렌지주스에 각자 샌드위치를 하나씩 시켰다.
오리손이 보이던 순간
제법 많은 얘기를 나눴던 것 같다. 나는 1키로만 더 가서 보르다에서 묵는다고 했고, 그는 어디까지 갈지 모르겠다고 했다. 아무 계획 없이 왔고 그저 매일매일 힘이 닿는 데까지 걸을 것이라고 했다. 그의 가방은 엄청나게 무거웠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텐트까지 챙겨왔다.(;;) 걷다가 늦게 도착하면 숙소가 없으니 그럴 때는 노상(?)을 할 생각이라며...
순례길에서 외국인들과 어울리며 생각한 건데, 우리랑 비교했을 때 그들은 매사에 별로 계획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계획을 싫어하는 편에 가까워 보였다. 한국인들이 워낙 완벽주의에다가 뭐든지 기준이 엄격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 계획과 실행에 필요 이상으로 집착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더욱이 나는 심한 편이고 말이다.
우리는 식사를 마쳤다. 그는 내 숙소까지 함께 걸어가자고 했다. 그러고는 내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내 식사까지 계산을 했다. 스물 여섯살에게 밥을 얻어먹다니..(자존심 스크래치 나는 효과음) 내가 어쩔 줄 몰라 하자, 우리는 같은 아시안이잖아 아시안들끼리는 다 가족이야~ 너무 고마워하지마 라고 했다.
보르다까지는 20분만 가면 됐고, 함께 떠들며 걸으니 더위도 왠지 좀 참을만했다. 숙소 앞에서 헤어지기 전 왓츠앱을 교환했다. Tumaokai와는 순례길 내내, 그리고 오늘까지도 메세지를 주고받았다. 그는 산티아고 끝까지 완주한 후 포르투와 마드리드에서 며칠 관광을 했고 오늘에서야 중국행 비행기에 오른다고 했다. 중국에 도착하면 왓츠앱이 안되니 상해에 오면 연락 달라며 메일 주소를 알려주었다.
체크인 시간이 15분 정도 지나 있었으나 아무도 맞이해주지 않았다. 가방을 내려놓고 숙소 주변을 돌아다니며 호스트를 기다렸다.
잠시 후 호스트가 나와 웰컴 드링크를 한 잔 주며 설명을 시작했다. 설명을 듣고 짐을 풀고 샤워를 한 후 빨래를 하기 위해 내려갔다. 거기에서 이탈리아인 Laura를 처음으로 만났다. 순례길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한 친구인데, 첫 만남을 떠올리니 가슴이 뭉클해진다.
Laura의 순서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빨래를 했다. 첫 손빨래는 꽤나 힘들었다. 악력이 약한 나는 빨래 짜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 한국에서는 세탁기와 건조기가 있어도 귀찮아서 미룰 때가 많은데, 얼마나 게으르고 나태한 인간이었나.. 샤워를 하고 나온 것이 무색할 정도로 땀을 흘리며 빨래를 마친 후 2층 숙소 앞 건조대에 빨래를 널었다.
침대에 올라가 쉬고 있는데 밖에서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렸다. 창문으로 내다보니 어른과 아이들이 섞여있는 큰 무리가 도착한 듯 보였다. 사실 그땐 시끄러운 하루가 되겠다 싶어 그다지 반갑지는 않았다. 내 침대 옆으로 나와 같은 방을 쓰게 된 세 명이 다가왔다. 피터와 제리, 그리고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의 아들. 이렇게 세 명이었다. 피터 아저씨는 내게 악수를 건네며 한 명씩 소개를 해주고 잘 부탁한다고 했다. 참 매너 좋은 아저씨구나 생각하며 식사 시간까지 낮잠을 잤다.
저녁 7시에 커뮤니티 식사 시작이라 15분 전에 알람을 맞춰두고 일어났는데, 시차 적응도 되지 않았고 피곤했던 탓인지 잠이 잘 깨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려고 뺨을 치며 내려갔다. 그리고 테이블 가득 앉아있는 외국인들을 보고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지금 저 사이에 껴서 밥을 먹어야 한다고...?
토익 스피킹 실전 편
동양인은 나뿐이었고, 이탈리아인 한 명(Laura)과 나머지는 전부 영국 사람들이었다. 나는 피터 아저씨의 맞은편에 앉았다.
잠시 후 애피타이저가 나오며 자기소개 시간이 시작됐다. 호스트부터 자신을 소개했고, 피터 아저씨부터 시계 방향으로 한 명씩 소개를 했다. 이곳의 커뮤니티 식사가 이렇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미리 할 말을 어느 정도 정리해둔 터였다. (남들의 자기소개는 잘 들리지도 않았고 기억도 안 난다..^^ 긴장되어가,,)
나는 마지막 순서였고 대충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영어를 잘 못해서 좀 긴장돼. (이 말을 하자마자 다들 아니라고~아니라고~너 영어 아주 잘한다고~ 해줬다. 착한 외인들...) 나는 한국인이고 혼자 왔어. 나는 한국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을 신경 쓰는 경향이 있어. 가족, 친구, 애인과 같은. 그래서 나는 나를 더 잘 알고 싶어서 이곳에 혼자 왔어. 내가 언제 행복한지, 언제 힘든지, 언제 우는지 알고 싶어. 너희도 여기서 좋은 것들을 얻어 갔으면 좋겠다."
부엔까미노~하고 마무리하자 다들 웃으며 부엔까미노~ 답해주었고, 피터 아저씨는 나의 나이를 물어보고는 넌 아주 어린데 빨리 깨달은 거라며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스스로에 대해 잘 알고 행복한 것들을 하는 것이라며 좋은 말들을 해주었다.
인사를 마친 후 식사가 이어졌다. 피터 아저씨네는 고등학교 동창 네 명이 각자의 가족을 데리고 함께 여행을 온 거라고 했다. 정확한 나이는 듣지 못했지만 대략 50대 초반 정도 되어 보였는데, 긴 시간을 친한 친구로 지내고 가족까지 다 함께 여행을 온 모습이 무척 멋져 보였다.
다들 내 음식을 먼저 떠주며 따뜻하게 챙겨주었다. 그중에서도 피터 아저씨가 가장 많이 신경 써주었다. 그땐 잘 몰랐는데 떠올려보니 첫날이고 첫 커뮤니티 식사라 내가 좀 긴장하고 위축되어 있던 것 같다. 그게 아저씨 눈에도 보였을 것이다. 식사 시간 내내 내게 말을 걸어주고 챙겨준 아저씨가 너무 감사하다.
피터 아저씨는 참 좋은 어른이자 아빠 같았다. 아이들을 한 명 한 명의 인격체로 존중하는 마음이 느껴졌고 시종일관 굳 키드라며 칭찬을 했다. 또 긍정적이면서도 내면이 단단한 사람 같았다. 현명한 어른이 풍기는 깊이 있는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생각이 조금 죄스러웠지만.. 우리 부모님이 피터 아저씨 같았다면 내가 좀 더 스스로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 형태의 인정과 사랑을 받고 자라는 아이들이 얼마나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랄 수 있을지 눈에 선했다. 참 부러웠다.
식사가 무르익어가며 테이블끼리도 섞여 앉아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Laura가 우리 테이블로 왔다. 나는 내 이름을 발음하거나 기억하기 어려울 것 같아 그냥 Lee라고 부르라고 말해놓았었는데, Laura는 내게 다가와 너의 진짜 이름이 궁금하다고 했다. 내 이름을 천천히 알려주었고, Laura는 그때부터 우리가 헤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매 순간 정확한 발음으로 나를 불러주었다.
아이들과도 대화를 나눌 수 있었는데 피터 아저씨가 자랑했던 것처럼 하나같이 착하고 좋은 친구들이었다. 사춘기를 한창 지나는, 약간 삐딱하거나 무심한 태도를 보일만한 나이였는데도 전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나보다 봉준호, 박찬욱을 잘 알고 있어서 신나게 한국 영화 이야기를 했다. 오징어 게임도 재밌게 봤다고 했는데 그건 내가 보지를 않아서 맞장구쳐주지 못했다. 한국 문화가 외국의 어린 세대들에게는 제법 영향이 있다는 것을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길고 긴 저녁식사가 끝나고 각자 올라가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에 창문이 흔들리는 소리에 깨서 밖을 봤는데 엄청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널어놓은 빨래가 떠올랐다. 황급히 나가보니 열심히 빨아 널어놓은 옷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빨래들을 차곡차곡 개면서 새벽하늘을 봤다. 별이 꽤 많았는데 카메라로는 잘 보이지 않아 사진 찍기를 포기했다. 내가 스페인에 있는 산맥 중턱에 들어와 바람을 맞으며 별을 보고 있다니. 기분이 이상했다. 실감이 날 듯 말 듯 했다.
침대로 들어와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보르다에서 사진을 많이 못 찍었다. 풍경도 찍고 숙소 사진도 많이 남길걸.. 침대가 엄청 좋았는데 말이다.(그런 침대는 순례길에서 다신 만날 수 없었다.) 걷기 시작한 첫날인데다 외국인들과 처음으로 제대로 어울리며 안 쓰던 영어를 쥐어짜내려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일기를 쓰다 보니 첫날이 생생하다. 이 하루가 내게는 살면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종류의 것이라 너무나도 새롭고 흥미로웠다. 오늘 만난 사람들은 앞으로도 길 위에서 엎치락뒤치락 며칠을 함께한다. 피터 아저씨와 Laura는 내가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친절하고 다정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받은 호의와 배려는 그 당시에도 고마웠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몇 배로 더 감사하다.
내가 순례길 첫날을 떠올리며 정리한 것은 나는 어쩔 수 없이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과 함께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걷기 시작한 첫날인데 풍경이나 걷기에 대한 기억보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한 순간들이 이만큼이나 크게 기억에 남는 걸 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