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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디 Feb 08. 2024

나의 일본생활 1

이마이를 만나다.

긴장되는 1학년 초등학교 첫  참관수업이라 그런지 부부동반으로 온 사람도 많이 보였다.


나는  1교시부터  보고 싶은 마음에 이른 아침부터 분주히 준비한 후 자전거로 극도로 좁은 길을 요리조리  차를 피해 가며 교실에 일찍이 도착하고 보니, 어디든 시간보다 일찍 도착하는 일본인들은 아니나 다를까, 엄청 일찍 와서 교실을 꽉 메우고 있었고, 비디오 찍는 아빠도 있었다.


교실에는 에어컨이 없는 대신 천장 한가운데 달린 날개가 긴 선풍기가 천천히  돌고 있었다.   칠판은 분필 칠판 이어서 신기했다. 아직도 저런 거 쓰나? 의아했다. 책상이 수 십 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다리 부분만 철제로 되어있고, 테이블은 나무로 된 작은 책상에 앉은 딸을 찾았다.


교실 뒤편은  다양한 색상의 란도셀과 벽에는 그림작품으로 가득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내

어린 시절의 교실에 있는 느낌마저 들었다. 우리 딸이 그린 그림노트가 보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잘하는 것 같아 뿌듯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내 내 딸보다 또렷하게 잘 쓴 글씨와 그림들과 살짝 비교도 해본다. … 얘는 미술학원 다녔나?…. 잘한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작은 목소리로 “ 스미마생. 스미마생“!이라 말하면서  딸이 앉은 의자 뒤편구석에

서서 옆사람과 몸이 닿지 않도록 서있었다. 애가 나를 찾기 어려울 것 같았다.


아이가 금세 “엄마 왔어”!라고 하는 듯 손을 흔들며 활짝 웃어 주었다.  아마도 부모들이 교실에 들어올 때마다 혹시 엄마인가? 하며 많이 찾았겠구나  싶었다.  


34살에  낳은 하나뿐인 딸을 금이야 옥이야 키우고 있는 중이었다.


남편도 볼일이 있었지만 잠깐 아이 얼굴만 라도 보고 싶다며  왔지만, 많은 사람들로 인해 입구에 서서 서성이다가, 아이와  겨우 눈 맞춤을 하고 나서야 손을 흔들어 준후 부랴부랴  출발했다.


나는 첫 1학년  담임 선생님 얼굴도 너무 궁금하고어떤 엄마들 인지도 궁금했다.   이곳 일본땅에서 아이를  교육하려면 엄마들한테 눈도장이라도 찍어놓아야 필요한 정보도 얻고, 아이 친구도, 내 친구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유치원 때부터 얼굴이 낯익은 사람도 서너 명 있지만 눈인사를 나눈 정도로, 말을 섞어본 적은 없었다.

다행히 선생님은 정년을 앞둔 인자한 얼굴을 하신

”미즈무라”라는 여자 선생님으로  배테랑이었다. 일 학년 선생님은  어린아이들을  잘 통솔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선생님이 담당을 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내가 사는 곳은 비록 변두리에 위치한 동네이지만 꽤나 큰 규모의 전철역을 끼고 있고, 전통 있는 세이부 백화점이 걸어서 10분 밖에 안 걸리는 큰 도시이다. 이 도시에서 본 일본사람들은 평소에 화려한 옷차림을 하진 않고, 소박한 모습으로 산다.


그래도 오늘은 좀 중요한 날이지 않는가?.. 학교 선생님들과 부모님들이 인사하는 날이다.



나는 오늘 의상과 가방에 힘 좀 줬다. 예전에 미국에서 살던 시절  지금처럼 일본엔이 곤두박치기 전에 구매했던 루이뷔통 가방을 들고 ,페라가모 신발도 꺼내 신고 오랜만에 화장도 했다.


아무도 한국사람인 나를 깔볼 수 없도록  겉치장에 신경을 썼다. 나의 딸은 말할 것도 없다. 머리가 가지런 함은 물론이거니와 흰색 원피스를 입혔다.  

오늘은 철봉 따윈 못하는 날이다.


참관수업을 온 학부모들의 옷 차림새는 수수하다 못해 (누추해)  보일 지경이었다. (공립학교다)그 누구도 세련된 브랜드의 구두를 신었거나, 명품가방을 든 사람을 눈을 씻고 봐도 없다.


보통 에코백을 들거나 자신이 만든 천가방 종류였다한국사람인 내가 보기에는 놀라울 정도로 검소했다.  (성형수술? 얼굴 보톡스? 그런 학부모는 20여 년 일본생활에 한 번도 못적이 없다. 자전거를 많이 탄탓에 거무스름한 피부가 많았다. 얼굴이 뽀얗게 풀 메이컵을 한 사람도 없었다. )


나 역시 검소 한편이지만 (명품을 향한 욕망은 센 편이다 ㅎ)

오늘 같은 날은 조금 빼 입는 날인 줄 알았는데….


“앗차!“




그 누구도 이런 무늬의 가방을  들고 오지 않았다.  거의 모든 부모들이 모노톤이었다. 유니클로처럼 아무도 알아볼 수 없는, 마치 브랜드는 안 입기로 단합이라도 한 듯 누구 하나 튀는 이가 없었다.  

일본에 온 지 2년밖에 안 돼서 분위기 파악이 제대로 안 된 상태였다.


 우리 애가 선생님말씀을 잘 듣고 주의력이 떨어지지는  않는지, 얼마나 똑똑한지 확인이라도 하듯

나는 우리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다행히

중간은 가는 듯해 보여 안도했다.


일어와 한국어를 동시에 하다 보니, 다른 일본아이들보다 뒤처지지 않을까 내심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4시간의 참관수업이 끝나고, “오늘의 하이라이트” 말로만 듣던 “보호자 회의“ 시간이었다.

일본말도 버벅 거리는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 미팅은 누구와 대화가 되고 안 되고의 문제가 아니고 보호자 대표들을 선출한다는 것이다. (회장. 부회장. 서기. 경리 등등 선생님과 가까운 관계로 학교 주요 행사 주관 및 참여)


외국인이고 나발이고 사정 안 봐준다는 소리와 함께 6학년 끝날 때까지 “PTA”(parent-teacher

association )에 한 가지 임원이라도 참여하지 않았을 경우 6학년이 되었을 때 회장으로 선출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있다는 어마무시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5학년까지 그 어떤 역할에도 참여 안 했을 경우 그동안 비 참여 했던 부모가 주요 대상이 되어, 그 안에서 대표를 선출하며, 그 대표는 학교의 중요 행사에 마이크를 들고 발표까지 해야 한다는 엄청난  소문이었다.  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어쩌면 좋아….. 일본 사람들 앞에서 일어로

발표를? 미친 거 아냐?  난 일본인도  아닌데 왜

예외가 없어?  정말 일본사람들은 융통성이 없어!!! 아는 사람도 없는 이놈에 일본에서 애를 키우려니 별 망신을 다 당하겠군!

아이고… 내가 못살아…


그래서 부모들은 되도록 저학년일 때 참여하는 분위기였다.  나는 저학년이고 고학년이고 다 싫다!!!


보호자 미팅에 빠지면 해결되냐고? 오! No! 그런 건 없다.  전화로 당선되면 연락이 온다고 했다.

한마디로 얄짤없다.


클래스에 가보니 의자를 둥글게 원형으로 만들어 놓고 들어오는 순서대로  앉게 했다.  


앉아서 가만~~~ 히  보니 맞은편에  필리핀계 젊은 엄마가 앉아 있었다.  저 여자는? 나랑 좀 처지가 비슷할 것 같았다. 그런데 정말 태연해 보이네? why? 나는 긴장되는구만?


그렇다!!  저 여자는 일어를 하나도 몰랐다! 글씨도 몰랐다! 어린 아들이 옆에서 통역을 해대고 있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자신이 왜 여기에 모였는지 모르니 평온할 수밖에..


어중띠게 일어가 조금 되는 나는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하니까 이토록 긴장된 거다.

차라리 일어를 못할걸….. 나는 왜 쓸데없이 시부모님과 대화해 보려고 열심히 일어를 공부했나.. 내가 미웠다.


나는 여러 사람들 앞에 서서 말하면 눈앞이 노래진다고…..



담임선생님 인사와 함께 차례로 한명씩 자신이 누구의 엄마, 아빠인지 소개를 했다. 모두들 유창한 일어로 빙빙 돌려가며 겸손해하며 소개를 길게 했다.

내 차례도 점점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야마구치 아이”

엄마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다른 말은 나오지도 않고 벌써 숨이 차서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선출이 시작되고.

선생님이 “자진해서 하실 분 안 계십니까”?  아무도 자진하는 분이 없으면 제비 뽑기라도 해야 합니다 “.


……….


겨우 두 명의 엄마가 자진해서 경리와 서기를 하겠다고  지원했다. 이젠 제일 피하고 싶은 회장. 부회장 선출이 남았다.


젓가락을 차례로 돌리기 시작했고, 나도 눈 감고 한 개 뽑아서 담당에게 줬다…. 제발…. 기도했다.


  선생님이 웃으며 “다음 분“이라고 해줬다. 아~~~ 올해는 살았다.


 그늠에 보호자 회의는 끝나고, 엄마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인사하며 교류를 시작했다.

나는 뻘쭘~~ 히 서서 민망해서 벽에 붙어있는 아이들 작품을 구경하고 있었다.



“아이짱 엄마되시죠?” 안녕하세요!

“저는 이마이라고 해요. “마코토 엄마예요”만나서 반갑고요 잘 부탁드려요!

자그마한 체구에 이쁘장한 젊은 엄마가 말를 걸어왔다.!

아~~ 네. 저도 반가워요.

(남편 전근으로 오사카에서 살다가 최근에 돌아왔다고 했다. )


우리 언제 런치 하지 않을래요? 우리 집에서요.

아~~ 네 그래요. 연락 주세요. 하며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일본에 온 지 2년 만에 처음으로 일본인이 먼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낮고 여성스러운 목소리에  좀 우아한 타입의 우리 아이와 같은 반 엄마였다.

일본에서 사람 사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활발한 성격의 나에게도, 일본생활 20년이나 된 소영이도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아직 없을 정도로 쉽지 않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락이 진짜 왔다. 다음 주 수요일

11:30부터 우리 집에서 같이 점심 먹자는 메일이 왔다. 나 빼고 두 명 더 온다고 했다.


처음 가보는 일본 집이  좀 궁금했다.  저 사람은

어떤 집에서 살고 있을까?

우리는 미국에서 온 지 1년여 만에 겨우 월세를 얻어 셋이 맨션에 살면서 마이 홈은 꿈도 못 꾸고 있었다. 월세 내기도 바빴고, 무엇보다 늦깎이 사회생활이라 모아놓은 돈도 한 푼도 없었다.  


남편은 집을 사는 건 바보짓이라며 월세를 한 달에

13만 엔은 아깝다고 하는 내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나도 이층 집에서 아이를 자유롭게 뛰게 해 주면서 살고 싶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나는 내 집 장만은 꿈도 못 꾸고 있었지만,  일본의 주문주택을 꼭 구경하고 싶었다.

미래에 혹시 아나? 나도 집을 지을지?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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