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풍경을 뚫고 사람들이 극장을 향한다. 설상(雪霜) 속 사람들의 뒷모습은 희게 지워진다.
극장에는 사람들이 있다. 극을 기다리는 말소리가 공간을 채운다. 빨간 커튼이 드리워진 벽 앞에 나란히 앉은 의자들. 사람들은 좌석과 좌석 사이 고독을 비켜 앉는다. 의자의 금박 이름표는 한 가닥의 빛을 여러 갈래로 나누어 준다. 그 빛을 받아 쥐고 팜플렛을 비추어 본다. 극은 문 앞에 서서 오지 않은 이들을 기다린다. 오지 않은 이들은 영영 오지 않는다. 커튼이 올라간다. 응집된 빛이 무대 한가운데를 밝히고 어둠은 사잇길로 물러난다. 무대 위에는 사람이 없다. 몸도 없다. 오직 리듬과 곡선과 외침만이 있을 뿐. 음 없는 음악과 몸 없는 춤과 말 없는 언어가 뒤엉킨다. 소용돌이의 숨결이 앉은 이들에게 가닿는다. 그 사이에서 침묵은 몸을 말아 웅크린다. 사람들은 벽 너머를 바라본다. 누군가의 훌쩍이는 울음과 누군가의 뼈아픈 조소가 교차한다. 커튼이 내려온다. 흘러간 순간들에 보내는 박수가 이어진다. 한번 내려간 막은 다시 올라가지 않는다. 한참이 지나 사람들은 자리를 떠난다. 나지막한 대화가 멀어져 간다. 소리가 사라진 자리에 다시 적막이 파고든다. 불이 꺼진다.
아무것도 없는 극장에
극을 보는 사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