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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등대 Mar 31. 2023

낙관이 아닌 희망의 논리로 말하는 ‘구원’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더 웨일〉과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체리향기〉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더 웨일〉을 보고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체리향기〉가 자꾸 떠오르는 일은 (적어도 내게는) 필연적이었다. 먼저 두 영화는 모두 곧 죽음을 맞을 사람이 주인공이다. ‘찰리’(〈더 웨일〉)의 예정된 죽음은 병으로 인한 것이고 ‘바디’(〈체리향기〉)의 예정된 죽음은 자의로 인한 것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찰리 역시 병을 고치고자 하는 의지가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바디와 완전히 다른 입장이라고 할 수는 없다. 또한 두 영화에는 이러한 주인공을 구하고자 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더 웨일〉에서는 ‘리즈’와 ‘토마스’가 그런 인물이다. 간호사이자 찰리의 친구인 리즈는 찰리에게 입원을 설득하려 애쓰고 설득에 실패하고 나서도 최대한 찰리의 생명을 연명할 수 있는 여러 의료 대책을 시도하는 등 찰리의 현실적, 물리적 구원을 위해 애쓴다. 반면 토마스는 선교사로서 찰리에게 계속해서 복음을 설파하고자 하며 찰리의 영혼적 구원을 위해 애쓴다. 〈체리향기〉에서는 바디가 마지막으로 만난 노인 ‘바그헤리’가 그런 인물이다. 바디는 오늘 밤 수면제를 먹고 누울 자신의 몸 위에 흙을 덮어줄 사람을 찾아 나서지만 모두가 거절하던 가운데 바그헤리를 마지막으로 만난다. 바그헤리는 자식의 병을 고치기 위해 돈이 필요했으므로 바디의 제안을 수락하지만 동시에 바디의 마음을 돌리고자 애쓴다. 자신도 과거에 자살을 하려 했던 적이 있었다며 그때를 솔직하게 이야기하면서 바디를 붙잡는다.


그런데 이미 죽음이 임박한 사람에게 구원이라는 것이 가능할까. 아니, “누가 누구를 구원할 수는 없는 거야.“라던 리즈의 말마따나 구원은 사실 애초에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찰리와 바디는 구원받지 않았다. 찰리는 끝까지 입원을 거절하며 주말이면 죽음을 맞을 시한부 인생을 받아들이고 선교사 토마스에게 구원에 관심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바디는 바그헤리의 감동적인 말들에도 불구하고 자살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고 바그헤리에게 재차 자신의 제안을 당부한다. 그리고 그들은 어떤 결말을 맞이하였나. 바디는 그날 밤, 결국 수면제를 먹고 구덩이 안에 몸을 뉘었고 그렇게 화면은 어두워졌다. 찰리의 경우, 찰리에 대한 리즈의 마지막 대사가 ‘아래층에 있을게.’였고 이와 달리 찰리의 마지막 시선과 몸은 먼 하늘을 향하였으며 그렇게 화면이 하얗게 부서진 채 영화가 끝난 것은 꽤 직접적인 은유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 이 두 영화는 결국 구원의 본질적 실패성을 말하는 영화인 것일까? 아니다. 그렇지만 구원에의 낙관을 말하는 영화도 아니다. 이 영화들은 구원에의 ‘희망’을 말하는 영화다. ‘낙관’과 ‘희망’의 차이는 무엇인가. 낙관의 논리는 ‘언제나 가능하다’는 것이고 희망의 논리는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 그러니까 이 영화들은 구원이란 언제나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고 간절히 이야기하는 영화다.


사실 이 두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은 주인공들의 실질적 결말이 아니다. 〈더 웨일〉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은 찰리의 딸 ‘엘리’라는 인물의 존재일 것이다. 엘리는 부정적이고 까칠하고 직설적인 성격 탓에 ‘사악하다’는 평까지 받는 아이다. 엘리의 날 선 발언과 행동들은 실제로 아슬아슬해 보인다. 엘리는 어느 날 선교사 토마스가 마약을 하는 장면, 교단의 돈을 훔친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는 목소리 등을 촬영 및 녹음하여 토마스의 부모님에게 전송해 버린다. 그런데 뜻밖에도 토마스는 그 일로 인해 자신의 가족들에게 돌아갈 수 있게 된다. 토마스의 가족들이 토마스의 솔직한 현실을 보고 마음을 돌린 것이다. 엘리가 의도한 바가 정말 토마스를 구하는 것이었는지 아니면 그 반대였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엘리는 토마스를, ‘구했다‘. 그리고 엘리는 어쩌면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찰리는 숨이 가빠지는 증상이 찾아올 때마다, 즉 죽음이 올 것만 같은 일촉즉발의 순간마다 한 에세이를 다급히 읽는다. 그 이유는 이러하다. 지금이 자신의 마지막 순간이라면 그 에세이를 마지막으로 읽고 싶기 때문이고 그렇게나 그 에세이를 좋아하다 보니 그 에세이를 읽는 것이 증상을 잠재우는 데에 도움이 되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영화의 거의 마지막 장면에서, 찰리가 매일같이 읽던 그 에세이는 다름 아닌 딸 엘리가 쓴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는 엘리에 대한 찰리의 사랑을 깊이 체감하게 만드는 설정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고래에 대한 묘사만 잔뜩 있는 챕터가 특히 슬펐다.
그건 자신의 넋두리에 지친 독자들을 위한 배려이기 때문이다.

- 엘리의 에세이 중


찰리가 학생들에게 내내 강조한 에세이의 ‘진솔함’은 곧 자신만의 시선을 갖는 것에 다름 아니다. ‘진솔하다‘의 사전적 정의는 ’진실하고 솔직하다‘이고 ’진실하다‘의 정의는 ‘마음에 거짓이 없이 순수하고 바르다’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시선을 왜곡하지 않고 똑바로 쓰는 것이 진솔한 것이고 그것이 곧 자신만의 고유한 시선이다. 그리고, 그것이 곧 진정한 에세이다. 엘리는 자신만의 시선이 확고하다. 김인환 문학평론가는 『의미의 위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작가는 누구에게서나 상처를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원효나 퇴계, 아리스토텔레스나 하이데거의 책을 읽으면서도 거기서 그들의 상처를 읽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엘리는 그 길고 지루한 『모비딕』에서, 그것도 가장 길고 지루한 고래 묘사 부분에서도 슬픔을 찾아낸 사람이다. 장황한 고래 묘사에서 슬픔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 것인가. 그러니 엘리는 탁월한, 특히나 슬픔에 탁월한 에세이스트인 것이다. 찰리는 누구나 타인에게 완전히 무관심할 수는 없는 법이라고 말한다. 엘리는 이 세상에 대해, 사람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지만 결코 무관심하지 않다. 엘리는 찰리에게 온갖 날카로움을 쏟아내면서도 꼬박꼬박 찰리를 찾아왔다. 토마스의 부모님의 연락처와 주소를 겨우겨우 찾아내어 사진과 녹음 파일을 굳이 굳이 보냈다. 말하자면 애증이고 그것이 엘리만의 관심이다. 이러한 엘리의 관심이 좀 더 짙어진다면, 엘리 스스로 자기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에세이스트인지를 깨닫는다면, 엘리의 에세이가, 나아가 엘리라는 사람이 타인을 구원할 가능성은 더욱 높아질 수 있지 않을까. 찰리는 그것을 알고 엘리에게 말한 것이다. 이 에세이는 자신이 읽은 최고의 에세이라고. 네가 얼마나 놀라운 사람인지 알려주고 싶었다고.




제가 결혼한 직후였어요. 온갖 어려움이 산적해 있었죠. 난 너무 지쳐 끝장을 보기로 마음먹었어요. 어느 날 새벽 동이 트기 전에 차에 밧줄을 실었어요. 난 자살하기로 굳게 마음먹었죠. 난 체리 나무 농장에 도착했어요. 그곳에 도착했을 때까지도 해가 뜨지 않았죠. 난 나무에 밧줄을 던졌지만 걸리지가 않았어요. 계속해서 던졌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그래서 난 나무 위로 올라가 밧줄을 단단히 동여맸어요.

​그때 내 손에 뭔가 부드러운 게 만져졌어요. 체리였죠. 탐스럽게 익은 체리였어요. 전 그걸 하나 먹었죠. 과즙이 가득한 체리였어요. 그리곤 두 개, 세 개를 먹었어요. 그때 산등성이에 태양이 떠올랐어요. 정말 장엄한 광경이었죠. 그리곤 갑자기 학교에 가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렸어요. 그 애들은 가다 말고 서서 날 쳐다보더니 나무를 흔들어 달라고 했어요. 체리가 떨어지자 애들이 주워 먹었죠. 그러곤 체리를 주워 집으로 향했어요. 아내는 그때까지도 자고 있더군요. 잠에서 깨어나 그녀도 체리를 먹었어요. 아주 맛있게 먹더군요. 난 자살을 하러 떠났지만 체리를 갖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 바그헤리의 대사


바그헤리의 이야기를 듣고도 바디는 자신의 제안을 다시 한번 당부한 채 바그헤리와 헤어진다. 이후 바디는 홀로 운동장을 뛰어노는 아이들의 재잘거림을 듣다가, 해 질 녘의 아름다운 하늘을 보다가, 갑자기 다시 노인에게 뛰어간다. 그리고는 노인에게 다시 한번 약속을 당부하면서 말한다. 혹시나 자신이 살아있을지도 모르니까 꼭 돌을 두 번 던져 달라고. 그러니까 바디에게는 바그헤리의 이야기가,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해 질 녘 하늘이, ‘체리’였던 것이다. 바디는 체리향기에 흔들렸다. 이 영화의 방점은 여기에 있다. 그렇지만 이 영화는 결국 바디가 스스로를 죽이는 것으로 끝났으니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을 수 있다. 그러나 바디의 결말은 ‘영화 속‘에서의 결말일 뿐이다. 영화 속 주인공은 결국 죽었다고 하더라도, 이 영화를 보는 당신은, 적어도 아직은, 아니다. 이 영화는 당신이 ’적어도‘ 흔들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바디는 바그헤리의 따스한 말을 듣고 마음을 다잡아 행복하게 살았답니다’와 같은 뻔한 결말을 지우고, 그러나 그 뻔한 결말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만들어졌다. 그러한 마음을 당신은 보았다. 당신의 결말은 당신 몫이겠으나 어쨌든 이 영화의 마음은 그렇다.


그러니까 〈더 웨일〉과 〈체리향기〉는 언제나 가능하지는 않지만 실낱같은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구원’을 보여주는 영화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구원’이라고 줄여야 할까. 나 역시 여전히 구원이라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만날 때마다, 이런 이야기들이 가지고 있는 간절한 염원을 마주할 때마다, 그 회의감에 조금씩 구멍이 나기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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