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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은 왜 경계에서 일어나는가?

하나를 잘 하는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이유

by Agri MSG

경계에서 태어난 혁신의 역사

인류의 도약은 언제나 경계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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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화가로 출발했지만, 곧 그의 관심은 해부학, (군사적인)공학, 식물학으로 확장되었다. 그의 노트는 단순한 스케치북이 아니라, 예술과 과학이 아직 분리되지 않았던 시대의 통합적 인식을 보여주는 문서였다. 그곳에는 "모나리자"의 미소를 그린 손과 "비행기계"를 설계한 손이 같은 언어로 세상을 해석하고 있었다.


17세기, 아이작 뉴턴은 수학과 자연철학을 연구하면서도, 생애의 상당 부분을 신학 연구와 연금술에 할애했다. 그에게 우주의 법칙을 발견하는 일과 신의 섭리를 이해하는 일은 별개가 아니었다. 그의 만유인력 법칙은 자연 속 신의 의도를 수학적으로 해석한 신학적 작업의 산물이었다.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프린키피아”가 과학의 성서라고 불리는 이유도 신의 의도를 읽으려던 뉴턴의 노력을 감안한 것이리라)


18세기, 제임스 와트는 대학의 기술자로 일하며 증기기관을 개량했지만, 그는 순수 과학자도, 단순 기술자도 아니었다. 그는 철공소의 현장 감각과 열역학적 직관, 그리고 사업가적 실행력을 동시에 가진 존재였다. 그의 증기기관은 이론과 실천, 학문과 산업의 경계를 무너뜨린 결과물이었으며, 그것은 단순한 발명이 아니라 인류의 생산방식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한 사건이었다.


이들은 모두 '한 세계의 언어'로는 설명되지 않는 사람들, 즉 경계에 선 사람들이었다. 모두가 알만한 이름을 빌리지 않더라도, [거의 모든 것의 역사] 에서는 전통적인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이 인류사를 바꿀 획을 그었던 수많은 경우를 확인 할 수 있다. 이렇듯, 기존의 해석으로는 찾을 수 없던 해결책을, 이질적인 두 세계가 충돌하고, 그 마찰 속에서 새로운 문법이 만들어질 때 찾는 경우가 인류사에서는 잦았다.

인간의 인식이 기존의 질서를 넘어서려 할 때, 그 중간지대—명확히 정의되지 않은 사이(間)—가 창조의 공간이 된다. 이곳은 불안정하지만, 모든 변화의 씨앗이 싹트는 곳이다.



왜 경계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가

경계에서의다이나믹.jpg 한참동안 바라보게 했던, KoN님의 Blue Bossa 작품. 작가가 어떤 의도로 그린지는 모르겠으나, 경계에서의 역동성, 불완전성, 그 속에서 발현되는 조합 을 생각했다.




경계란, 서로 다른 체계가 마주하는 지점이다.

하이데거의 언어로 표현하면, 그것은 '존재가 드러나는 숲 속의 빈터(Die Lichtung)'이다.

빽빽한 숲 속에서 나무들이 물러나 만들어진 빈 공간, 그곳에 빛이 비치고 비로소 사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가 한 세계의 내부에만 머물 때, 그 세계의 구조 자체는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 당연해서 의식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세계와 만났을 때, 각자의 세계는 비로소 상대화되고, 문제화되며, 객관화된 상태로 드러난다.


경계의 공간에서는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난다.


첫째, 기존의 질서가 해체된다. 익숙한 언어와 논리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과학적으로는 기존 패러다임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예외를 마주하게 되며, 사회적으로도 서로 다름이(틀린것이 아니라) 마주하며 모순적인 상황에서 혼란이 발생한다. 이 순간, 지식은 더 이상 안정적이지 않으며, 세계는 다시 열린 질문이 된다.


둘째, 새로운 의미망이 형성된다. 이전에는 무의미하던 것이 맥락을 얻고, 다른 세계의 언어로 번역된다. 과학의 발전은 우연한 발견이 제대로 의미부여 되었을때 촉발된 경우가 대부분이고, 새로운 개념은 기존 개념의 연장이 아니라 그것의 부정과 재구성을 통해 탄생한다. 경계에서의 사유는 바로 이 부정과 재구성의 작업이다.


이 '혼종의 과정'에서 사고의 틀이 확장되고, 새로운 개념과 방법이 등장한다.

즉, 혁신은 '지식의 이동'이 아니라 '시선의 이동'에서 발생한다.

기존 세계의 내부에 머물러서는 새로운 것을 볼 수 없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은 "우리 언어의 한계가 우리 세계의 한계"라고 말했다. = 하나의 언어 게임 안에서는 그 게임의 규칙만이 의미를 갖는다.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세계를 보려면,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고 그 새로움은 그래서 경계에서 이루어 진다.


경계에 선다는 것은, 스스로를 불완전한 위치에 두는 일이다. 한쪽의 논리로는 세계를 설명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태도이자, 그 불완전함 속에서 더 넓은 통합을 모색하는 지적 용기이다.

경계의 사유는 양자택일이 아니라 양립을 전제로 한다. 이성은 감성을 필요로 하고, 기술은 철학의 언어로 다시 해석되어야 한다.


경계에서의 긴장은 불편하지만, 바로 그 긴장이야말로 인간 사고의 가장 창조적인 조건이다.

변증법적 사유가 정(正)-반(反)-합(合)의 운동을 통해 진리에 다가가듯, 경계의 사유는 대립하는 두 세계의 충돌 속에서 더 높은 종합을 향해 나아간다.



경계에 서 있기 위해 필요한 노력

경계에 선다는 것은 단순히 여러 분야를 '아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 다른 세계의 언어를 '번역'하고, 그 속의 진리를 함께 이해하려는 사유의 훈련이다.

이 훈련에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1) 지식의 수평 확장 – 전문성을 넘어 통섭으로


자신의 전문 분야를 넘어, 인문학·역사·과학·예술의 개념에 끊임없이 접속해야 한다.

이는 지식의 깊이를 흩트리는 일이 아니라, 더 넓게 연결짓는 일이다.


에드워드 윌슨(E.O. Wilson)은 『통섭(Consilience)』에서,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분리가 근대 학문의 비극이라고 지적했다. 18세기까지만 해도 '자연철학'이라는 이름 아래, 물리학·화학·생물학은 하나의 통합된 세계관의 일부였다. 그러나 19세기 학문의 전문화 이후, 각 분야는 고유한 방법론과 언어를 발전시키며 서로 소통 불가능한 섬이 되었다. 윌슨은 이 분리된 지식들을 다시 연결하는 작업 [통섭] 이 21세기의 과제라고 주장했다. (박문호 박사님, “빅 히스토리” 가르침을 기반으로 공부하고 정리함)


한쪽의 시선으로만 세계를 해석하면, 언제나 결과는 단편적일 수밖에 없다.

경제학자는 인간을 효용을 극대화하는 합리적 존재로 보지만, 심리학자는 인지적 편향과 감정의 지배를 받는 존재로 본다. 생물학자는 생명을 유전자의 복제 기계로 보지만, 현상학자는 세계-내-존재 로서의 체험된 삶을 본다. 어느 하나도 전체를 담지 못한다. 존재는 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 경계에 선 사람은 이 모든 시선을 동원하여 세계를 입체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2) 언어를 다루는 능력


경계에서 태어나는 모든 혁신은 번역의 행위다.

서로 다른 세계의 언어, 즉 "생명"과 "기계", "감각"과 "데이터", "현장"과 "이론"을 이어주는 문법이 필요하다. 이때 언어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생각 그 자체가 된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을 결정한다. 따라서 다른 세계를 이해하려면, 그 세계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번역자의 과제』에서, 진정한 번역은 단어를 다른 단어로 바꾸는 작업이 아니라, 한 언어의 '의도(intention)'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일이라고 말했다. (Feat. 박구용 철학교수님 가르침)

번역자는 두 언어 사이에서,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으면서, 양쪽의 의미를 연결시킨다.

즉, 농업의 언어, 기술의 언어, 인간의 언어를 오가며 생각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경계의 사람'은 전체를 보는 시야를 갖게 된다.


실제로 융합 연구의 가장 큰 장애는 개념의 불일치라는걸 관련자는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물리학자가 말하는 '정보'와 생물학자가 말하는 '정보'는 같은 단어지만 다른 의미를 갖는다.

경계에 있는 사람은, 이 차이를 인식하고, 양쪽의 의미를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소통 가능한 새로운 개념을 구성해야 한다.



3) 불안과 모호함을 견디는 감정의 근력


경계에 선다는 것은 확신 대신 질문을 품는 일이다.

모든 답을 갖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사고하고, 결정하고, 실천해야 한다. 위대한 예술가나 사상가는 불확실성과 신비, 의심 속에서도 조급하게 사실이나 이성을 찾지 않고 그 상태를 견딘다. 명확한 정체성, 확고한 방법론, 안정적인 소속감을 포기하고 경계에 서는 일은 심리적으로 큰 부담을 준다. 그러나 진정한 중간자란 불안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는 자다.


더불어, 위대함은 자신뿐만 아니라 외부로부터도 그 새로움을 인정받을때 오는 것일테다. 프린키피아에서 뉴턴은, 미적분으로 3줄 이면 끝날 증명을, 100페이지가 넘게 당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했단다. 위대함이란 그런것 같다.

내적인 모호함과 외적인 불확실성, 그리고 그 모두를 포함하는 지리한 설득의 과정을 견디는 일.


감정의 근력이란..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확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경계에 대한 공감부재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지키며 사유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적 성숙의 증표이며, 혁신을 가능하게 하는 심리적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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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농업에 기여할 수 있는가?

(스스로에 주는 최면)

농업은 생명과 기술, 자연과 인간, 질서와 혼돈의 경계 그 자체다.

농업은 인류 최초의 문명적 행위였으며, 동시에 가장 현대적인 생명공학과 데이터과학의 실험장이다. 농업은 가장 전통적이면서 가장 미래지향적이고, 가장 지역적이면서 가장 보편적이다. 이 모순적 속성이야말로 농업이 경계의 학문이자 경계의 실천임을 증명한다.


나의 배경은 생명공학과 반도체 공정, 그리고 생산관리였다.

생명공학에서 나는 생명을 분자와 세포의 체계로 이해하는 법을 배웠다.

반도체 공정에서는 극도로 정밀한 제어와 표준화가 어떻게 복잡한 시스템을 관리하는지를 경험했다.

생산관리에서는 자원, 시간, 인력을 최적화하는 논리를 익혔다.

그러나 농업을 만났을 때, 나는 깨달았다. 농업은 이 모든 것을 필요로 하면서도, 그 어느 것 하나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농업은 생명의 영역이지만, 생명공학의 환원주의로는 설명할 수 없다.

식물은 유전자의 발현이지만, 동시에 토양·기후·미생물·인간의 노동이 얽힌 생태적 관계망의 결과다.

농업은 시스템이지만, 반도체 공정처럼 완벽히 표준화할 수 없다.

농업은 생산이지만, 산업적 효율성만으로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생명의 순환, 생태계의 균형, 농촌 공동체의 존속이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즉, 나의 역할은,

두 세계의 경계에 서서, 양쪽의 언어로 사유하고, 그 사이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스마트팜과 정밀농업, AI 기반 작물 관리 시스템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효율화'의 도구로만 쓰인다면, 농업은 여전히 산업의 논리에 종속될 뿐이다.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기술이 생명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재설계되고, 농업이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재정의하는 철학적 실천이 되는 것이다.


'농업을 아는 기술자'가 아니라 '세상을 아는 농업인'이 많아질 때,

비로소 농업은 산업을 넘어 문화이자 사상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고 믿는다.


농업은 단순히 식량을 생산하는 행위가 아니라, 인간이 자연과 맺는 관계의 총체이며, 생명에 대한 존중과 책임의 실천이다. 이것은 경제학이나 공학만으로는 이야기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그 경계 위에서 사고하고, 번역하며, 사람과 기술, 생명과 시스템을 잇는 역할을 하고자 한다. 그것이 내가 농업에 기여할 수 있는 방식이다. 나는 단지 농사를 짓는 사람이 아니라, 농업이라는 경계에서 세상을 다시 해석하고 싶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 [스마트팜의 재구성] 을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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