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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등대 Mar 07. 2024

가여운 것들은 가여움의 힘으로 다시

영화 <가여운 것들 Poor Things>, 요르고스 란티모스

*스포일러가 가득합니다.

*영화도 평론도 잘 모릅니다. 그저 ‘이야기’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을 씁니다.








첫 장면은 파랑으로 가득하다. 이 영화는 파랑으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다. 어둡고 푸른 배경에 서 있는 푸른 드레스의 그녀는 제 삶의 파랑(Blue)을 어찌하지 못하고 있다. 그녀는 죽어가고 있는 물고기를 내려다본다. 영화의 말미에 다시 만난 그녀의 남편의 말대로, 그녀는 물고기를 보다가 죽은 게 맞다. 다만 남편의 말처럼 그녀가 물고기를 ‘구경’하다가 헛발질을 한 것이 아니다. 그녀는 물고기에게서 자신을 본 것이다. 숨이 막혀 죽어가는 물고기에게서. 그리하여 그녀는 투신한 것이다. 그녀는 죽음이라는 방법 외에는 도저히 자유로워질 방법이 없었다. 한 의사가 투신한 그녀의 몸을 발견했고, 그녀의 몸이 완전히 죽은 게 아니라는 사실도 발견했으나 의사는 그녀를 살리지 않기로 결심한다. 삶이 힘들어 몸을 던진 자를 다시 살려내는 건 잔인한 일이다, 기독교 국가에서 자살은 죄악시되기에 그녀가 다시 살아나면 엄벌에 처해질 것이다,라고 하지만 다 변명에 불과하다. 그는 연민 따위 없는 의사이므로. 의사는 그저 그녀의 몸으로 실험을 해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하여 의사는 그녀의 뱃속에 있던 아이의 뇌를 그녀의 몸에 이식한다. 그렇게, 갓윈 백스터(의사, 윌렘 데포)의 손으로 벨라 백스터(엠마 스톤)가 태어난다.


다시 태어난 벨라는 또다시 갇힌 채 살아간다. 갓윈은 완벽한 실험을 위해 벨라를 외부로부터 차단한 채 키우고(실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벨라는 어린아이 같다. 말하는 것도, 몸을 잘 가누지 못하고 뒤뚱뒤뚱 걷는 모양도 아이 같다. 단순히 뇌의 성장이 더뎌서만이 아니라 벨라를 아이처럼 대하는 갓윈과 그가 위험하다며 가둬놓은 바운더리 때문이기도 하지 않을까. 그러나 벨라는 더 넓은 세상으로의 탐험을 강하게 원한다. 우연히 갓윈의 집에 들른 던컨(마크 러팔로)은 그런 벨라의 욕구를 알아보고 더 넓은 세상으로 가자며 함께 여행을 떠난다. 그렇게 던컨은 자유에 대한 벨라의 욕구를 충족해 주는 척,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시작한다. 던컨에게 벨라는 갓 성적 쾌락에 눈을 뜬 백치였고 그래서 쉬워 보였으리라. 게다가 예쁘기까지 하니까, 더 좋다고 생각했으리라. 그러나 벨라는 던컨의 허를 여러 방면으로 찌른다. 벨라의 직관적인 어법과 자유로운 성생활은 ‘상류 사회’의 예법 따위 가볍게 짓밟는다. 던컨은 그런 벨라의 모습에 학을 떼며 벨라를 제 곁에 얌전히 있는 예쁜 여자로 두고 싶어 하지만 어림없다. 던컨은 무도회장에서 거칠게 춤추는 벨라를 어떻게든 붙잡으려 하지만, 쉽지 않다.


그리하여 던컨은 벨라를 데리고 크루즈에 오른다. 이번에는 벨라가 망망대해 위에 갇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벨라는 그곳에서 중요한 친구들을 만난다. 인자한 마르타 부인은 벨라에게 책을 건네주었고 염세적인 해리는 벨라에게 현실을 보여주었다. 책은 벨라의 사고 및 언어 능력에 큰 영향을 끼치고 현실은 벨라로 하여금 세계의 잔혹함을 깨닫게 만든다. 그러나 세상의 잔혹함을 마주하고 염세주의자가 된 지 오래인 해리와 달리 벨라는 죽어가는 가난한 아이들을 보고 전 재산을 그러모아 아이들에게 건네주려 한다. 그러니까, 벨라는 세상의 잔인한 민낯을 보고도 염세주의자가 되지 않았다.


전 재산을 탕진하고 파리에 내린 벨라는 매음굴에 취직한다. 냄새나고 별 변태적인 취향을 가진 남자들을 매일 상대하면서도, 벨라는 그리 치욕스러워하지 않는다. 심지어 벨라는 처음으로 맡게 된 남자의 잠자리 기술이 별로라서 웃음이 나는 걸 참곤 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벨라가 좋아하는 섹스를 마음껏, 게다가 돈을 받고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을까? 그보다는 벨라가 어느 정도 데카당의 면모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데카당(퇴폐주의자)은 창부에게 깊은 연대감을 느끼는데 그 이유는 이러하다. “창부는 격정의 와중에서도 냉정하고, 언제나 자기가 도발시킨 쾌락의 초연한 관객이며, 남들이 황홀해서 도취에 빠질 때에도 그녀는 고독과 냉담을 느낀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벨라는 격정 중에 있으면서도 격정과 한 발짝 떨어진 관객이었다. 초연하고 또렷한 관객. 물론 벨라라고 늘 초연할 수는 없었으리라. 그러나 치욕과 울분까지도, 벨라는 모두 받아들였다. 세계의 어두운 면면들을 모두 삼켜냈다. 맛없는 음식은 바로 뱉어버리던 예전과는 다르게. 그럼에도 여전히, 벨라는 염세주의자가 되지 않았다. 매음굴의 주인과 같은 허무주의자가 되지도 않았다.


갓윈의 임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벨라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벨라는 자신의 탄생의 비밀을 모두 알게 된다. 벨라는 ‘하느님’이라 부르며 아버지로 따르던 갓윈에게 실망하지만 화를 내지는 않는다. 벨라는 어느새 다 큰 채다. 세상의 어두운 면면들을 모두 목격하고 삼켜낸 결과, 벨라는 이제 혀 짧은 소리를 내지도, 뒤뚱대며 걷지도 않는다. 갓윈의 말마따나, 그런 벨라를 낳은 것(만든 것)은 갓윈이 아니라 벨라 자신이다. 벨라는 자기 자신이 곧 자식이고 엄마니까. (남자에 의해) 갇힌 삶을 뿌리친 것도, 뿌리치고 나온 곳에도 천국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것도, 잔혹한 세상의 진실을 먹으며 온전히 자라난 것도 다 벨라의 선택이었으니까.


벨라와 맥스의 결혼식에서 영화가 끝날 줄 알았으나, 지긋지긋하게 쫓아온 남자들로 인해 영화는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녀‘이던 시절의 남편이 찾아와 벨라를 다시 집에 가두고자 하면서 한바탕 씨름이 이어진다. 그냥 결혼식에서 끝났더라면 좋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지난한 싸움을 보며 문득 깨달았다. 벨라가 남자들의 속박에서 벗어나기까지 이리도 긴 시간이 필요했구나. 죽어야 했고 다시 태어나야 했고 그걸로도 부족해 온갖 슬픔과 치욕과 세상의 잔혹함을 몸소 배워야만 했구나. 한 여성의 온전한 자유에는 이리도 긴 투쟁이 필요하구나. 그리고 그 지난하고 가여운 투쟁 속에서도 감정을, 따뜻함을 잃지 않은 벨라가 너무도 눈부셨다. 생각해 보면 벨라는 갓윈이 ‘poor’(가여운, 불쌍한)이라는 감정을 모르는 사람이었기에 태어날 수 있었다. 죽은 엄마의 뱃속 아이의 뇌를 엄마의 머리에 넣어 소생시키는 비도덕적인 행동은 갓윈이 무감한 사람이었기에 가능했으니까. 그러나 벨라는 ‘poor’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 태어날 수 있었다. 더운 땅 위에서 무더기로 죽은 아이들을 보며 세상을 잃은 듯 울었기 때문에. 그 울음 덕에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되었고 그리하여 치열하게 배웠고 그만큼 자라게 되었으니까.


벨라의 생은 분명 가엾다. 폭력적인 남편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죽음을 택했고 제 의지와 상관없이 다시 살아나고, 다시 살아 나서도 몇 번이나 갇히고 모욕당하며 세상의 쓴 맛이란 쓴 맛은 다 경험해 온 삶. 그러나 가여운 벨라는, 그 가여움의 힘으로 다시 한번 문을 열어젖혔다. 벨라는 의사가 되고자 한다. 벨라의 병원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 정원을 닮았으리라. 벨라가 꿈꾸던 새로운 세상의 현현 같은 그 정원. 이 정원에는 더 이상 파랑이 없다. 유일하게 파란 드레스를 입은 가여운 리틀-벨라는 어떻게 될까. 벨라처럼 가여움을 힘으로 일어나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나가리라고 확신하는 건 내가 목격한 벨라의 아름다운 생애 덕분이다. 벨라는 자신의 이름처럼 아름다운 생애를 스스로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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