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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해 Sep 17. 2023

하얀 입김이 피어나는 곳

퍼퍼위: 버섯을 밤중에 땅에서 밀어올리는 힘

계절이 지나고 시간이 흐르고 모든 것은 바뀌어 내 손에 한 줌 남는 것이 없을 것이다. 나의 존재마저도 짧은 생을 살다 스러질 것이니 당연하다. 시간이 흐르는 것이 체감될 때 서글퍼진다. 무엇도 결코 손에 잡히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 그래서인지 겨울에 정박한 마음은 계절을 떠날 줄 모른다. 세상의 계절은 계속해서 변모할지라도 내 안에서는 언제나 여전히 겨울인 것. 차갑고 시리고 동시에 따스한, 뿌연 수증기처럼 만져지지 않지만 단단하게 응결된 무언가. 그런 것이 내 안 깊숙한 곳에 자리한다.


겨울은 우리의 감각을 깨운다. 만져지는 냉기, 차가운 냄새, 보이는 숨. 폐에 숨을 가득 들이마시면 서리가 세포 하나하나에 들어차 자신의 존재를 알려 온다. 비로소 살아 있음을 감각한다. 이보다 더 충만하게 살아 있을 수는 없을 것만 같다. 그리고 털실의 온기, 달콤한 간식 냄새, 포근한 이불, 손으로 눌러 쓴 편지. 겨울에 깨어난 감각은 시린 계절의 따스함을 더욱 세밀하게 느끼게끔 한다. 밖이 춥기에 안은 더 따뜻해야 한다는 낭만이 지배하는 겨울은 타인이 기꺼워지는 유일한 계절이다. 그들이 전하는 온기를 그 자체로 충만하게 받아들이고 싶어서 나는 나를 겨울로 만든다.


무엇보다 내 안에 자리한 겨울의 존재 의미는 삶의 면면들을 소화하기 위함이다. 봄의 간지러운 설렘, 여름의 뜨거운 열정, 가을의 바스락거리는 감성도 모두 좋지만 그것들은 나를 살게 하지는 못한다. 나의 생에 필요한 것은 나를 가라앉혀줄 서늘함과 그 계절 속에서 예민하게 만져지는 생(生)이다. 달뜬 상태에서 내려와 차분하게 침잠해야 한다.


나의 겨울은 시간의 경계에 있다. 삶과 죽음, 시작과 끝, 지금과 지금이 아닌 것. 인간인 나는 어쩔 수 없이 매력적인 후자에 이끌린다. 삶을 살면서 죽음을 생각하고 시작을 하면서 끝을 상상한다. 흘러가는 거대한 시간에 잡아먹혀 생과 사의 경계마저 없어질 텐데, 굳이 고통스러운 삶에 묶여 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현재 발 딛고 서 있는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은 충동에 시달린다. 자유가 주는 무게에 짓눌려 선택을 피하고 싶고, 나를 유혹하는 무(無)와 태만함을 향해 달려가 안기고 싶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충동이 극대화된 것도 겨울이고 충동을 다스리는 것도 겨울이다. 왜인지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삶의 영위, 타인의 존재, 시작과 출발을 비롯한 많은 것들-이 견디기 어려워질 때면 내가 품고 있는 겨울 풍경으로 도망친다. 지긋지긋한 고통에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깨어 있음으로써 살아 있음을 감각할 수 있는, 새하얗고 차가운 익숙함이 지배하는 계절. 그곳에서 들숨 가득 시린 공기를 넣고 날숨의 뽀얀 입김을 보아야 내가 아직 사라지지 않고 여기에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어딘가 이질감이 느껴지는 봄여름가을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내가 소화할 수 있는 겨울로 만든다. 차가운 정적에서 감정과 상황을 솎아낸다. 너무 무거운 생각은 떨궈버리고 너무 가벼운 감정은 바람에 날려버린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만을, 내게 중요한 것만을 골라낸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한 줌도 되지 않는다. 나는 그것들을 꽝꽝 얼려 단단한 얼음으로 만든다. 그 반투명한 얼음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다. 그 몇 발자국의 얼음 위에 흔들리지 않게 선다. 가끔은 쌓은 얼음이 무너지기도 하지만 그 행위를 하지 않으면 언제고 허무로 떨어져 버릴지 모르기에, 지난한 과정을 반복한다. 세상살이는 겨울을 통해 내 안에서 소화되고 나는 비로소 생의 바깥을 향하는 경향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다.


물론 이 정도의 수사로 나에게 겨울이 겨울인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다. 왜 겨울이 내 안에서 삶의 은유로도, 죽음의 은유로도 존재하는지 설명해낼 수 없다. 나는 그저 무언가 깨어나고 또 무언가 사라지는 감각을 겨울에서 느낄 뿐이다. 겨우 쌓아낸 것들이 와르르 무너졌다가도 나도 모르는 새에 눈이 쌓여 다시 흰 백지가 된다. 그래서 없음의 하얀 눈밭에서 얼음을 쌓고 발을 딛는다. 그리고 그곳이 내가 서 있을 곳이라고 느낀다.


겨울, 봄, 여름, 가을, 그리고 다시 겨울.


계절은 계속해서 흘러간다. 그것에는 아무런 의도도 의미도 없다. 그저 시간이 흐르는 것이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겨울인지도, 어디가 겨울의 정점인지도, 언제쯤 다시 겨울이 돌아올지도 정확히 가늠할 수 없다. 그렇게 덧없이 변하고 흐르고 결국에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시간에 나는 내던져져 있다. 그럼에도 나에게는 변하지 않는 겨울, 겨울의 모습으로 당도하는 삶이 있다. 내 중심에 잔잔하고 단단하게 자리한 겨울은 언제나 다른 계절을 침범한다. 그리고 결국에는, 시리게 하얀 하늘 아래 뽀얀 숨을 땅에서 뿜어내며 그렇게 나를 생으로 끌어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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