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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MTD Jul 14. 2024

백홍부부가 각방을 쓰게 된 이유

<눈물의 여왕>과 대상관계이론 #3

오늘은 대상관계이론의 두 자리 이론 중에서 편집분열적 자리에 대한 내용을 마무리해보려 한다. 지난 글에서는 대상이 좋은 대상과 나쁜 대상으로 분열되어 있는 마음의 상태에 대해서 얘기했고, 그 원인으로서 죽음충동을 알아보았다. 


오늘은 편집분열적 자리에서 갖는 환상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클라인 학파에서 환상은 일상적으로 말하는 환상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실제로 용어를 구분해서 사용했다. 우리가 아는 환상은 fantasy이지만, 클라인 학파의 환상은 phantasy이다. 물론 이런 단어는 세상에 없었지만, 이론가들은 자신만의 이론을 구체화하고 기존의 의미와 구분 짓기 위해 단어를 만들어내거나 살짝 수정하기도 한다. 가령 데리다는 '차이'라는 개념에 '지연'이라는 의미를 더해 '차연'이라고 번역된 개념이 있다. 원어에서는 differ'e'nce의 e를 a로 바꾸어 differ'a'nce로 표현했다. 아쉽게도 클라인의 환상은 일반 환상과 구분된 번역어는 없는 것 같다.




유아는 초기에 편집분열적 자리에 머물면서 '전능 환상'을 갖고 있다. 이는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하고 조종하고 있다는 말 그대로 환상이다. 전적으로 아기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아기는 배고프면 운다. 이는 내 안에서 배고픔이라는 불편감이 발생해서 밥을 달라는 의미로 우는 것이다. 이때 엄마는 아기가 '배가 고프니 밥을 주세요'라는 말을 안 해도 밥을 챙겨준다. 또 아기는 똥을 싸서 기저귀가 불편해도 운다. 이때도 마찬가지로 '기저귀를 갈아주세요'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못하는 것이지만) 엄마는 불편한 게 무엇인지 확인해 보고 기저귀를 갈아준다. 이런 식으로 아기는 졸릴 때, 목마를 때 등 뭔가 불편하거나, 원하는 것이 있을 때마다 운다. 그러면 놀랍게도 그것이 해결되거나 원하는 것을 얻게 된다. 이런 식으로 내가 대상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전능감을 갖게 된다. 


이런 환상은 대상의 감정이나 상황, 행동도 통제할 수 있다고 확장이 되는데, 나를 괴롭게 하는 나쁜 대상을 없애거나 공격해서 무력화시키는 환상도 포함한다. 그래서 클라인은 유아의 공격성(엄마의 젖꼭지를 깨무는 행위와 같은 폭력성)도 환상으로 설명한다. 좋은 대상과 나쁜 대상으로 분열되어 있기 때문에 나쁜 대상은 공격해서 없애버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인 것이다. 또한 유아의 배변 행위를 통해서도 대상을 파괴하려는(오줌으로 홍수를 내서 익사시킨다거나, 똥 미사일을 발사해서 대상을 파괴하려는 소망) 환상이 있을 수 있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니까 클라인의 이론은 수많은 임상과 부모들의 보고를 통해 나타나는 유아의 이해할 수 없는 공격성을 어떤 식으로든 설명 가능한 형태로 이해하면서 구축된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환상은 적절한 시기에는 현실감 있게 수정되고 변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정상 발달에서도 초기에는 이러한 과정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이 향후 맺게 될 인간관계에서의 상호작용 연습과 대상을 고려한 적절한 반응을 하는 것에 대한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편집분열적 자리의 전능 환상은 해인이에게서 볼 수 있다. 해인이는 현우와 데이트를 할 때 식당, 놀이공원, 아쿠아리움 등 모든 곳을 통째로 대관해 버린다. 이를 통해 현우는 '요즘 우주가 우리 둘만 있게 도와주는 것 같다'라는 착각을 하게 만들고 결국 현우의 프로포즈를 받아 낸다. 물론 드라마적인 요소이긴 하지만, '모든 상황을 컨트롤해서 대상이 나에게 고백하게 만들어 버린다'는 해인이의 전능 환상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조금 더 노골적인 장면이 있는데, 해인이 헬기를 타고 용두리를 찾아가는 장면이다. 현우는 해인이가 퀸즈가문의 자제라는 사실을 알고 퇴사 후 본가에 내려가 있었다. 해인이는 그런 현우를 찾아간다. '백현우 나와'라는 문자와 함께 '두두두두'하는 헬기 소리는 시청자로 하여금 도파민이 분출되게 하는 재밌는 장면이었다. 드라마적으로는 매우 재밌었고, 이론상으로는 해인이의 이런 전능적이고 자아중심적인 편집분열적 자리의 특징을 매우 잘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이런 전능 환상은 사실 관계가 좋을 때는 이런 식으로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순간도 분명히 있긴 하지만, 이것이 궁극적으로도 관계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는 없다. 전능 환상은 어디까지나 환상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상의 모든 감정과 행동을 통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우는 퀸즈 가의 사위로 들어가서 온갖 시련과 고난을 당한다. 이런 모습은 정신과에서 상담을 받는 장면에서 잘 드러나는데, 가정에서나 일터에서나 계속되는 처갓집 어른들의 압박과 숨 막히는 티타임이다. 이런 상황임에도 이혼을 하지 못했던 것은 퀸즈 가의 보복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현우에게 결혼생활은 말 그대로 생지옥이 따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힘든 상황에서도 현우는 해인이 하나만 보고 버텼을 텐데, 이 관계마저도 더 이상 예전 같지 않게 되었다. 관계가 좋았을 때는 '백현우를 내 거로 만드는' 목표로 사용되었던 전능 환상은 관계가 안 좋아지니, 대상의 아픔이나 고통을 공감하지 못하고, 경멸적이고 무례하게 대하며 나에게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하게 하는 폭군 같은 태도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아이를 갖는 것, 학위를 따러 혼자 유학을 보내는 것, 언론사 인터뷰를 잡는 것 등 어느 하나 현우의 의사와 상관없이 결정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둘은 왜 이렇게 관계가 악화된 것일까? 그것은 몇 년 전 유산사건에서부터 시작된다. 해인이에게 유산이라는 사건은 여러 의미로 치명적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지난 글에서 자세히 다루었으니 정리된 내용만 보자면 이렇다. 죽음이라는 이슈는 해인이에게 '죄책감'과 '대상의 거절' 경험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다. 해인이에게는 '오빠는 나를 구하려다가 죽었다'는 삶에 대한 근원적인 죄책감이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힘든 사건이었지만 이와 연결되어 계속해서 '거절하는 엄마'의 경험은 해인이의 자아 형성에 더욱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드라마에서 직접적으로 표현되진 않았지만, 해인이 엄마의 대사나 해인이의 모습을 통해 해인이 인생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언어가 있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직관적이고 노골적으로 표현해 보자면 '사람이 죽어도 지만 살려고 하는 못된 년"이라는 부정적인 자기 표상이 있었을 것이라고 예상해 볼 수 있다. 이것은 최근 개봉한 영화 <인사이드 아웃 2>에서 '신념 저장소' 장면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 영화를 통해서도 대상과의 경험이 내사되고 그것이 자아 형성에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처럼 묘사해 보자면 해인이가 엄마와 대화한 기억 구슬은 아마도 파란색의 슬픈 경험으로서, 그 구슬에 연결된 줄을 튕기면 '나는 사람을 죽어도 나만 생각하는 못된 인간이야'라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을 것이다. 


이런 해인이에게 있어서 유산이라는 사건은 끔찍하고도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았던 "나 때문에 누군가가 죽게 되는" 사건이 다시 한번 반복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내가 또 누군가를 죽였어, 나는 또 비난받고 거절당할 거야'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런 자기 처벌적인 생각이 지배한다는 증거는 해인이가 홀로 아기의 초음파 사진을 보는 장면으로 알 수 있다. 해인은 아기 초음파 사진을 보며 참아왔던 눈물이 흐르지만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울지 마 그럴 자격 없어" 이 말은 '너는 사람을 죽인 못된 사람이야 사람 죽여 놓고 울면 다야? 슬퍼할 자격도 없는 못된 년'이라는 내면의 파괴적인 목소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오빠의 익사 사건 때 경험한 엄마의 그 경멸적인 시선과 목소리가 내사되어 해인이의 내면에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고 얘기해 볼 수 있다. 




결국 해인이는 이런 불쾌하고 느끼고 싶지 않은 끔찍한 감정들을 처리하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한다. 지난 우울증에 대한 글에서 말했듯이 인간은 내면의 긴장을 처리하기 위해 무언가를 하는데, 크게 세 가지로 수렴된다. 신체화, 행동화, 언어화가 그것이다. 여기서 해인이는 아기를 위한 방과 모든 용품을 싹 다 치워버리는 '행동화'를 한다. 아기를 위한 물건들이 눈에 보일 때마다 느껴지는 슬픔이 더 이상 나를 힘들게 하지 못하도록 눈앞에서 치워버린 것이다. 해인이는 유산의 상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에(편집분열적 자리에 있기 때문에) 아기의 물건을 볼 때 감정이 (우울적 자리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슬픔이 아니라 나를 불쾌하게 하는 짜증으로 경험한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배우자인 현우가 봤을 때 매우 독단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현우는 그런 해인이의 행동에 대해 실망하고 침대를 따로 쓰는 선택을 하게 된다. 


그런 현우의 선택을 보고 해인은 다시 한번 파괴적인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들었을 것이다. "역시 유산을 한 것 때문에 대상이 나를 공격하고 비난하려고 하는구나, 그래서 침대도 따로 쓰고 나를 더 이상 받아들여주지 않겠구나"라는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던 끔찍한 일이 반복될 것이라는 두려움과 공포, 불안 등 온갖 부정적인 마음이 올라왔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마음을 해인이의 자아는 용납하고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정말 스스로를 포기해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 마음을 분열시켜서 현우에게 투사하게 된다.


해인 : 아기가 나 때문에 사라졌다고 얘기하고 싶지?

현우 : 뭔 소리야, 그런 생각 한 적 없어. 너도 슬픈 만큼 나도 슬퍼

해인 : 가식 떨지 마, 너도 말하고 싶잖아. 다 나 때문이라고!

현우 : 관두자,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하겠냐


이런 과정은 '투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투사적 동일시'라고 말한다. 투사는 내 안에 불편한 감정을 바깥으로 던지면서 소위 '남 탓'을 하는 형태를 말한다. 투사적 동일시란 그 투사한 마음을 나의 일부분이라고 경험하며 동일시를 하는 것까지를 말하는데, 쉽게 말해서 투사를 하고 '역시 너는 진짜 그런 마음을 갖고 있었어'라며 그 투사된 마음이 대상의 것이라고 확신하며 실제로 그 감정이 대상의 것이라고 경험하는 것까지를 말한다. 말하자면 투사를 한 마음의 일부분이 현실에도 영향을 미쳐서 그 대상이 실제로 그런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투사적 동일시 또한 전능 환상과 연결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클라인 후대 학파에서는 투사와 투사적 동일시를 엄격하게 구분하기도 하고, 차이가 없다고 보기도 한다. 차이가 없다고 보는 이유는 투사라는 자체가 투사하는 대상을 당연히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에는 개념이 같다고 보는 것이다. 드라마 내용으로 보자면 '자기 스스로를 처벌하는 해인이의 공격성'이 투사라는 과정을 통해서 현우에게 넘어갔고, 현우는 실제로 '너랑 무슨 말을 하겠냐'라는 표현과 함께 해인을 버리는 행동을 하게 만들면서 동일시가 되었다고 표현해 볼 수 있다. 결국 해인이는 자기 스스로를 공격하는 형태에서 대상이 나를 공격하는 형태로 바꿔버렸고, 그 환상은 현실이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투사적 동일시라는 개념의 시사점이다. 


투사적 동일시라는 개념도 논쟁적인 부분이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의 일부와 감정을 나에게서 분리시켜서 상대방에게 '밀어 넣는다'라는 설명 자체가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인 소리처럼 들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현상을 나의 말이나 행동을 통해 상대방을 어떤 상태을 유도한다는 관점으로 본다면 오히려 논리적이고 전혀 논쟁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결국 말이나 행동이 감정을 실어 나른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의도가 어떤 식으로 발현되느냐에 따라 내가 예상한 반응이 나올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반대로 생각해 봐도 좋다. 상대방의 어떤 말이나 행동이 나의 감정에 영향을 주는 일은 너무나 당연하고 하루에도 없이 벌어지는 이다. 가게 직원의 퉁명스러운 한마디에 기분을 망치기도 하고, 누군가의 따뜻한 인사말 하나에 하루가 행복해지기도 하는 게 우리의 일상이다.




이번 글로 편집분열적 자리를 마무리하게 되었다. 물론 또 다른 영화나 드라마로 이 이론을 소개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우선 다음 글에서부터는 드디어 우울적 자리를 성취한 해인이의 특징들을 살펴볼 예정이다. 우울적 자리는 우울한 마음의 상태로서, 말하자면 이상적이고 완벽한 대상이 없다는 울적한 현실을 받아들인 성숙하고, 성장한 면모들이 드러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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