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해 Aug 12. 2023

슬픔으로 존재하기


Prologue


아침에 일어나 학교에 갈 준비를 한다. 다음 장면. 7시 셔틀버스에 몸을 싣고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기댄다. 오늘도 어제와 똑같은 하루일 것이다. 다음 장면. 교실에 들어가 오늘의 격언을 칠판에 적는다. 이걸 주의 깊게 보는 사람이 있을까. 다음 장면. 1교시. 쉬는 시간, 선생님을 부여잡고 질문 세례. 또 너냐는 표정. 2교시. 이번에는 역시 도해 너밖에 없다는 말. 기특하다는 표정. 3교시, 4교시, 반복. 자리에서 일어나 어색한 친구들과 급식실로 향한다. 어른들은 중고등학교 친구가 진짜라고 하던데. 나는 망했네 벌써. 다음 장면. 혼자 매점이 아닌 교실로 향한다. 수학 문제를 풀고 영어 지문을 외운다. 생각을 틀어막으니 편안하다. 5교시, 오늘도 하루가 참 길구나 생각한다. 6교시, 7교시, 반복에 반복. 드디어 수업이 끝나 야간 자습이 시작된다. 세상이 울렁여 잠시 눈을 붙인다. 다음 장면. 중식과 다를 바 없는 석식을 먹으며 언제 이 지루함이 끝날지 떠올린다. 대학에 가면 바뀔까. 별로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다음 장면. 스탠딩 책상에 몸을 기대 오늘 배운 내용을 머리에 집어넣는다. 투명한 유리 사이로 스치듯 지나가는 선생님들과 친구들. 예민한 고등학생은 다시 책 속으로 도망친다. 다음 장면. 어느새 10시 30분. 집에 갈 시간이다. 오늘도 플래너에 적힌 조금의 완수와 수많은 실패들. 늘 목표와 현실은 이 정도이다. 다음 장면. 셔틀버스에 몸을 누이고 노트북으로 영화 <디 아워스>를 재생한다. 언제나 시작은 강가에서 자살하는 버지니아 울프이다. 주머니에 무거운 돌을 넣고 물로 향하는 그의 모습에 비로소 하루가 끝났다는 체감을 한다. 다음 장면. 집에 도착하여 쓰러지듯 누워버린다. 정말 끝이다. 예상되는 내일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으면, 소망한다. 그러나 내일도 반복. 모레도 반복. 반복에 반복에 반복을 거듭한다.     





이 모든 감정의 바탕에 슬픔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은 대학 입시가 끝난, 열아홉의 겨울이었다. 고등학생인 나를 지배하던 불안, 짜증, 강박, 권태. 그것들은 슬픔의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었으나, 슬픔의 징후가 아닌 입시 성공을 위한 기본 절차로 취급되었다. 슬픔은 심란한 감정들에 가려져 그 자체로 인정받지 못했다. 다만 모든 문제의 원인으로 보이던 ‘대입을 준비하는 수험생’의 위치에서 벗어나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학생 신분과 무관하게도) 처리되지 못한 슬픔은 다시금 혼란한 감정과 생각으로 흐려졌다. 성공적인 입시를 치뤄 세상이 나에게 원하던 모든 것을 제공한 그때, 주변의 달뜬 분위기와 우울한 당사자라는 설명되지 않는 이상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내 곁으로는 ‘다행이다’라는 안도감만이 잠시 스쳐 지나갔고, 여전히 행복은 아득히 멀리 있었다. 내 어지러운 머릿속 상황은 이러했다. 별걱정 없이 학교와 학원에 다니고 그로부터 입시에서의 우위를 점했다는 사실이, 내가 다른 사람들의 기회를 뺏었다는 생각으로. 이것이 응분한 성취일까, 나는 타고난 운에 편승한 뻔뻔한 작자이다, 라는 결론까지. 대학도, 삶도, 그 어떤 것에도 나는 자격이 없었다. 나의 비관과 권태는 그저 배부른 자의 복에 겨운 투덜거림이자 기만에 불과했다. 따라서 슬픔은, 겨우 초라함을 감춘 오만방자한 스무 살이 스스로 인정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밖으로 드러낼 수도 없었다. 슬픔을 외면한 채 보낸 시간을 돌이켜 보면, 내가 슬픔을 직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인지 직면할 수 없었기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외면에도 한계가 있었다. 어렴풋하게 감각되던 슬픔은 기어이 더 큰 파도가 되어 나를 삼켜버릴 듯 다가왔다.     


그러나 휘몰아치듯 동요하는 슬픔이 영원불변하게 이어지지는 않는다. 슬픔은 시간이 지나면서 정리되기도 하고, 이해되지 못한 채 그저 수용되기도 하고, 더 크게 증폭되어 삶을 압도하기도 한다. 다행히 나는 그렇게 끈질기고 성실하게 슬퍼하는 사람이 되지 못했다. 나름 슬픔과 우울감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더 이상 감정이 고인 상태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어떤 도약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지긋지긋한 슬픔이 가져온 비겁함이자 마지막 용기로, 왜 그래야만 했는지 설명을 요구하거나 과거로 돌아가는 일을 그만두었다. 이제는 그저 나의 감정을 바라봐야 할 때. 조심스럽게 내 기저에 있는 슬픔의 존재를 열어보고, 죽음이라는 형태의 슬픔에 끌리는 나를 응시하였다. 슬픔은 여전히 불분명했지만 그렇다고 마주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것은 여전히 어렵다.)     


삶과 존재함에 관련된 모든 것은 나에게 슬픔의 형태로 다가온다. 너무 아름다운 것을 보아도 급격하게 슬퍼지고, 고통에서 분투하는 모습을 보아도 슬퍼지고, 누군가가 상처를 드러내 보여도 슬퍼지고, 상처가 아물어 단단해진 것을 보아도 슬퍼진다. 특히 괜찮은 척 노력하지만 슬픔이 외면을 비집고 나오는 것을 목격할 때 속절없이 무너진다. 어떤 특별한 계기가 없어도 슬픔을 쉽게, 자주 느끼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심지어 슬픔은 다면적인 감정인지라 천차만별로 감각되었다. 건조한 슬픔, 축축한 슬픔, 담담한 슬픔, 절망적인 슬픔, 행복한 슬픔, 원망 어린 슬픔, 추잡스러운 슬픔… 어떤 슬픔이든 존재할 수 있었다. 그중 나는 내 슬픔이 왈칵 쏟아지는 물 같다고 느꼈고, 잔잔한 작은 슬픔은 벗으로 여기게 되었으며, 행복한 순간에서도 슬픔을 가장 먼저 만나는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나의 슬픔이 점진적으로, 여전히 주저하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여정에서의 소득이랄 것이 있다면 나를 무너지게 하는 슬픔이 나를 지탱하는 슬픔이 되는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나의 우울감이 나를 사랑하는 이의 슬픔으로 이어져 더 많은 고통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이제야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내게도 슬픔을 다룰 수 있다는 희망이 희미하게 빛났다. 그때 처음으로 이런 기대를 품었다. 내 안에서 슬픔을 잘 굴려 다듬고 응축시키다 보면 작고 옹골진 구슬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작아진 슬픔을 늘 품고 다닐 수 있다면, 때때로 그것을 쓰다듬을 수도 있고, 커다란 슬픔을 만나도 더 잘 대응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죽음보다는 삶의 어떤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다른 이들처럼 생을 사랑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영화 <디 아워스>(The Hours)에서 버지니아 울프가 이런 말을 한다.      


(소설에서 왜 누군가를 죽여야 하냐는 질문에 대하여) “Someone has to die in order that the rest of us should value life more. (누군가 죽어야만 남은 사람들이 삶의 소중함을 깨닫죠.)”     


누군가 삶을 떠나야만 남겨진 사람이 삶의 소중함을 깨닫는다니, 현실에 그대로 대입하면 절망적일 뿐만 아니라 다소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어느 정도는 사실이기에 쓰라리다. 나의 경우에도,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나의 생각에 제동을 걸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죽음은 타인의 삶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 죽음의 상흔은 좌절과 고통, 죽음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고, 아니면 영화에서 울프가 말하듯 주체적인 시간을 사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과연 죽음이 없다면 삶을 얼마나 소중히 여길 수 있을까. 심지어 죽음을 떠올려도 삶을 긍정할 수 없는 나 같은 사람도 있을 텐데. 그럴 때 나는 주변 사랑하는 이들을 잃는 상상을 하게 된다. 그러면 비로소 그들이 더 행복했으면, 더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에 대한 욕심이 크게 부푼다. 이렇게나마 삶을 욕구하게 된다. 물론 누군가의 죽음에서 딛고 일어나 나의 생을 지속한다는 것에서 스스로에 대한 역겨움을 지울 수 없다. 동시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항변해 본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입맛대로 상대를 해석하기 마련이니. 그래서 나는 다만 떠난 사람이 내가 더 살아가기를 바라고, 이러한 생각을 용인해 주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소망을 품는다. 어차피 우리는 서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주위를 도는 존재들이기에 이 정도의 월권과 이해를 빙자한 오해는 불가피하다고 주장하면서.      


내 앞에 있던 생(生)과 사(死), 옆에 있는 생과 사, 뒤에 있을 생과 사를 떠올린다. 역시 삶도 슬프고 죽음도 슬프다. 내 눈물에 잠식되어 허우적대던 시간을 지나 그것을 인정하고 나니 이제 다른 슬픔들이 눈에 밟힌다. 특히 성실하게 삶을 꾸려온 존재들이 더욱 시선을 끈다. 역시 나에게 모든 존재는 그 자체로 슬픔으로 감각된다.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명증하게 설명되지는 않는다. 그래도 자주 넘치곤 하는 나의 슬픔이 가져다준 소중한 깨달음이 있다. 실재하지 않아도 있는 것처럼 느껴지면 있는 것이고, 실재하더라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면 없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여전히 누군가의 삶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부재의 존재는 여전히 실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만약 하나의 삶이 다른 삶에 영향을 미친다면 그 삶은 계속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삶과 죽음은 어떤 차원에서는 의미가 있을 수도 있는 게 아닐까, 기대하게 된다. 그렇게 삶과 죽음은, 나와 타인은 슬픔을 매개로 연결될 수 있을지 모른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존재하기 위해서 투쟁한다는 말을 좋아한다. 종결되는 슬픔은 없을지라도 슬픔을 잘 다듬으면서 이 자리에 용감하게 존재하고 싶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러하기를 소원한다. 이렇게 우리가 함께 살아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Epilogue


To look life in the face. 삶을 똑바로 보고

Always to look life in the face 언제나 삶을 똑바로 마주하고

and to know it for what it is. 삶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At last to know it, 마침내 삶이 무엇인지 깨닫고

to love it for what it is, 삶을 그 자체로 사랑하고

and then, 그런 후에야

to put it away. 떠나는 거예요.     


Always the years between us. 우리가 영원히 함께한 그 세월을

Always the years. 영원히 함께한 그 세월을

Always the love. 영원한 그 사랑을

Always, 영원한

the hours. 그 시간을     


출처_영화 <The Hours>(2002)

https://youtu.be/QPeo4ZyK2X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