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집으로 돌아가서 부모님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친구는 나를 다시 자취방까지 데려다주고 귀가하였다. 가만히 앉아 생각을 했다. '팔이 왜 이럴까, 앞으로 어떡하지, 평생이 이렇게 살아야 하면 어쩌지' 수많은 생각들이 나를 덮쳤다. 그럴 때마다 '뇌 문제는 아니잖아, 큰 질병은 아니니까 금방 회복될 거야'라는 생각을 가장 많이 했던 것 같다. 길랑바레 증후군이 어떤 질병인지 잘 몰랐기 때문에 막연한 자기 위로를 했던 것 같다. 부모님께서는 직장에서 양해를 구하고 일찍 나오셨다. 축 늘어진 팔과 겨우 집게손가락만 움직이는 내 모습을 내가 봐도 어처구니가 없는데, 부모님께서는 얼마나 놀라셨을까 싶다. '팔이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말로만 듣는 것과 실제로 움직이지 않는 팔을 보는 것은 많이 다를 것이다. 실제로 내 팔의 모습을 보시고는 서둘러 서울의 응급실로 향했다.
당시에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가 밤 아홉 시에서 열 시 사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응급실 입구에 있는 모니터에는 대기 인원과 예상 대기시간이 있었다. 정확히 몇 명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시간은 '약 8시간'이라고 쓰여있었다. '응급실인데 대기를 8시간이나 하라고?'라는 의문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름 있는 병원인데도, 코로나로 인해 의료진 인력과 병상은 매우 부족했다. 우리가 뉴스를 통해 아는 것보다 실상은 더 어려웠던 것이다. 응급실 문 옆으로는 대기 중인 사람들이 아주 많이 있었다. 대부분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었다. 11월 말의 쌀쌀한 날씨에 휠체어에 앉아 담요를 두르고 기다리는 모습이 참 안쓰러웠다. 앞서 다녀온 병원에서 가져온 mri 결과를 제출하며 우선 접수를 하였다. 놀랍게도 한 시간 가량 지났을 때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응급실로 가는 길에 부모님께서 여기저기 알아보시고 그 병원 어떤 의사 선생님께 미리 전화를 해두신 것 같다. 아마도 그것 때문에 8~9시간이 아닌 1시간 만에 응급실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잘 몰랐지만 병원계에서는 의례적으로 많이 있는 일인 것 같다. 아마도 연락이 닿은 의사 선생님께서 응급실에 연락을 넣어 순서를 앞당겨 주신 것 같다. 말하자면 이것도 '인맥'인 것이다. mri를 찍은 병원에서도 '아마 아시는 선생님이 계시면 좀 더 빨리 봐주실 수 있을 거예요'라고 하긴 했었다. 겉으로 보기에 그다지 '응급환자' 같지 않은 내가 추위에 떨며 차례를 기다리고 계신 어르신들을 제치고 먼저 들어가는 게 마음이 편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들을 지나가는 순간만 그랬을 뿐 '지금은 내 상황만 생각하자' 하며 그리 오래 마음 쓰진 않았다.
들어가서 상황과 증상을 말한 뒤 한참을 기다렸다. 대기하는 곳에서는 보호자는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혼자서 의자에 앉아 있어야 했다. 밤중이었지만 환자, 의사, 간호사 할 것 없이 다들 분주했다. 대기실 모니터에서는 주치의가 누구로 정해지고, mri나 ct 촬영 대기 중, 완료 같은 환자 별 현황들이 송출되고 있었다. 3,40분 간격으로 여러 의사들이 와서 피를 뽑아 가기도 하고, 팔과 다리의 상태를 보고 뭔가를 적어가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다 할 소견이나 앞으로 진행사항에 대한 말 없이 새벽 1시, 2시가 지나갔다. 다음 일정에 대해 물어도 아직 구체적으로 나온 게 없다며 기다리란 말만 하였다. 보호자 대기실은 한 명만 들어올 수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차에서, 아버지는 보호자 대기실 의자에서, 나 또한 눕지도 못하고 불편한 의자에서 피만 계속 뽑히며 4-5시간이 지나간 것이다. 이대로 있다가는 없던 병도 생길 것 같았다. 이곳에서는 지난 병원에서 촬영한 mri를 보고 '이상 없음'이란 소견만 들을 수 있었고, 판독 비로만 수십만 원을 결제했다. 결과적으로 그곳에서는 어떠한 진단도 내리지 못했고, 근전도 검사도 응급실에서는 불가하다는 얘기를 듣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물론 좀 더 기다렸으면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 더 무모해 보였다.
우선 집으로 다시 돌아가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자취방으로 돌아가서 자고, 다음날 다시 병원에 근전도 검사를 위해 방문해 보기로 하였다. 낮에 이미 가장 빠른 다음다음날로 예약을 잡아두었지만, 혹시라도 취소한 사람이 있을까 하고 찾아가 보기로 한 것이다. 하루 종일 검사하고 돌아다녀서 인지 많이 피곤했다. 몸을 뉘고, 바로 눈을 감았다. 피곤해서도 그렇지만, 여느 때처럼 자기 전에 핸드폰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팔을 들어 올릴 수 없으니 누워 있으면 누워있는 대로 밖에 있을 수 없었다. 옆으로 돌아눕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냥 누웠을 때 그 모습 그대로 잠에 들고 깬다. 이것이 정말 다 말할 수 없는 사소한 불편한 점들 중 하나이다. 보통은 잠에 들기까지 편한 자세를 만들기 위해 뒤척인다. 그러나 팔이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서 뒤척임은 의미가 없다. 그나마 움직이는 다리를 이용해서 자세를 고쳐 보려 해도 등 뒤로 옷이 접혀서 불편함만 커진다. 보호자가 눕혀준 채로 가만히 잠에 들길 바라는 게 최선이다.
다음날 병원에 방문했을 때, 근전도 검사는 할 수 없었다. 다만 의사를 다시 만나 몸 상태가 더 악화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팔이 계속 처지다 보니 팔이 빠질 수 있다 하여, 깁스할 때 하는 팔걸이를 하나 구매했다. 의사는 여전히 길랑 바레를 확신하지 못하지만, 소견서를 써줄 테니 대학병원 급으로 가보란 말을 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확한 지식과 함께 많은 임상경험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길랑바레 증후군은 인구 10만 명당 한 명꼴로 발생하는 희귀 질환이기 때문에 많은 의사들이 확신 있게 진단하지는 못했다. 입원하기까지 많은 의사들을 만났는데, 분명하게 진단하는 의사는 별로 없었다. 대부분 '잘은 모르겠지만, 확실하지는 않지만, 급박한 상황이니 얼른 입원해라, 젊은 사람이 큰일이네 얼른 입원해라'와 같이 공포감만 커져가는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물론 그 의사분들은 진심으로 한 말들이겠지만, 나보다 더 당혹스러워하며 급박한 말과 태도를 볼 때 내 마음은 닫혔던 것 같다.
내가 길랑바레 증후군이란 생각도 하였지만, 여기저기 계속해서 수소문하고, 주변 사람들의 추천도 받으며 몇 군데 병원을 더 다녔었다. 양방에서는 위에서와 같은 비슷한 반응들이었다. 아마도 코로나가 아니었으면 그중 어딘가 병원에 바로 입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로 인해 PCR 검사 후 다음날 입원이 가능했기에 일단은 미루게 되었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한의원을 다녀보기로 한 것이다. 조금 거리가 있는 곳의 한의원을 추천받았다. 처음 내 상태를 보고 '얼마 전에도 이런 분 왔었다. 이게 다 백신 부작용인데, 그분은 3일 정도 침 맞고 다 나았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아버지와 나는 그 말을 믿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다른 선택지와는 비교가 안 되는 것이었다. PCR 검사하고, 입원하고, 간병인 구하고 등 복잡한 일들을 하는 것보다 3일만 침 맞고, 아니 일주일이라도 꾸준히 맞으러 올 테니 낫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아침에 아버지와 차를 타고 한 시간 반 정도 거리를 가서 15분 정도 침 맞는 일을 5일 정도 한 것 같다. 우리의 기대에 무색하게도, 팔 근육은 기능을 멈춘 지 오래고 다리까지 마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3일 차부터 호전이 안 되는 것을 보시고 한의사 선생님께서는 다른 양방 병원에 가길 추천하셨지만, 그러기 싫었다. 그냥 첫날 말해준 '금방 나을 것이다'라는 말만 믿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4일, 5일까지 갔었다. 한의사 선생님도 꽤나 난감했을 것이다. 얼마나 부담됐을까 싶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날에는 머리에 침을 하나 안 뽑은 실수를 하시기도 하셨다. 머리에 느낌이 이상하여 다시 들어와 간호사님이 뽑아주시고는, 가는 길에 이제는 오지 말라는 전화를 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재미있는 에피소드이다.
어쨌든 한 병원을 정해서 입원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들이 있었다. 여러 곳에서 만난 의사 선생님들, 한의원을 추천해 주신 분, 한의사 선생님들 누구도 원망스럽거나 아쉽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모두들 나를 위해 진심으로 말해주었고,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준 것이라 생각하여 감사할 뿐이다. 또한 그 병원들을 오가는 과정에서 아버지와의 시간들도 의미 있었다. 20대 초반에는 대학교 기숙사, 군대로 많이 떨어져 지냈었고, 20대 중후반에는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또 멀리 떨어져서 지냈기에 아버지와 단둘이 있을 시간이 많지 않았다. 차에서 이동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들, 그동안 어설프게 알고 있던 우리 집 가정사들, 못다 했던 이야기들을 나누는 좋은 시간들이었다. 물론 어머니와도 그렇다. 이런 부분은 4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20대 때 못한 밀린 숙제와 같은 소통과 대화들을 하고 있다. 그리고 또 입원하게 된 병원 주치의를 만나기 위해서 그 과정들을 겪었나 싶다. 왜냐하면 유일하게 내 주치의만이 백신에 대한 인과성을 인정해 주고 질병청에 이상반응 신고까지 흔쾌히 해주었기 때문이다.
다른 의사 선생님들은 백신에 대한 질문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혹시 이게 백신과 관련이 있을까요?'라는 조심스러운 질문에도, '아이고~ 지금은 그런 거 생각할 때가 아니에요' 혹은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팔이 중요하죠'라며 정확한 답변을 회피했다. 물론 증상을 가진 나로서도 백신에 대한 인과성을 증명해 보라 해도 내가 직접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없다. 평소 약간의 과체중이긴 했지만 운동도 좋아하고 특별히 건강에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백신의 영향이지 않을까라고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백신 이상반응에 대한 국가 차원의 보상 여부를 떠나서, 주치의 선생님의 증상과 질병에 대한 차분한 설명을 듣고 '이분은 믿고 입원할 수 있겠다' 싶었다.
결국 나는 증상이 있고 약 10일 정도 뒤에 입원 치료를 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봤을 때, '조금 더 입원을 빨리해서 치료를 시작했으면 어땠을까, 조금 더 회복이 빨랐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순간들에 대해 후회할 필요는 없다. 그때, 그 순간마다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설령 그때 며칠 혹은 몇 주 만에 금방 정상으로 돌아왔다면, 지금의 이 글들은 없었을 것이다. 팔과 손가락이 자유롭게 움직일 때도 시작하지 못했던 글쓰기를 온전하지 못한 몸 상태로 시작한 것은 분명 '정지'가 주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역설적이게도, 모든 것이 멈췄을 때 비로소 제대로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삶의 모든 부분이 멈췄을 때 월든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그리고 내 삶의 목적과 방향을 다시 설정해야 했다.
서라! 멈춰라! 겉으로는 빠른 척하면서 왜 그리도 느린가?
<월든>_헨리 데이빗 소로우_1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