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체적 이해와 단편적 판단
주식은 내게 있어 약점을 희석해주는 좋은 수단이다. 지금보다 객기로웠던 시절, 나더러 이상주의적이라는 말이 그렇게 듣기 싫었다. 이상주의가 언급되는 순간은 대체로 '네가 꿈꾸는 그런 세상은 일어나지 않아'라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실현 가능성을 떠나서 공통의 방향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반문을 펼치기도 했는데 언제부턴간 모두가 그런 걸 안고 살아가진 않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 오케이. 그럼 나라도. 나는 내 세상 만들어야지. 잘 사는 모습을 보이고, 고집대로 살아가는 건 자존심이 걸린 일이었다.
자존심을 지키려면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에서 잘 살아야 했다. 현실적인 문제는 수입이었다. 수입이 있어야, 정확히는 모은 돈이 많아야 햄버거를 좋아한단 이유로 햄버거집에서 일을 하고 비취직 상태로 여행도 다닐 것 아닌가. 보장되지 않는 미래의 에어백. 좋아하는 일을 선택해서 살아가는 상태를 지속하려면 이상주의자가 생각해도 현실적인 준비물은 그것이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현실 감각은 내게 취약점이었으며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었다.
주식은 우연히 시작했다. 그러고도 몇 해가 지나 주식이 내 기질을 보완해 줄지도 모른단 가능성을 봤다. 스스로 주식투자자라고 이름 붙인 후로는 예전 같은 피드백을 듣지 않는다. 국제 정세까진 아니어도 나와 주변에 영향을 미칠 무언가, 이를테면 둥지틀고 살아갈 집을 가지는 전략이라던가 물가상승률을 이길거라 믿고 맡길 돼지저금통은 갖고 있으니까. 현실감각이 전보다 키워졌다. 하지만 사람들과 마주하다 보면 여전히 나는 꿈속에 살구나 싶기도. 처음 만난 사람에게 나를 주식투자자라고 소개한다면 그에 따라오는 이미지는 또 뻔하기도.
사람은 수많은 면면이 이어져서 입체가 되므로 양면성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빠르게 지나가는 순간에는 상대로부터 입체로 투시되기 보단 단편으로 판단되어진다. 판단하지 않으려는 노력에도 어쩔 수 없는 판단이 깃들어 있다. 그 점은 때와 상대에 따라 개인적 스토리의 오픈영역을 구분짓게 하고, 마찬가지로 타인의 미공개 이야기를 궁금케 한다.
흔치 않게 이해하고 싶은 사람을 만난다. 그럴 때 그사람의 인생 타임라인 중 현재 이야기만으론 갈증을 느끼는 까닭이기도 하다.
여하튼 이제 나는 이상적이거나 현실적이거나 무엇도 아니라 그냥 삶을 만들어갈 뿐이다. 과거 부렸던 객기나 자존심 따위 덕에 원하는 삶이 구체화됨은 다행스럽고.. 주변인 모두 나를 응원하는 사람인데 나는 무엇에 그렇게 저항하고 인정받으려 애썼나-이건 현재진행형- 생각이 드는 건 슬프기도. 사실은 그렇게도 날 못살게 굴었던 목소리가 내면의 나라는 사실에 씁쓸했다가, 타인이 아니라 나라서, 답이 나에게 있음에 안도의 한숨을 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