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우리들의 욕구
뭐라도 먹고 싶을 때 입이 심심하다고들 한다. 냉장고를 괜히 열고 간식 통을 뒤적거리는 마냥 나는 뭐라도 글이 쓰고 싶을 때면 노트북을 열고 블로그를 배회한다. 이런 건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손이 심심하다, 블로그가 심심하다, 내가 심심하다…. 다 아닌 것 같은데.
뭐라도 쓰고 싶어 써 내린 글은 대게 공개적으로 발행하지 못한다. 너무 솔직했거나 아젠다 없는 글을 누가 읽겠냐는 이유에서다. 쓰는 것 좋지, 근데 굳이 타인에게 보여야 할까 명분이 희미해 노트북 대신 노트를 편다. 거기에선 발행 여부를 결정할 필요가 없다. 연필로 술술 써 내려가면 그만이다. 하지만 나만 간직하는 식으로는 쓰고 싶은 마음이 해소되지 않아. 그러니 이미 쓰고 있으면서도 쓰고 싶은 마음은, 쓰지 않은 글, 즉 남이 보는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겠다.
‘어쩌면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아주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의 한 구절이다. 연인 간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의 <불안>에서 이 구절의 의미는 확장된다. 주장을 조합하면 사람은 사랑에 관한 두 가지 결핍을 타고난다. 첫 번째는 연애적 사랑, 두 번째는 세상에게 받는 사랑이다.
인정 욕구와는 사뭇 다르다. 글쓰기로 발현되는 존재와 사랑에 대한 욕구는, 잘하고 싶음보다 선행하는 어떤 충동에 가깝다. 인정욕구 때문이라기엔 온라인상에서 글을 쓰는 이들은 저마다 무르고 상처 난 부분을 불쑥 드러낸다. 훌륭함이나 영향력은 개의치 않는 모양의 글. 물론 이후에 공감과 위로를 주고받을 순 있지만 그런 것들이 따라오지 않는다 해도 이들은 쓰기를 계속하지 않을까?
관심에 비해 잘 알지 못하는 양자역학 그리고 동양철학에서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전자에선 누군가의 관측이 우리 존재를 가능케 하고, 후자에서 인간은 세상 만물과 얽혀 정의 내려진다고 했던가. 진리에 의하면 우리는 존재하고 싶은 것이다. 그저 세상에 존재하고 싶어 관측자를 찾아 나서는 게로구나. 글을 쓰는 이가 자꾸만 노트북을 펼쳐들고 다른 이를 기웃거리는 건,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섭리구나.
그러므로 관측자를 요구하는 건 자신이 어딘가 부족해서가 아니라고, 어떤 욕구로 비칠지 경계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마음껏 존재 욕구를 표현해도 좋다고, 당신이 가진 생각을 꺼내어 세상에 존재하게 만들어 달라고. 세상은 우리가 타인의 관측을 필요로 하는 존재인 덕에 서로에게서 사랑을 메꾸며 굴러갈지도 모른다고.
그런 생각을 하며 오늘은 글을 발행하고야 말겠다고 마음먹었다. 내가 그러하듯 보여지는 글과 자신만 보는 글의 간극에서 헤매는 누군가에게 닿을지도 모르니까. 기꺼이 한 명의 관측자가 될 준비를 하며 발행하는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