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혁명이 왜 거기서 나와
(너무 긴 글 주의. 작정하고 구구절절 썼다. 이를테면 기이이이이이이이이승전결 구성. 미리 양해를 구한다.)
이건 다 김영하 작가 때문이다. 굳이 따지고 보자면 그렇다는 거다.
글 잘쓰고 말도 잘하고 용감하고 똑똑한데 여행마저 남들이 다 부러워할만큼 다닌-혹은 그래서 용감하고 똑똑해졌을지도 모르는- 김영하 작가는 에세이집인 '여행의 이유'에서 독특한 이야기를 했다. 작가 후기에 이 책을 쓰기 위해 이제까지 그의 모든 여행 경험이 필요했다고 밝혔는데, 그래서 그런지 재밌는 얘기가 많다. 그 중 초반에 나오는 썰이다.
그는 낯선 곳에 가서 밥을 먹게 되면 식당 메뉴판에서 아래 쪽에 있는 것을 시킨다고 한다. 어느 식당이든 메뉴판 위쪽에 있는 메뉴는 그 집에서 제일 인기있고 자신있는 메뉴이기 마련이고, 그런 걸 시키면 맛있게 먹겠지만 재미가 없다는 거다. 그런데 메뉴판 아래에 있는 것을 시키는 '모험'을 했을 때 특이하거나 황당한 음식이 나오면 그 자체로 흥미로운 이야기가 되고, 자기는 작가이니 그걸 쓰면 된다는 것이다. 의외로 맛있는 음식이 나오면? 만족스럽게 먹을 수 있으니 그 또한 나쁘지 않고. 아, 이 집 음식 잘하네 하며.
뭐든 글감으로 잡히는 족족 쓸 수 있고, 쓰면 다 매끈하게 재밌기까지 하니 할 수 있는 생각이구나 싶어 신기했고, 부럽기도 했다. 대작가의 스웨그는 이런 것인가. 유난히 추웠던 지난 해 마지막 날, 벽난로 앞에서 몸을 배배 접고 커피를 홀짝이며 책을 볼 때만 해도 그 이야기가 민들레 홀씨 마냥 한구석에 붙어 있다가 불쑥 그렇게 껴들어 올 것은 상상도 못했다.
자가격리가 끝나고 엄마 아빠 동생을 보러 전주에 갔다. 마침 설연휴가 겹쳤고, 팬데믹 때문에 2년만에 보는 얼굴들이고 하니 좀 오래 있기로 했다. 그래봐야 일주일 남짓이지만 그게 근 십 년만이다. 코시국이라, 설연휴라, 딱히 갈 데도 없이 내리 사흘을 한 집에서 부대끼며 반갑고 지겨운 잔소리를 쉴새 없이 주고 받았더니, 메아리가 되어 머릿속이 웅웅거렸다. 다들 비슷한 마음인 것 같았다. 앞으로 사흘 더 남았는데... 우리 가족이 유달리 다정하고 끈끈하다고 해서 단체생활이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24/7 정확한 일정대로 사는 아빠가 아중 저수지에 산책을 가겠다고 먼저 선언했다. 칸트가 분침까지 딱 맞춰 매일 똑같이 살았다고 해서 유명했던 것 같은데...우리 아부지가 전주 칸트다. 사흘을 패밀리 타임으로 봉사했으니 이제 본인의 시간표로 돌아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참고로 아빠에게 '산책'이란 화, 목 오후 두시부터 1시간 30분 동안 아중리 저수지 둘레 산길을 바깥쪽으로 크게 두 바퀴 돌아 11키로를 걷는 것이다. 혹시 잘 와닿지 않는다면, 이건 두부사러 가는 종종 페이스로 내내 뛰듯 해야 가능하다. 상식이 반만 있어도 산책이라고 부를 순 없다고 보는 편이 옳다.
하지만 혈연의 굴레가 그렇게 쉽게 벗어날 수 있는 것이던가. 답답했던 내가 엄마를 핑계삼아 따라가겠다고 했다. 엄마에게는 날벼락. 우리 가족 중에 아빠와 나, 막내 S는 일주일에 최소 20키로는 뛰어줘야 삶이 정상 궤도에서 돌아간다고 믿는, 운동 맹신자다. 반면 엄마는 최소 지난 20년은 땀날만큼 운동을 해본 적도 없으면서 '지나친 운동'은 몸에 해롭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나한테 잔소리 폭탄을 맞을까봐 대놓고 말하지 않지만 지난 번 아파트 계단을 '다섯 번이나' 왕복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5층 아파트 계단을 한 세 번 오르내리는 정도, 혹은 슬슬 걸어 10분 걸리는 도서관에 다녀오면 하루치의 운동을 했다고 믿고 있는 눈치다. 엄마는 동네 학교 운동장을 걷자는 의견을 냈고, 간단히 묵살됐다.
11키로를 바람같이 (혼자) 걷고 싶은 아빠가 한 편에 있었고, 운동에 미친 큰 딸이 엄마를 물고 늘어졌으니 이제 공은 둘째 D에게 넘어갔다. D와 운동의 관계는 다소 평범하면서도 미묘하다. 기본 입장은 엄마와 더 가까운 편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나와 막내 S가 몇년에 걸쳐 세뇌시킨 결과, 아주 드문드문 살짝 운동같은 걸 할 때의 자기의 멋진 모습(리사라고 부른다. --; 요즘 말하는 부캐 같은 거라고 이해한다)을 꽤 좋아한다. 그러니 D는 이 상황에서 어느 쪽에 서도 이상하지 않았다.
늘 일에 치여 피로한 직장인 D는 사실 다 내보내고 낮잠이나 잤으면 하는 눈치가 역력했으나, 평생 자기주장 강한 극단주의자들 사이에서 살아온 짬을 발휘, 본인의 희망을 살짝 섞어 다소 엄마 쪽에 기운 절충안을 냈다. 아중 저수지를 안쪽으로(즉, 짧게) 한바퀴만 돌자. 개인 일정이 무산된 데다 본인 운동이 취소되어(그렇다, 그에게 이건 운동이 아니다) 불만이지만 딸들에게는 다정함 외엔 다른 태도를 가져본 적이 없는 아빠와, 강제로 말도 안되는 거리를 걸을 뻔한 위기를 넘겼고 딸들과 함께라니 잘됐다고 긍정하는 엄마, 성에 차는 거리는 아니어도(나도 이건 운동으로 분류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 핑계로 엄마가 다만 5천보라도 걸으면 다행이고 새로 단장했다고 하는 저수지 둘레길을 가볼 생각에 즐거워진 재외동포(나), 그리고 마냥 피곤한 D가 아중 저수지로 향했다.
(part 2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