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태. 고기로 태어나서
한승태. 고기로 태어나서. 별 다섯.
다행이다. 한국에 한승태라는 작가가 있어서.
먼저 책감상을 시작하기 전에 김빠지는 얘기를 해야할 것 같다. 이 글은 결과적으로는 읽는 사람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지만, 내가 이 감상을 쓰려던 원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말재주가 좋은 사람들 있다. 그 중에서도 웃긴 얘기를 잘 하는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듣는 사람보다 먼저 웃지 않는다는 것이다. 스스로 아무리 웃긴 얘기라 해도 말하는 사람이 먼저 웃어버리면 듣는 사람은 빠져들 여지가 없이 멀어지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리 이 책이 얼마나 나에게 큰 충격과 경외심(!!)을 불러왔는지 쓰지 않고는 글을 시작할 수 없을 것 같다. 사실 책감상을 쓰기로 생각했을 때 맨 처음 떠올린 것이 이 책이었고, 빈약한 수준이나마 근래 몇 년간 읽은 책 중에 가장 큰 감명을 받았다. 어느 정도였냐면 작가 서문만 읽고 오함마로 명치를 맞은 것 같았다. 읽는 내내 도대체 형광펜으로 좍좍 긋고 통째로 베껴서 쓰고 싶은 문단(문장이 아니다)이 얼마나 많았던지. 이 책을 다 베껴 외워서 이런 글을 쓸 수 있다면 한 번 해볼만 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만큼 문장과 시선과 호흡이 비교할 수 없이 탁월하다(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렇다). 뭐 이런 사람이 있나 싶게.
이렇게 호들갑스러운 평가로 시작했으니 책 감상도 최고로 잘 쓰고 싶은 마음이 당연지사인데 욕심이 이렇게 앞서 달려나갔으니 어떻게 해도 성에 안찰 것임이 분명하다. 이것은 알고도 빠지는 함정이자 실패가 예정된 글이다. 본인 표현대로라면 '가뜩이나 습자지만큼 얇은 독자층'을 가진 작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지나쳐서 모자란 것만 못한 팬심이 빚어낸 아무말 대잔치일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또한 본인의 글에 혹여 다른 기대를 갖고 읽을 독자들에게 어서 돌아서기를 권하며 시작하는 엉뚱한 작가의 책에 대한 내 나름의 어설픈 오마주라고 볼 수도 있겠다.
2007년 여름 미국에 왔다. 대학원 공부라는 것을 하러 오긴 왔는데, 해야할 것은 너무 많지만 힘에 부쳤고, 그걸 죄다 빌어먹을 영어로 해야한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봐도봐도 진도가 안나가는 전공책이 지겨워져서 좀 쉬운 걸로 읽으면 그래도 자신감이 조금은 생기지 않겠나 하는 게 스스로에게 합리화하는 핑계였고, 해야하는 공부 말고는 뭐든 다 재밌을 것 같았다는 게 진짜 이유였다. 이 당시 노동 르포 에세이로 몇 년 째 회자되고 있던 책이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Nickel and dimed: on (not) getting by in America'다. 한국말로 제목을 번역하기가 참 거시기하다(번역된 책은 '노동의 배신'이라는 더 거시기한 제목이다). 대략 책의 느낌을 살리자면 '50원 100원 짜리로, 미국에서 근근히 먹고 살기(혹은 실패하기)'.
언론인으로서 업계에서 인정받고 있는 화려한 경력을 쌓았던 저자가 이력을 속여서 구직 시장에 들어가는 일부터 시작해서 3년 동안 딱 먹고 살 수 없을 만큼인 최저임금을 받는 직업(청소부, 가사도우미, 식당종업원) 현장에서 직접 일한 경험을 써서 미국에서 오랜 믿음으로 굳어진 '노동복지'의 허구를 폭로한 책이다. '노동복지'란 우리나라에도 IMF 이후 정책에 도입된 개념으로, 노동할 기회를 주는 것이 도덕적 해이를 막고 복지 효과를 높임으로써 복지 수혜자의 지위에서 벗어나도록 촉진한다는 생각이다. 이 책은 최저임금을 받고 일하는 노동자들은 구조적으로 빈곤을 벗어날 수 없는 현실적 조건에 처해있기 때문에 노동복지 개념이 유효하지 않다고 비판하는 주장을 실증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이 책이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수 년 간 정체되어 있던 미국 연방 최저임금 인상 법안에 힘이 실리고, 생활임금(living wage) 논의가 확장되는데 큰 기여를 했다고 한다.
읽는 내내 (영어인데도) 장면이 그려지고, 함께 심장이 오그라붙고 내 무릎이 시리고 고단한 느낌이 생생했다. 매일의 노동으로 채워지는 일상이, 아무것도 아닌 '스마트한 경영'을 위한 조치가 어떻게 사람의 몸과 나아가 생각까지 영향을 미치고 사람 사이의 관계를 뒤틀게 되는지, 그렇게 경험한 최저임금 노동자로서의 생활이 '식자층'이 개념화하고 단정짓는 주장과 얼마나 동떨어졌는지, 자신 역시 '먹물'로서 가졌던 기대와 편견이 얼마나 사소한 계기로 손쉽게 깨지며 스스로를 배신했는지 예리한 농담을 버무려 썼다. 영어가 어려운지 쉬운지 판단할 새도 없이 붙들고 밤새 읽고 난 후, 나는 앞으로 내가 경험할 세상이 그 전과는 다를 것임을 알았다.
십수년이 지나 한승태 작가의 책을 만났다. 한국에 매우 드문 노동르포에세이 작가다. 대개 노동과 관련한 글쓰기는 '사건'이 일어나면 언론에서 비참한 소재와 사연으로 소개되거나, 그런 사건을 계기로한 정책 논의에서 주로 다뤄진다. 아니면 (거의) 아무도 읽지 않는 학술 논문이거나. 어떤 구조적 문제가 있고, 정책이 미비하며, 무엇을 개선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노동은 (한국의 많은 부분들이 그렇지만 특히 더) 뜯어고쳐야 할, 비극의 현장이다. 그런데 무엇을 어떻게 고쳐야한다는 주장을 하지 않고 '노동' 자체만을, 그것도 축산 노동 현장에서 직접 겪으며 알아낸 내용을 썼다는 것이 이 책에서 주목할만한 점이다.
작가는 4년여에 걸쳐 산란장, 부화장, 육계 농장, 종돈장, 자돈 농장, 비육 농장, 개 농장에서 일했고, 먹는 고기인 닭, 돼지, 개가 어떻게 키워지는지를 아주 자세하게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썼다. 그렇게 '클로즈업'한 장면들의 힘은 압도적으로 커서 '우리의 멱살을 그러쥐고 현장 한가운데로' 뛰어들게 한다. 세상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악취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케이지 속의 혼란은 끝과 끝을 이어 붙인 것처럼 계속됐다. 맨 밑의 닭은 이중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동대고 다른 닭들은 균형을 잡기 위해 발에 더욱 힘을 준다. 밑의 닭이 난리를 피워서 잠시 빠져나올 수도 있지만 이래저래 방해를 받은 나머지 닭들이 이번에는 녀석을 부리로 쪼아댄다. 1분간의 반란이 끝나고 밑바닥에 속했던 닭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닭들이 한 시간이라도 편히 잘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침낭 하나에 네 사람이 들어갔는데 이 네 사람 모두 손과 발에 꺠진 유리 조각을 붙이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잠은커녕 눈을 감고 있기도 어려울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닭들은 서로가 서로를 쪼아대기 시작했다. 쪼일 때마다 몸서리를 치면서도 맞받아 쪼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케이지가 워낙 좁았던 탓에 네 개의 머리를 가진 닭이 자신의 몸을 쪼아대는 것처럼 보였다. 철창이 가두고 있는 것은 닭이 아니라 가장 유해한 종류의 광기인 듯싶었다. 물론 철창 안에 있는 동물이 미친 건지 아니면 그들을 철창 속에 가둔 동물이 미친 건지에 대해선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말이다.'
공감각적으로 노동의 현장과 먹히는 고기가 사는 환경을 묘사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여기서 일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작가의 공포와 불쾌감을 여과없이 썼다. 몇 장면은 너무 강렬하게 느껴져서 몇 주 동안이나 내 눈 앞에서 본 것마냥 끈끈하게 붙어 따라다녔다. (이렇게 쓰면...벌써 겁먹고 읽고 싶지 않을 사람들이 있을 것 같다. 망했다. ㅜㅜ) 먹히는 고기인 닭, 돼지, 개가 본연의 모습과 극단적으로 동떨어진 모습으로 가공되어 깨끗하게 조각조각 매대에 올라오기 전까지 우리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어떻게 길러지는 지, 이 책을 읽으면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감각으로 각인된다.
무엇을 썼느냐도 이 책의 귀한 점이지만, 나는 어떻게 썼느냐가 어쩌면 더 훌륭한 점이라고 느꼈다. 이 책에 나오는 '힘쓰는 고기'인 사람들의 이야기가 먹히는 고기의 이야기만큼이나 힘이 센 이유다. 그는 각 농장에서 짧게는 몇 주부터 몇 달씩 일하며 쫓겨나거나 제발로 그만둘 수밖에 없게 됐다고 했는데, 어떤 인터뷰에서 작가가 밝히기로는 짧게 일한 곳에서는 그만 둔 이유가 다른 것인 경우도 있었지만, 길게 일한 곳에서는 함께 일했던 사람들 때문에 버틸 수 있었다고 한다. 결국 문제도, 답도 사람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나오는데 노동 르포에서 빼놓지 않고 등장할 거라고 으레 짐작하는 악덕 업주들의 비중은 그다지 높지 않다. 함께 일했던 아저씨들, 조선족, 베트남, 캄보디아 등지에서 온 이주노동자, '사장'이라고 생각했지만 알고보면 아저씨들과 처지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관리자들의 이야기가 많다. 한승태 작가는 이들의 입말을 기가 맥힌(막힌보다 더한) 현장감이 느껴지도록 옮긴다. 스스로는 복잡하게 착한 존재이고, 남들은 간단하게 나쁜 놈으로 여기는 게 사람이라고 했던가. 낭만적이지도 않지만 손쉽게 판단하지도 않는 작가의 시선은 한없이 낮고 가까워서, 읽는 것만으로도 어떤 굳었던 믿음에 금이 가고 시야가 트인다.
'상구 아저씨의 야망이 구체적으로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선 언제나 가장 높은 위치의 사람에게만 말을 거는 버릇이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현장직 최고 책임자인 복 부장이 그 대상이었다. 그래서 상구 아저씨가 하는 말은 이렇게 시작할 때가 많았다. "아, 부장님 내 말 좀 들어보세요." "부장님 그게 아니라요." "부장님 어때요? 내 말 옳지요?" 이것만 놓고 보면 절대 손해를 보는 일은 안하고 살 사람 같지만 술 잘마시고 여럿이 어울려 웃고 떠들기 좋아하는 사람이 그렇듯 아저씨도 주위 사람들의 부탁, 특히 돈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월말이면 항상 울상을 짓곤 했다.'
노동 계급으로 태어나고 자라며 일생의 대부분을 고달프게 살았던 미국의 작가 레이먼드 카버는 본인의 글쓰기론을 가르치면서 가장 중요하며 어려운 일이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말하는지는 그대로 적는 것이라 했다고 한다. 작가는 극 중 인물들에게 설정한 각자의 성격과 극에서의 역할대로 그럴 법하게 대사를 주지만, 이는 작가의 인식과 상상 속에서 가공되기 때문에 현실감이 떨어지는 가공품에 불과하다는 의미다. 고기로 태어나서를 읽으며 카버가 원했던 작중 인물의 현실감이 이런 것이 아니었을지..생각했다. (승우 아저씨를 비롯해서 각별히 좋았던 부화장 다른 아저씨들의 이야기는 일부러 쓰지 않겠다.)
동시에 작가는 이들과 자신이 본질적으로 다른 입장과 계층에 속해 있음을 끊임없이 상기한다. 자신을 '관광객'에 불과하다고 낮추면서 스스로를 지운다. 그렇게 지운 자리에 작가 또한 놀랄만한 다른 얼굴이 드러나며 읽는 이와 연결되고, 작가도 우리도 몰랐던 세상의 폭력적 이면에 함께 도달한다. 그러면서도 인간 존엄을 말하는 것이 사치스러울 정도로 가혹하고 지리멸렬한 상황에서 작가가 대상과 거리두기에 처절히 실패해가는 과정은 지나치게 담담해서 슬프지만 웃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페이소스가 있다. 쥐락펴락 들었다 놨다 휘둘리는 글 맛이 각별하다.
(매우 낮은 확률로) 혹시라도 이 글을 읽고 책이 궁금해져서 읽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끝까지 읽게 된다면 작가의 전작인 [인간의 조건]도 궁금해질 것이라 생각한다. 꽃게잡이배, 편의점, 주유소 등에서 일한 경험을 담은 또 다른 노동 르포인 인간의 조건에는 좀 더 날카롭고, 어려서 여렸고, 뜨거웠던 작가의 20대가 담겨있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고기로 태어나서에서 우리를 안내한 깊고 너른 시선을 갖게 된 작가의 힘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게 될 것이다.
책을 읽은 게 두어 달 전인데, 이후 꾸준히 하는 일이 있다. 한승태 작가의 신작이 나왔는지, 인터뷰는 없는지 구글신에게 여쭙는다. 글쓰기를 계속 하고 있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이 책을 같은 마음으로 읽은 친구와 농담처럼 내가 엄청난 부자가 된다면 한승태 작가에게 매달 월급을 주며 글을 열심히 써내라고 채찍질하고 싶다는 소망을 말한 적이 있다. 그것도 아주 가혹하게! 노동 현장의 불의함을 쓴 작가이니 그럼 내가 얼마나 악덕 고용주인지 찰지게 써주지 않을까. 그렇게라도 한승태 작가 글을 보고 싶다는 팬심을 담아서...이 글을 보는 모두에게 한작가님 책을 안읽어도 좋으니 일단 한 권은 사주십사 부탁하고 싶다. 그만큼 한승태 작가는 지금 우리 모두에게 귀하다.
21.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