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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MTD May 15. 2022

입원을 하다


 입원생활은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잘 지나갈 수 있었다. 도움이란 단순한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힘이 되어 주었다. 24시간 동안 상주해야 하는 보호자 역할이 가장 힘들었을 것이다. 입원하기 전에 미리 PCR 검사를 하고 들어와서, 비좁은 간이침대에서 잠을 자며,  삼시 세끼 내 밥을 챙겨서 먹여줘야 하고, 씻기고, 뉘고, 일으키고 등 노동강도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간병인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 흔쾌히 수락해 준 사촌동생 덕에 입원을 결정할 수 있었다. 그동안 사촌 형으로서 무언가 해준 것도 없었는데, 고마운 결정이었다. 이후 시간들은 아버지와, 가까운 친구들이 보호자 역할을 해주며 병원생활을 했다. 불과 4개월 전 일이지만, 지금 생각하면 아득히 먼 일 같이 느껴진다. 아마도 그때 느꼈던 감정과 생각들이 복잡해서인 것 같다.  


  첫날은 여러 가지 검사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근전도 검사를 비롯한 여러 가지 감각 검사를 했다. 근전도 검사는 신경이 어느 부위에서 잘 전달이 되고, 잘 안되는지를 직접 전기를 흘려보내서 확인하는 검사이다. 나는 팔이 가장 심했고, 다리도 진행됐었기 때문에 사지를 다 검사했다. 검사해 주시는 분은 계속해서 '신호가 잘 안 잡히네요'라는 말을 하며 강도를 계속 높였다. 감각신경은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전기 자극은 계속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전기 고문을 당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후에는 철판 같은 곳에 손가락을 올려두고 차가운 느낌이 드는지, 뜨거운 느낌이 드는지 체크하는 검사를 하였다. 손과 발을 다 검사하고서는 '다행히 감각은 정상이네요'라는 말을 하였고, 나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외에도 수차례 피를 뽑아가기도 하였다. 


  여러 가지 검사들을 마치고 병원에서 첫 식사를 하였다. 병원 밥이 맛이 없다고 하는데, 예상보다는 먹을만했다. 당시에 양쪽 팔 모두 들어올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식사 내내 밥을 떠먹여줘야 했다. 사촌동생의 도움으로 밥을 먹었다. 다른 사람에 의해 밥을 먹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같은 반찬이라도 내가 원하는 조합으로, 내가 원하는 속도로, 내가 원하는 양만큼 먹는 게 참 좋은 거구나'. 어떤 때는 국이 맛있으면 두 번, 세 번 퍼먹고 싶다. 조금 짠 반찬을 먹었을 때는 밥을 많이 먹고 싶기도 하다. 물론 그때마다 요청할 수도 있다. 나중에는 '밥 한 숟가락 주고, 반찬 주고, 3초 있다가 국물 두 번 줘', '이 루틴에 반찬은 시계방향으로 바꿔 줘' 와 같은 장난 같으면서 장난 아닌 요청도 했다. 그러나 매번 까탈스럽게 모든 것을 다 말하기는 어렵다. 아주 사소한 하지만, 내가 내 손으로 직접 먹는 기쁨이 있다.


  하루 일과가 다 끝나나 싶었을 무렵 간호사가 왔다. 오늘부터 5일간 '면역글로불린'이라는 약물을 맞을 것이라고 했다. 건강한 성인에게서 뽑아낸 면역체계와 관련된 물질이다. 주변에 누구라도 길랑 바레에 걸린 사람을 알게 된다면 얼른 대학병원에 가서 면역글로불린부터 맞으라 할 것이다. 지금까지 회복되면서 그날만큼 확연한 변화가 있었던 날은 없었다. 작은 유리병에 들은 수액을 새벽까지 자면서 맞았다. 입원 당시에 이곳저곳 움직일 곳은 많은데, 다리가 쉽게 피로를 느끼고 잘 움직이지 않아서 휠체어를 타고 이동했다. 계단을 이용할 때는 필히 누군가가 부축해 줘야 했다. 그러나 수액을 맞은 다음날 일어났을 때 분명히 느껴졌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는 느낌이 달랐다. 어제까지는 분명히 안 좋은 쪽으로 진행된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것은 멈추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이틀, 삼일 시간이 지날수록 확실해졌다. 길랑바레 증후군은 진행기, 유지기, 회복기가 있는데 아마도 나는 면역글로불린의 영향으로 유지기 없이 바로 회복기로 넘어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다시 악화된 적은 없었다.


  병원에서는 다들 10시면 불을 끄고 잠에 든다. 대부분 피곤한 보호자들과 환자들이라 일찍 잠에 드는구나 생각했지만 다음 날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대여섯시부터 병원은 바쁘게 돌아간다. 아마도 간호사 선생님들의 근무교대 시간도 영향이 있는 것 같다. 교대를 하며 환자를 체크하고, 간밤에 별일이 없었는지, 소변줄과 배변 통이 문제없는지, 혈압과 심박수는 괜찮은지 전반적인 것을 확인한다. 환자들의 요구하는 소리와 간호사들의 설명하는 소리로 매우 일찍 하루를 시작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밤에도 일찍 잠에 드는 것이었다. 이튿날부터는 오전에 재활 일정이 잡히어 아침식사를 하고 재활센터로 이동하였다. 


   이동을 하며 걸음걸이에 분명한 변화가 느껴져서 기뻤다. 이전에는 걷기는 해도 질질 끌리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낮은 턱에도 발이 자주 걸리곤 했다. 그러나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 툭툭 차올리는 느낌으로 걸을 수가 있어서 좋았다. 재활은 상체와 손 위주로 하는 작업치료와 전신을 활용하는 물리치료 두 가지를 하였다. 작업치료를 처음 갔을 때 기분이 이상했다. 대부분 나이가 많은 노인분들이셨다. 종이컵 쌓기, 바늘 꿰기, 퍼즐 맞추기 등 소도구들을 이용해서 팔근육을 움직이는 활동을 하고 계셨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 팔이 정상적이었을 때는 '저게 무슨 치료일까' 싶었을 거다. 정상인에게는 그냥 애들 장난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들은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컵을 쌓고, 덜덜덜 떨리는 손으로 퍼즐을 열심히 맞추신다. 그러나 나는 그 애들 장난 같아 보이는 것을 단 한 개도 옮길 수 없었고, 사실 시도조차 할 수 없는 몸 상태였다. '내가 왜 저 어르신들도 하시는 간단한 일을 못할까' 싶었다. 


   치료사가 이것저것 시도해도 손에 힘이 전혀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냥 마사지 정도만 하기로 하였다. 지금 뭔가를 쥐거나, 힘주는 게 전혀 안됐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젊은 분이라 회복이 빠를 것이다, 완쾌한 사람들이 많다' 등 희망적인 말씀을 많이 해주셨다. 그분들은 몸을 치료하는 데도 익숙하지만 위로와 희망을 주는 데도 능숙하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재활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손을 마사지하던 중 치료사님이 말씀하셨다. '오? 생일이시네요!?'  손목의 인식표 팔찌(?)에 있는 생년월일을 보고는 오늘인 것을 확인한 것이다. 갑작스럽게 축하를 받게됐다. 아마 그분이 아니었으면 그해는 육성으로 생일 축하를 못 받았을 것이다. 그러고는 줄 건 없다면서 손에 초코바 하나를 쥐어주셨다. 좋은 위로의 말들과 함께 생일 축하도 해주시고 선물까지 주시니 엄청 감사했다. 그때 손은 집게손가락만 겨우 움직이는 수준이었다. 주머니에 넣어서 가져갈 수도 있었지만, 집게손으로 온 힘을 다해 쥐고 병실까지 무사히 가져갔다. 아마도 그것은 그냥 초코바가 아니라, 회복될 것이란 희망과 회복에 대한 내 의지라고 여겼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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