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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랑크톤 Nov 06. 2024

홀로 떠나는 산티아고 순례길-6(푸엔테라레이나-에스떼야



푸엔테라레이나-에스떼야까지 22km(2024.8.2.)





 일어나서 준비하는 동안 어제의 일로 머리가 복잡했고, Immanuel을 만나면 할 얘기들을 머릿속으로 되뇌고 있었다.


 아침으로 요거트와 키위를 먹은 후 나가려던 직전 그가 1층으로 내려왔다. 나는 표정이 굳었다. 어젯밤 일이 얼마나 무례하고 불쾌했는지 말하고 싶었지만, 주변에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결국 단념한 채 길을 나섰다.

푸엔테라레이나는 크지 않은 마을이다.




 걸으면서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따로 불러내서라도 말을 했어야 했나 하는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한참을 생각에 몰두하다가 3m짜리 핸드폰 충전선을 숙소에 놓고 온 것이 기억났다.(콘센트가 침대에서 멀 수 있으니 긴 충전선 하나, 짧은 충전선 하나를 가져왔었다.) 나는 둘째 날인가? 딱 한 장 챙겨온 수건을 숙소에 놓고 나오는 바람에 수건 대신 잠옷 원피스로 몸을 닦고 말리며 기안84처럼 지내던 중이었는데. 이번엔 충전기 선까지 잃어버린 것이다. 이곳에 오니 꼼꼼하지 못한 성미가 더욱 드러났다.


 여하튼 내가 가장 먼저 숙소를 나왔기 때문에 Laura가 아직 숙소에 있을 수도 있었다. 왓츠앱으로 메세지를 보냈다. "혹시 너 출발했니? 만약 출발하지 않았다면 내 침대에 있는 충전선을 챙겨줄 수 있어? 그건 이 사진과 비슷하게 생겼어."


 그는 미안하지만 자신도 이미 출발했다고 했다. 어쩔 수 없지. 기부했다고 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홀로 남겨진 짧은 충전선.
붓기도 살도 쏘옥 빠졌다.
작은 마을을 지나,
길.
그리고 또 마을.
이 스페인 여성분과도 대화를 나눴다.(부르고스에 살고 있어서 거기까지만 걷는다고 했다.)
지대가 높은 마을에서는 뷰가 더 멋지다.
슬슬 더워지는구나.
엄청 무성했는데, 사진엔 잘 담기지 않는다.
알로에(?)
길 위의 나.




 점점 더워지던 중 순례자들을 위한 간식이 차려져 있는 곳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과일과 빵을 먹으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나도 한 개씩 집어먹었다.




 이날은 내내 혼자 걸었다. 숙소에서 첫 번째로 나오기도 했고 걸음에 속도가 붙어서 다른 사람들이 따라잡지 못했다. 종일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던 전일과 대조적인 고요함이 너무 좋았다.


  중간에 바에 들러 커피도 마셨다. 나는 카페콘레체 사랑단이지만 이날따라 아아메가 땡겼다. 여기서는 아이스 커피를 달라고 하면 뜨거운 커피에 얼음을 두세 개만 넣어준다고 해서, 카페솔로를 주문하며 얼음이 가득 담긴 잔을 함께 달라고 했다.

셀프 아아메 제조.

 



커피를 마시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포도밭.
하늘과 길이 참 예뻤다.




 목적지인 에스떼야에 한 시가 되기 전에 도착할 것 같았다. 그런데 아까 만났던 스페인 여자분이 오늘 에스떼야에 축제가 있어 시끄러울 것이라고 말해줬었다. 일단 가보고 조용히 쉬기 힘들 것 같으면 한 마을을 더 걸어가겠다고 생각했다.

에스떼야 직전의 마을에서.
공원 벤치에 앉아 하천에서 물놀이하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일찍 도착할 예정이라 여유를 부리고 있는데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먼 곳에서 천둥소리도 들렸다. 비를 맞지 않기 위해 속력을 내어 걸었다. 30분만 걸으면 도착이었다.

천둥소리를 찍으려 했는데, 영상에는 담기지 않았다.




 다행히 비가 오기 전 목적지에 도착했다. 하얗고 빨간 옷을 입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다니고 있었고, 가게마다 축제를 중계하는 방송이 틀어져 있었다.


 일본식 라멘을 파는 바가 있다고 해서 일부러 찾아갔으나 지금은 주문이 불가능하다고 했다.(ㅜㅜ) 스페인어만 할 줄 아는 바 사장과 메뉴 주문을 위한 씨름을 하고 있는데 한 여성분이 도움을 주셨다. 덕분에 무사히 점심 식사를 시킬 수 있었고 "깔라마리"가 오징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우리나라 오징어와 다르게 엄청 부드러웠고 갓 튀겨 뜨거운 채로 나왔다.
진짜 맛있었다. 또 먹고 싶다..



 주문을 마치고 앉자마자 비가 매섭게 쏟아졌다.(럭키!)




 비 내리는 밖을 감상하며 알딸딸해지고 있는데, 몇 번 뵈었던 한국인 부녀가 들어왔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깔라마리를 추천해 주었다.


 당근 케이크도 팔고 있길래 주문을 해봤다. 직접 만든 수제의 맛이 났다. 역시나 맛있었다.




 다 먹고 나니 비는 약간 소강상태였다. 다음 마을인 아예기까지 우산을 쓰고 가기로 했다. 한국인 부녀에게 작별 인사를 하며 더 걷을 거라고 하자 아버님께서 빗속을 어떻게 걸으려 하냐고 걱정을 해주셨다.

아예기로 가는 길.




 에스떼야로부터 아예기까지는 2km 거리였다. 알베르게 앞에 도착했을 때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굳게 닫힌 문이었다. 엔까미노 앱에는 영업 중으로 나와있었는데, 입구에 붙여진 안내문에는 한동안 운영하지 않는다고 되어있었다. 앞에 있는 벤치에 짐을 내려놓고 망연자실한 채 비를 맞고 있는데 멀리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Laura였다. 그 역시 어제의 디너파티가 정말 즐겁고 좋았지만 오늘만큼은 조용히 쉬고 싶었던 것이다. 똑같은 마음으로 이곳에서 마주친 게 웃기고 좋았다. 우리는 한참을 의논했다. 다시 에스떼야로 돌아갈 것이냐, 아니면 다음 마을까지 걸을 것이냐.. 나는 이곳에 와서 베드버그를 피하기 위해 항상 신경을 썼는데, 다음 마을의 숙소 컨디션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에스떼야로 돌아가는 대신 덜 시끄러운 외곽 쪽에서 묵으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Laura는 그러자고 했다. 찾아보니 깔끔해 보이는 사립 알베르게가 있었다.


 이때부터는 정신이 없어서 사진을 많이 찍지 못했다. 그렇게 Laura와 나는 비를 뚫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도 나도 발이 아팠고 지쳐있었다.










에스떼야 카푸치노 사립 알베르게


숙박(2인실) 18유로


https://maps.app.goo.gl/uBEEm4hGjbCxd7JK7




 체크인을 할 때 호스트가 2인실과 4인실에 대해 설명해 줬는데 생각보다 둘의 금액 차이가 크지 않았다. 우리는 2인실을 쓰기로 결정했다.


 숙소는 넓고 깔끔하고 쾌적했다. 힘들었던 우리는 오늘만큼은 기계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샤워 후 빨래를 함께 모아 세탁기를 돌렸다. 세탁기 사용 비용은 4유로였던 것 같다.


 뒷마당의 야외 식탁에 앉아 저녁 식사를 어떻게 할지 상의했다. Laura는 같이 마트에서 장을 봐오자고 했다. 메뉴는 직접 식재료를 보며 정하기로 했다.

뒷마당의 포도나무.                                




 우리는 이 길을 벌써 세 번째 걷는다고 툴툴거리며 마트로 갔다.(아예기로 가는 길에 마트가 있었음..) 어제도 함께 장을 봤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우리 둘만의 오붓한 장보기였다. 혼자 다닐 때 스페인의 마트는 모르는 재료투성이인, 필요한 것만 빨리 사고 나오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탈리아 현지인과 둘이 방문한 마트는 정말 재미있는 장소였다. Laura는 다양하고 새로운 식재료들을 내게 설명해 주었고 낯선 조합으로 저녁을 구상했다. 음식에 도전적인 나는 눈을 빛내며 신나게 따라다녔다.


 정육 코너에서 재료를 고르고 있는데 직원인 Lily가 말을 걸어왔다. Lily는 영어를 하지 못했지만 Laura의 이탈리아어 덕분에 대강의 소통이 가능했다. 그는 친절하게도 여러 종류의 하몽과 치즈, 푸아그라를 조금씩 잘라 맛 보여줬다. 이곳에서 맛본 첫 하몽의 맛은 정말 짜릿했다. 나는 이때 하몽에 빠져 스페인을 뜰 때까지 1일 1하몽을 하게 된다. 심지어 한국에 돌아와서도 몇 주간 주문해 먹었다.


 Laura는 오늘을 우리만의 별 다섯 개 날로 하자고 했다. 넓고 쾌적한 알베르게, 우리만 있는 2인실, 세탁기 사용에 이어 이제는 럭셔리한 저녁 식사의 차례라고 말이다.

하몽을 고르고 있는 Laura.




 우리는 식사빵, 치즈, 하몽, 살구잼, 푸아그라, 흑토마토, 견과류와 과일을 넣어 발효시킨 달달하고 풍미 있는 어떤 것(이름을 모른다..), 올리브오일과 아보카도를 포함해 과카몰리를 만들 재료들 그리고 맥주를 사서 돌아왔다.


 사 온 재료들을 냉장고에 넣어놓고 빨래를 기다리며 맥주를 먼저 마셨다. 아, 그리고 이때 주방에서 Andy를 처음 만났다. 그는 40대 초중반의 아일랜드 남자로 순례길에서 만난 중 제일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해야 상대방을 웃길 수 있는지 항상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이런 숙소를 "Three Showers Alberge"라고 부른다고 했다. 우리가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자 도착해서, 자기 전, 다음 날 아침 이렇게 세 번 샤워를 할 수 있는 숙소라고 해서 한바탕 웃었다.

Laura와 마신 산미구엘.




 Laura와 포도나무 그늘 아래 앉아 맥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다. 도착한 첫날부터 6일째 함께하고 있으니 그가 편안하고 가깝게 느껴졌다.


 이곳에 온 이유에 대해 대화하다 보니 자연스레 가족에 대한 주제가 나왔다. Laura는 엄마에 대해 이야기하며 눈물을 흘리는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러고는 깊은 상처는 회복하는 데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으니 천천히 너의 시간을 가지라고 조언해 주었다.


 애인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다. 그가 해주는 말들은 내게 많은 힘을 주었다. 자신 역시 부모이기 때문에 명확하게 네게 말해줄 수 있는 건, 결국 부모는 자녀가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 사람의 나이도, 성별도, 심지어 사람이 아닌 반려동물이더라도 상관이 없다고. 중요한 것은 그저 '사랑'일뿐이라고. 그는 내 애인이 정말 궁금하다며, 언젠가 피렌체에 오게 된다면 꼭 함께 자신의 집에 놀러 오라고 했다.


 Laura도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자신은 행복할 줄 모르던 사람이었다고 했다. 항상 자신이 보살펴야 하는 대상(부모,자녀,직원들)에게 둘러싸인 삶이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위한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또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보다는 평가하기 바빴다. 타인의 기준에 맞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몇 년 전 처음으로 이곳에 왔다.(그는 이번이 세 번째 까미노이다.) 온전히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이곳에서 매일매일 느끼는 모든 감정과 생각들에 대해 일기를 남겼고, 돌아가서는 그것을 가족들에게 보여주었다. 일기를 본 가족들 모두가 진짜의 그를 알게 해준 것에 대해 고마워하고 행복해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진실해지는 것이라고 했다.




 저녁식사는 완벽했다. 나는 양파를 잘게 손질했고 Laura가 과카몰리를 만들며 간을 보았다. 나머지 재료들도 함께 늘어놓고 취향껏 조합해 먹었다. 신선하고 질 좋은 음식들이 어우러진 건강하고 고급스러운 한 끼였다.




 식사를 마치고 정리를 한 뒤 일찍부터 잘 준비를 하기로 했다. 파티의 여파로 피로했던 우리는 쿵짝이 잘 맞았다. 자기 전 내 발의 물집을 그가 치료해 주겠다고 했다. 의료인인 나조차도 누군가의 발을 만지는 게 유쾌하지 않은데, 그는 순례길 내내 물집이 생긴 친구들의 발을 치료해 주었다. 따뜻한 Laura.

그는 내 물집을 바늘로 터뜨린 후 실을 껴놔주었다. 그 위에 거즈와 테이프까지 감아줬다.











 순례길에서는 사람들과 훨씬 진솔하고 밀도 있게 가까워질 수 있다. 모두가 달랑 운동복 두 벌만 들고 이곳에 온다. 우리에겐 멋진 옷도 메이크업도 머리 손질도 없다. 비 오듯 땀을 흘리며 걷고, 각자의 속옷을 손빨래해서 같은 빨랫줄에 널고, 커튼도 없는 도미토리에서 코를 골며 뻗어 잔다.


 이탈리안인 Laura와 한국인인 나는 영어로만 대화를 나눌 수 있었기 때문에 최대한 쉬운 단어와 문장을 통해 생각을 표현해야만 했다. 그래서일까. 대화에서조차도 어떤 겉치레가 전혀 없었다. 우리는 말을 막 뱉기 시작한 아이들처럼 그저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알맹이만을 주고받았다. 그 과정은 세련되지는 못했을지언정 솔직함과 무해함뿐이었다. 나이도 국적도 달랐지만 서로의 여린 내면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어떤 부분에서는 많이 닮아있는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었다. 순례길이라는 특별한 상황 속에서 "진짜 나"와 "진짜 너"가 만난 것이다.


길 위에서 보낸 날들 중 가장 아름다웠던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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