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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Feb 06. 2024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틈이 있는 이유는 그 사이로 빛이 새나오기 때문일지도 몰라

  갈라진 틈새마다 빛이 새나온다. 그 틈으로 바람 역시 드나들 수 있다. 누군가에겐 옥의 티처럼 느껴질 그 균열이 나에게는 숨구멍 같았다. 뛰지 않아도 금방 숨이 차서 크게 몰아쉬던 심호흡이 덕분에 차차 가라앉아 새근새근 숨 쉴 수 있었다. 아주 어둔 곳에서도 '이게 다가 아니다'라고 믿게 만드는. 이번 신간에서도 역시 최은영 작가님에게 사랑은 '애쓰지 않아도' 드러나는 것이고, '밝은 밤'을 나누는 자들의 것이다.

  단편 속 인물들 저마다의 틈에서 자주 빛을 봤고 덕분에 환했다. 최은영 작가님 단품 속 인물들은 차가운 눈을 함께 맡다가도 어느 때보다 찬란한 빛을 나눈다. 그 빛은 앞서 걸어간 등불일 수도, 카풀 드라이브에서 함께 대화하던 시간일 수도, 바라보는 눈빛일 수도 있다. 내리는 눈을 그치게 하는 방법 같은 건 잘 모르겠다. 눈이 내린 길을 함께 걷거나 걷는 당신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오래 눈길을 주는 것만이 우리의 몫.

  나도, 더 가보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어쩌면 그때의 나는 막연하게나마 그녀를 따라가고 싶었던 것 같다. 나와 닮은 누군가가 등불을 들고 내 앞에서 걸어주고, 내가 발을 디딜 곳이 허공이 아니라는 사실만이라도 알려주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나아갈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빛, 그런 빛을 좇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 빛을 다른 사람이 아닌 그녀에게서 보고 싶었다. 그 빛이 사라진 후, 나는 아직 더듬거리며 내가 어디까지 왔는지 어림해보곤 한다. 그리고 어디로 가게 될 것인지도. 나는 그녀가 갔던 곳까지는 온 걸까. 아직 다다르지 않았나.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에도 그토록 조급하게 사람들을 몰아내고 건물을 부수었던 자리는 공터로 남아 있었다. 내가 늦깎이 대학생에서 대학원생으로, 시간강사로 나아가는 동안, 빛나던 젊은 강사였던 그녀가 더이상 내가 찾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동안에도 그곳은 여전히 빈터였다. 나는 이제 그곳을 피해 지나가지 않는다. 건물을 부수고 사람들을 내쫓느라 그렇게도 분하고 그렇게도 가혹했던 마음이 어디로 가지 않고 여전히 이곳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바라보면서.
_44,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다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팔에 가만히 자기 손을 올려놓았다. 그런 다희를 보며, 그녀는 왜 자신이 팔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의 일들을 떠올리곤 하는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다희와 주고받던 이야기들 속에서만 제 모습을 드러내던 마음이 있었으니까. 아무리 누추한 마음이라 하더라도 서로를 마주볼 때면 더는 누추한 채로만 남지 않았으니까. 그때, 둘의 이야기들은 서로를 비췄다. 다희에게도 그 시간이 조금이나마 빛이 되어주었기를 그녀는 잠잠히 바랐다.
_123, 일 년
  옛날 사람들은 하늘 위에 하늘나라가 있다고 생각했다. 밤하늘의 별빛들을 보고 하늘에 구멍을 뚫어 지상의 인간들을 바라보는 저 너머 누군가의 눈빛이라고 믿기도 했다. 그들에게 별빛은 신의 눈빛이거나 더는 만날 수 없는 사랑하는 존재들의 시선이었다.
  밤 비행을 할 때면, 검은 하늘을 날아가고 있을 때면 나는 종종 멀리서 나를 바라보는 이모를 느낀다. 이모의 시선은 조종실 너머에, 비행기 너머에, 밤하늘과 대기 너머에 있다. 희박한 공기와 낮은 온도, 여러 층을 오라가면 결국 사라지는 대기와 우주공간의 시작. 내가 아는 하늘은 그런 것이지만, 그런 순간에 나는 문득 옛날 사람들의 믿음을 떠올린다. 환한 낮이 아니라 어두운 밤에만 지상에 닿는 저 너머의 눈빛이 있다는 믿음을 말이다.
_265, 이모에게



   신기하다. 서로가 아니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로 자주 다치고 아프다가도 서로의 자랑이 되어 어디로든 더 나아가게 만든다. 김애란 작가님께서 "네가 나의 슬픔이라 기쁘다, 나는"라는 슬픔 같은 기쁨을 알게 해주셨다면, 최진영 작가님께서는 자신의 존재가 누군가의 자랑이라는 무거움과 심지어 때로 그 사람의 눈에 비친 스스로가 부끄러워지기도 하는 그럼에도 나를 살아가게 하는 어쩌면 믿음 같은 자랑을 가르쳐주셨다.

  몇 년 후 마침내 그녀가 첫 단막극으로 입봉했을 때, 그는 '작가 이민주'라고 쓰인 드라마 오프닝 장면을 캡처해서 한지 가게에 표구해 걸어뒀다. 좁은 빈 벽에 있던 시계를 떼고 그 자리에 액자를 걸어둔 거였다. 왜 그런 걸 걸어뒀냐고, 당장 치우라고 타박하면서도 그녀는 그의 마음에 눈물이 났다. 그는 어떤 것도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싫어했고, 과시와도 거리가 멀었다. 그런 그가 남들에게 그녀를 자랑하고 있었다. 내 동생이 이토록 멋진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어 어쩔 줄 몰라했다. 그녀가 무슨 대단한 작가라도 된 것처럼, 특별한 사랑이라도 된 것처럼.
_201, 파종
  "처음에 네가 군인 된다고 들었을 때 중간에 관둘 줄 알았다. 네가 마음이 여리잖아."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 해."
  "너 어릴 땐 네 마음 여린 게 그렇게 불안해서 고치려고 했어."
  "그럼 성공했네. 나, 마음이 돌이 됐거든."
  예보에 없던 눈이 내리기 시작해서 나는 와이퍼를 켜고 속도를 줄였다.
  "오늘 널 보니까 알겠더라. 천성은 고칠 수가 없는 거야. 그런데도 잘 살 수 있는 거야. 아무나 비행기 모나. 그것도 미국까지. 대단한 일이지."
  이모가 용기를 내서 말하고 있다는 걸 나는 알았다. 이모는 칭찬하는 법을 몰랐으니까. 이모가 남들 앞에서 나를 자랑한 적은 있지만 내게 직접 칭찬을 해준 적은 거의 없었다. 엄마나 아빠가 사람들 앞에서 겸손의 표시로 나를 깎아내릴 때면 이모는 필사적으로 내 장점을 이야기하곤 했다. 그래서 나는 이모의 마음을 알았다. 이모가 사실은 나를 자랑스러워하고 대견해한다는 걸. 직접적인 칭찬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전해지는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이모가 그렇게 말하자 목이 메었다.
_254, 이모에게
  "부끄러워요?"
  기남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한동안 마이클을 가만히 바라보다 기남이 입을 열었다.
  "……잘 못 들었어. 다시 말해줘."
  "부끄럽냐고 물어봤어요. 할머니, 부끄러워요?"
  기남은 아무 말 없이 마이클을 품에 안았다. 아이에게서 시큼한 땀 냄새가 났다.
  "……응. 그런가봐."
  그렇게 대답하고 기남은 불현듯 이해할 수 있었다. 부끄러움. 마이클의 말이 맞았다. 기남은 부끄러웠다. 우경의 눈에 비칠 자신의 모습이, 그애가 오래전 자신을 멀리 떠난 일이, 진경의 알코올중독이, 두 아이가 결국 화해하지 못하고 지금에 이른 사실이…… 기남은 부끄러웠다. 남편에게 단 한 번도 맞서지 못하고 살았던 시간이, 그런 모습을 아이들이 보고 자란 것이…… 기남은 부끄러웠다. 부모에게 단 한순간도 사랑받지 못했던 자신의 존재가, 하지만 그 사랑을 끝내 희망했던 마음이…… 기남은 이 모든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다. 부끄러워서. 기남은 죽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다.
  "할머니."
  기남의 품에서 나온 마이클이 기남의 무릎 위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부끄러워도 돼요. 부끄러운 건 귀여워요. 에밀리가 그랬어요."
_318,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유독 마음에 걸리는 단편이 있다면 역시 <일 년>. 내가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어느 가사처럼 '난 한 치 앞을' 본다. 시력만 근시인 줄 알았더니 사는 게 근시다. 도대체가 내다볼 줄을 모르고. 그래서 이 단편 읽으면서도 멀리 나서지 않고, 내 한 치 앞 사람들을 자주 떠올렸다.

  일몰 전후의 대교는 아름다웠다. 대교에 달린 전구와 중간중간 세워진 가로등의 불빛이 때로는 붉은빛으로, 때로는 보랏빛으로 물든 하늘 아래에 길을 냈다. 해가 완전히 지고 멀리 이어진 대교를 볼 대면 자동차들이 허공 위를 달리는 것 같았다. 하늘을 나는 자동차. 어릴 때 그녀는 하늘을 나는 자동차가 발명될 미래에 대해 들었다. 그때 그녀는 하늘은 구름과 새의 집이 되어야 한다고, 그렇게 어지러운 장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녀는 완성된 풍력발전기가 그 많은 이점에도 불구하고 하늘을 나는 새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도살 기계가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_91, 일 년

  하늘을 나는 자동차를 떠올릴 때 구름과 새의 집을 걱정하는 사람을 보면서 몽골에서 사다준 낙타 인형을 보자 마자 고삐부터 풀어주던 친구 Y가 떠올랐다. 내 고삐가 풀린 것도 아닌데 왜 내가 눈물이 나나 몰라.


  너 같은 사람들 때문에 이렇게 늙었다, 왜! 이…… 씨발년아.
  그 말을 하고 그녀는 작게 웃었다.
  그때 할머니 모습이 잊히질 않아요. 말로 일격을 가하고 싶으면서도 겁먹은 게 제 눈에는 보였거든요. 씨발년아, 라고 할 때는 목소리가 작아지면서 꼭 울 것 같았어요. 욕도 못하는 사람이 최대치의 욕을 한 거죠. 할머니를 생각하면 그 기억이 자주 떠올라요. 저를 지키려는 매 순간순간이 무서웠을 것 같고, 용기를 냈어야 했을 것 같고. 세상 소심한 사람이 막, 씨발년이라는 말도 해야 했고.
  선배.
  …….
  말해줘서 고마워요.
_103, 일 년

  오빠가 자주 '캔디'라고 부르는 우리 어머니. 스물네 살에 결혼해 스물다섯에 첫째를 낳고, 나 포함 총 네 명의 아이를 키우셨다. 청소 안 했다고 이모(어머니한테는 언니)에게 욕 먹기 싫어서 외할머니(어머니한테는 엄마) 퇴근 전까지 집에 들어가지 않고 현관문 앞에 앉아 시간을 때우던 어린 아이는 자라 쉬는 날이면 밀린 집안일을 마치고 장을 보고 저녁밥을 차리는 부인 그리고 엄마가 되었다. 어릴 때부터 너무 착해 외할머니의 걱정을 샀다는 어머니는 이제 이 발, 저 발도 할 수 있는 입을 가지게 되었다. 화가 너무 없어 곁에 있는 사람이 화가 나게 만드는 어머니를 화나게 만들던 건 어쩌면 다 우리였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아팠다. 우리가 아니었으면 한평생 화를 낼 일도, 욕할 일도 없으셨을 테데. 매번 처음이었을 모든 매일이 얼마나 무서웠을까.


  집으로 돌아가던 어느 날, 터널을 지나며 다희가 말했다.
  어릴 때는 터널 지날 때 숨을 찾았어요.
  왜요?
  숨을 참고 터널 다 지나면 소원이 다 이뤄진다고 해서요.
  무슨 소원 빌었어요?
  다  잊어버렸어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잠시 다희를 바라보았다. 터널 조명이 다희의 얼굴을 스치며 얼룩을 내고 있었다.
  숨 참느라 힘들었던 것만 기억나고 억울하네요.
  지금은요?
  이제는 저를 위해 빌지 않아요. 바라는 건 있지만, 누군가에게 빌지는 않아요.
  터널을 빠져나갈 무렵 다희가 말을 이었다.
  선배가 행복하길 바라요. 그리고 건강하길.
_112, 일 년

  바라는 건 있지만, 누군가에게 빌지는 않는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소원을 빌면 내 소원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안녕을 바랐다. 다희처럼 "이제는 저를 위해 빌지 않아요"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무탈함과 행복함이 곧 나를 위한 거였다는 생각이 요즘 자주 든다. 사랑하는 사람의 반짝이는 눈, 자지러지는 웃음, 무탈한 하루, 새로 발견한 취향, 편안한 잠자리, 개운한 아침이 내 발등의 기쁨보다 고마울 때가 많았고, 그럴 때마다 자주 내 마음이 가득 차서 든든해진다. 그런 풍요로움에는 좀처럼 한계가 없어 더 좋았다.


  다희를 데려다주고 싶었고, 자신도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그녀는 사무실에 남아 일을 하며 다희를 기다렸다. 오늘은 집 앞까지 데려다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다희는 열한시쯤 일을 끝내고 그녀의 자리로 왔다.
  선배.
  다희는 미간을 찌푸리며 웃는 특유의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이렇게 기다릴 필요 없었는데. 고마워요.
  나도 할일 잇었어요.
  더 늦게 끝날 수도 있었는데, 그럼 제가 너무 미안해지잖아요.
  다희는 진심으로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인턴들 보기에도 좀 그래요. 제가 무슨 특별 대우 받는 것처럼.
  알았어요. 앞으론 그냥 갈게요.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웃으며 사무실을 나왔지만 씁쓸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다희에게  서운함을 느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서운하다는 감정에는 폭력적인 데가 있었으니까. 넌 내 뜻대로 반응해야 해, 라는 마음. 서운함은 원망보다는 옅고 미움보다는 직접적이지 않지만, 그런 감정들과 아주 가까이 붙어 있었다. 그녀는 다희에게 그런 마음을 품고 싶지 않았다.
_115, 일 년

  직장에 좋아하는 선배가 있다. 세상 아가처럼 웃다가도 자주 나보다 어른스러운 생각을 가진 동생이다. 같은 방향이기도 하고 스케줄이 좀처럼 맞지 않아 조금이라도 더 이야기 나눌 겸 함께 퇴근하게 되면 집을 바래다주곤 하는데, 언젠가 "이렇게 기다릴 필요 없었는데."라는 말을 듣고 감히 섭섭할까 스스로에게 조금 겁이 났다. 단편 속 화자처럼 폭력적인 '서운함'이 들까봐 무서웠다.

  사람들은 정말 다 다르고, 내 선의가 누군가에겐 부담이 될 수도 있는 거니까. 뭔가를 바라고 하지 않을 일들에 나조차도 모르던 혹시 모를 못된 기대나 바람이 붙어 있지는 않나 살피고, "그저 가볍게 즐겨주세요"라는 뉘앙스를 담아 마음을 전하게 되는 것 같다.


  선배가 저 아껴준 거 알아요. 전 선배한테 아무것도 해준 것도 없는데.
  다희씨는…… 그녀는 머뭇거리면서 말을 골랐다. 저는…… 다희씨 좋아하면서 다른 사람들도 조금은 좋아하게 됐어요. 그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에요.
  그 말을 할 때 자동차가 인안대교에 들어섰다. 그곳에서, 둘은 언제나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득 그녀는 말하고 싶었다. 다희에게 하지 못했던 말을.
  다희의 눈썹. 다희가 얘기할 때면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눈썹을 보면서, 사람에게 눈썹이라는 게 있었구나, 눈썹이라는 게 꼭 마음과 통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그리고 사실 그녀는 귤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말도. 그렇게 껍질을 까서 하나하나 손바닥에 올려주던 마음이 고마워서 그 말을 끝까지 할 수 없었고, 결국엔 귤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말도. 다희가 더 깊은 이야기를 할까 한편으로는 두려웠다는 말도. 사람들은 때로 누군가에게 진심을 털어놓고는 상대가 자신의 진심을 들었다는 이유 때문에 상대를 증오하기도 하니까. 애초에 그녀는 깊은 이야기를 할수록 서로 가까워진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는 말도. 그렇지만 다희가 그녀로 하여금 말하게 했고, 그 사실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는 말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멀어지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는 사실도. 하지만 그녀는 그중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_120, 일 년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데, 먼저 손 내밀어주고, 안부를 묻고, 기꺼이 아껴주던 사람들이 있었다. 도대체 왜?냐고 물으면 지금도 대답할 수 없다. 나는 그 사람들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나 역시도 먼저 '그냥' 좋아하게 된 사람들이 있었고, 왜냐고 물으면 딱 잘라 대답하기는 어렵다.

  "선배가 저 아껴준 거 알아요. 전 선배한테 아무것도 해준 것도 없는데."라는 다희의 고백에는 ㅇㅈ 언니가 떠올랐고, 껍질을 까서 하나하나 손바닥에 올려주던 마음이 고마워서 귤을 좋아하게 된 화자를 보면서는 한평생 모르고 살던 걸(마리네이드, 작두콩차, 뉴욕 조지 호수) 좋아하게 만들어준 채바라기가 떠올랐고, '다희가 더 깊은 이야기를 할까 한편으로는 두려웠다는' 화자의 마음에는 자기 얘기를 스스럼 없이 잘하는데 심지어 나처럼 누군가를 금방 좋아하는 율무가 떠올랐다. 나는 ㅇㅈ 언니가 뭔가를 보고 날 떠올릴 때마다 너무 고마워서 어쩔 줄을 모르겠고, 채바라기와 함께 내가 모르지만 앞으로 좋아할 세상이 궁금하고, 율무 특유의 친밀함이 때로 듣지 않아도 될 소리까지 듣게 만들지는 않을까 마음이 쓰인다. 이 모든 조바심은 아마도 내가 너무 좋아하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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