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지내면서 내 몸 상태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 수 있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큰 원을 그려 보이면서, '길랑바레 증후군이 이거라면' 다시 그 안에 작은 원을 그리며 '환자분은 이 정도예요'라고 말했다. 전조증상들이나 진행되는 양상은 길랑바레 증후군이라고 볼 수 있으나, 전형적이지는 않다는 말이었다. 운동신경과 감각신경의 기능이 둘 다 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운동신경만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보통은 다리 위주로 증상이 나타나서 걷기 어려움을 호소하는 분들이 많은데, 나는 팔이 먼저 나타났고 더 심했다. 그러고는 앞으로 약물을 맞으며 경과를 보자고 하셨다. 길랑바레 증후군은 딱히 치료제가 없다. 약물도 증상 완화가 목적이지 치료제라 할 순 없다고 한다. 그래도 현재 상태와 앞으로의 치료 계획들을 들으니 마음이 안정되었다.
병실에 가만히 누워있으면서 이런 공상을 했다. 한 활발한 마을이 있다. 공장도 돌아가고, 환한 조명이 있고, 마을 사람들도 분주하게 일하는 마을이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공장들이 작동을 멈추고, 조명들도 꺼졌다. 사람들도 안 보이기 시작하며 이미지는 점점 흑백으로 바뀌어 간다. 공장에 있는 기계들도 이상이 없고, 가로등 자체도 문제가 없었다. 마을로 오는 전기가 끊긴 것 같아 살펴봤지만, 발전소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라인에는 문제가 없었다. 알고 보니 마을에 있는 전깃줄들이 전부 다 찢겨 있던 것이다. 피복이 벗겨진 전깃줄은 전기를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 이게 나의 몸 상태였다. 공장이나 조명인 내 근육조직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곳의 전기 신호가 안 가서 못 움직이는 것이다. 무서운 것은 그 전깃줄을 찢은 범인이 마을 사람들 스스로라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더 이상 일하기가 싫었던 걸까? 어떤 면에서는 맞는 것 같다. 지금 나는 몇 달 동안 아주 푹 쉬고 있으니 말이다. 앞으로 내 몸이 다 회복되고 나서도, 내 마을 사람들을 잘 돌아봐야 한다. 평소에 내 몸과 마음을 잘 살펴주면 갑작스러운 '파업'은 하지 않을 거라 믿는다.
길랑바레 증후군 환자들의 증상은 천차만별이다. 어느 공장 전깃줄을 끊겼느냐에 따라 다르다. 팔과 다리가 마비되는 것 이외에도 목 근육 쪽으로 오게 되면 음식을 넘기는 연하 작용이 어려운 경우도 있다. 이때는 관을 삽입하여서 음식을 섭취해야 한다. 또한 가장 위험한 부위가 몸통 쪽이다. 호흡근으로 가는 말초신경 라인이 망가지면 생명이 위태롭고, 소수지만 사망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얼마 전까지도 누우면 갈비뼈 쪽에 불편감이 느껴졌었는데, 아마 몸통 쪽 신경에도 미세하게 진행이 됐었던 것 같다. 다행히 나는 호흡까지 문제가 된 적은 없었지만, 위급한 분들은 인공호흡기를 사용해야 한다. 또 안면 근육이 문제가 되기도 한다. 그러면 말하는 것, 눈 뜨는 것, 밥을 먹기 위해 입을 벌리는 것, 웃는 표정 짓는 것 등에 어려움이 생긴다.
멀쩡하던 신체 부위가 어느 날 갑자기 말을 안 듣게 되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놀랍다는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만큼 황당하다는 의미이다. 지금까지 30년을 지내오면서 '안 움직이는 경험'을 해본 적이 없기에 그 느낌은 매우 생소했다. 가만히 축 처져 있는 팔을 보면, '내가 그동안 팔을 어떻게 움직이고 살았지?', '움직이는 방법을 까먹었나?'라는 의문이 든다. 팔 근육이 움직이기 위해서는 최초로 뇌에서 신호를 보낸다는 것을 알아도 뇌 자체를 어떻게 할 수는 없다. 그동안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해 왔 던 것이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아직 왼손 가운뎃손가락은 움직이지 않는다. 우스꽝스럽지만 가만히 있는 손가락을 바라보며 괜히 머리로 신경 신호를 더 강하게 보낸다고 생각해 본다. 당연히 아무 변화는 없다. 꼼짝 안 하던 팔이 조금씩 움직이며 돌아온 것처럼, 이 손가락도 분명히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지만, 여전히 신기한 느낌인 것은 변함이 없다.
내 상태를 알았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희망을 갖고 재활을 열심히 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처음부터 열심히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제대로 된 재활 운동은 요즘 들어서나 헬스를 다니며 하고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뭔가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재활도 최소한의 어떤 움직임이 가능할 때 하는 느낌이 든다. 실제로 병원에 있는 동안은 치료사분들이 움직이는 대로 마치 인형처럼 팔을 움직이는 것만 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이 도움이 안 된 것은 아니다. 근육을 안 쓰면 굳게 되는데, 그렇게 강제적으로라도 움직이면서 신경이 회복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신경이 하루에 1-2mm가 자란다고 한다. 물리치료사님이 해주신 말씀이었는데 정확한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나에게 어떤 기준점은 만들어 줬다. 대충 30cm 정도로 계산했을 때 300mm이니까 빠르면 150일 이면 다 낫는다는 것이다. 왜 그때 30cm로 계산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팔에 지나가는 신경 라인이 한 개인 것도 아니고, 양팔이 동시에 회복되는지 아닌지도 몰랐다. 논리적이지도, 과학적으로 검증해 보지도 않은 말이었지만 그냥 나는 150일이라는 기준이 필요했던 것 같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150일은 다섯 달 정도인데, 당시에는 무슨 정신이었는지 심지어 세 달이라고 믿고 말하고 다녔었다. 판도라의 상자가 다 열리고 난 후 가장 밑에 희망이 남았다고 하는데, 나에게도 결국엔 희망이 필요했던 것 같다. 다른 임상 사례들을 통한 객관적인 치료시기보다도, '세 달 후면 다 나을 거야, 세 달만 고생하자'라는 희망을 붙잡고 싶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