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적 허세와 부득이한 현실타협 그 중간 어딘가에
기억조차 못하는 아주 어릴때부터 나는 지독한 콘텐츠 중독자였다.
아니, 어쩌면 이건 내가 태어나기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지도 모른다. 어린시절, TV 앞을 떠나지 못하는 나를 보며 아빠는 증조할머니께서 라디오 드라마를 너무 사랑하신 나머지 돌아가시고 묘를 쓸 때 라디오를 함께 묻어드렸다며, 이건 유전이라고 웃곤 했다.
처음 드라마를 보게된 건 아마도 다섯살 무렵, 저녁 8시반에 9번 (KBS 1TV)에서 시작하는 일일드라마를 못보게 하고 그만 자러 들어가라고하는 엄마가 참 미웠다. 조금 더 크니 나는 일일드라마는 자유롭게 볼 수 있었지만, 여전히 10시 미니시리즈를 코앞에두고 잠자리에 들어야했다. 그때쯤 나는 미니시리즈가 훨씬 재밌다는 걸 알아냈었다. 내 어릴적 취침시간은 드라마 시간을 기준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렇게 공중파 방송3사의 TV 편성표를 다 꿰차면서 자라난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때에는 밤 10시 드라마 시간을 저녁 식사시간으로 정해두고는 시간맞춰 독서실에서 집에왔었더랬다. 내 고3은 천국의 계단으로 시작해 파리의 연인과 풀하우스를 거쳤고, 수능이 끝나고 나니 미안하다 사랑한다가 기다리고 있었다.
영어는 물론 미드로 배웠다. 어릴 때 비디오가 늘어지도록 돌려봤던 Full House, 그리고 대학시절 아이팟 비디오에 담아서 시즌 10까지 다 돌려본 Friends! 내 영어 발음이 서부와 동부 중간 어디쯤인건 분명 샌프란과 뉴욕을 넘나드는 드라마속 주인공들 덕이다.
그렇게 배운 영어는 외국계 회사에 취직하며 빛을 발하게 되었고, 해외에서 근무하던 시절 외로움을 버티게 해준건 소중한 아이패드 2세대, 그리고 그 속에서 돌려봤던 한국 드라마들이었다. (추억의 베이코리안즈 ...)
이런 나도, 결혼을 하고 직장을 다니면서 아이를 키우게 되자 예전처럼 콘텐츠에 많은 시간을 쏟지 못하게 되었다. 삶은 정신없이 바쁘고 시간은 턱없이 부족한데, OTT의 시대에 콘텐츠는 넘쳐나고 있다. 10개가 넘는 에피소드를 따라가야하는 드라마는 버겁고, 영화는 그 깊이가 부담스럽다. 어느새 나는 콘텐츠를 즐기기 보다는 사람들과 대화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 숙제처럼 소비하고 있었다. 넷플릭스는 빨리감기로 보고 그마저도 유튜브에서 '몰아보기 결말포함'을 검색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러다보니 책이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TV에 중독되어 자란 나는 글 읽는 속도도 무척 느리고 문해력도 딱히 뛰어나지 못하다. 그래도 서점과 도서관은 그 누구보다 좋아해 스트레스가 심한 날이면 서점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다 끝내 다 읽지도 못하는 책을 한권씩 사오곤 했다. 다행히 책을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딸 덕에, 독서는 육아 중에 잠깐 짬을 내서 나만의 시간을 가지면서도 죄책감을 덜 느끼게 하는 좋은 수단이 되어주고 있다. 핸드폰 보는건 웬지 좀 찔리니까 ...
이렇게 나는 아주아주 현실적인 이유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물론, 채워지는 나의 인문학적 허세는 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