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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도영 Oct 04. 2022

환상과 현실의 괴리를 끌어안는 삶

 코로나가 한창일 때 학교에 다니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 도저히 학교 공부를 하고 싶지가 않아졌다. 온라인으로 수업하는 학교에서 남은 것은 평가뿐이었다. 교수님과 마주 앉아 해야 했을 수업은 줌 수업이나 동영상 강의로 대체되었고, 그와 함께 질문과 토론도 사라졌다. 실제로 만난 적 없는 사람들과 줌으로 하는 토론은 벽을 보고 하는 대화를 넘어서기 어려웠다. 어떤 교수님은 두 시간 분량의 수업을 20분짜리 동영상 강의로 대체해서 올려주셨다. 그마저도 ppt만을 넘기면서 진행되는, 한 학기가 끝날 때까지 교수님 얼굴을 알 수 없는 강의였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역병이 도는 상황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교수님들이 계신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온라인으로만 수업하다가도 시험 기간만 되면 학생들을 불러내는 것이 야속했다. 마치 한 학기 수업의 유일한 목표는 학교에 와서 시험을 치르고 점수를 내는 것만 같았다. 성적을 내기 위한 수업은 고등학교가 마지막일 거라고 생각했던 게 잘못이라고, 그렇게 자조할 수밖에 없었다.


 몸과 마음이 모두 너덜너덜해졌을 때, 대학로에서 신기한 연극이 올라간다는 소식을 접했다. 양자역학에 대한 연극이라고 했다.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어딘가 익숙했다. 아인슈타인, 보어, 하이젠베르크, 슈뢰딩거. 공연 설명을 거기까지 읽고 바로 표를 끊었다. 고등학교 때 함께 과학 연극을 만들었던 친구의 표까지, 총 두 장을 예매했다. 그 친구도 나름의 이유로 얼마 전까지 시험 준비를 하느라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상태였다. 그렇게 평가에 시달리다 빈곤해진 두 영혼이 극장에 들어갔다.

 연극은 충격적이었다. 우리는 이렇게 ‘과학스러운’—즉 재미없는—이야기를 감히 무대에 올릴 사람이 우리 말고도 또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다. 우리의 연극은 특수 상대성 이론, 그중에서도 특히 시간지연에 대한 연극이었다. 연극 중간에 로렌츠 변환 공식이 등장했다. 그런데 이 양자역학 연극은 한술 더 떠서, 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을 공격하기 위해 만든 ‘아인슈타인의 상자 사고실험’을 반박하는 수식을 연극 중간에 유도해냈다.

 연극을 다 보고 난 뒤, 추운 겨울밤을 뚫고 쌀국숫집에 가서 안경에 김이 서리도록 쌀국수를 먹으면서 말했다.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지는 못할 것을 알면서도 올린 연극이 대담하고, 풀어내기 어려운 이야기를 이 정도까지 풀어낸 실력이 대단하다고. 물론 이 연극이 연극적으로 완벽하다고 보기는 (아주 많이) 어려웠지만, 우리는 시도했고 실패했기 때문에 이런 연극을 만드는 일 자체가 얼마나 어려웠을지 상상할 수 있지 않냐고. 그 친구는 전적으로 동의했다.

재공연 시작 전날, 셋업을 마치고 찍은 연극 무대. 빛의 파동성을 증명해낸—그리고 이후 전자의 이중성을 밝혀낸—이중슬릿을 형상화했다.

 그 친구에게는 비밀이었지만, 사실 나는 다른 한 편의 과학연극 대본을 썼다가 공연을 올리길 포기한 적이 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너무 재미가 없었다. 광학의 역사라는 소재의 문제가 아니고, 그걸 연극으로 풀어내는 내 능력이 문제였다. 한창 그 망한 대본을 쓸 때, 만지트 쿠마르의 “양자혁명: 양자물리학 100년사”를 읽었다. 그 책에서 아인슈타인의 상자 사고실험을 접한 나는 ‘이렇게 아름다운 건 관객들이 한 번 보고 이해하기에는 너무 복잡하겠지’ 하는 마음에, 그 사고실험을 대본에 넣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 이 양자역학 연극은 무대 위에 바로 그 사고실험을 올렸다.

 연극의 사고실험 장면을 보면서, 대본을 쓰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 사고실험에 대해 읽으면서 느낀 경이감과 함께, 이 경이감을 관객들과 공유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 느낀 아쉬움이 기억났다. 그러나 그날 본 연극은 나의 아쉬움이 때 이른 절망이었음을 증명했다. 시도해 봐야만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알 수 있는 거니까. 내가 학교 공연에서도 차마 시도하지 못했던 것을, 연극의 자연선택이 가차 없이 이뤄지는 대학로에서 시도하는 이 극단이 궁금해졌다. 그 안에서 함께 부대끼며 일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나는 학교에 다니기를 잠깐 멈추고, 이 극단에 뛰어들었다. 무작정 이메일을 보낸 나를 극단 사람들은 너그럽게 받아주었다. 내가 관객으로 봤던 양자역학 연극은 더 많은 배우와 함께, 이전보다 정돈된 대본으로 대학로에서 재공연을 올리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연습 과정을 지켜보면서, 이 사고실험과 수식들이 어떻게 연극의 일부가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극단의 기획을 맡고 계신 분은 물리교육과 박사 과정을 밟고 계신 연구자이자, 같은 학교의 선배이자, 나의 직속상관이었다. 바로 이분이 수식을 정리해서 배우들에게 유도 과정과 식들의 의미를 알려주신 거였다.

 첫 공연 전날, 하이젠베르크 역할을 맡은 배우 언니가 기획님에게 물었다. “오빠, 수식을 그냥 줄줄 쓰다 보니까 외운 티가 나는 게 싫더라고. 그래서 중간에 텀을 두고 고민하는 연기를 넣고 싶은데, 어디서 쉬는 게 좋을까?” 기획님이 대답했다. “고민을 하고 싶으면 (수식을 가리키며) 이 줄에서 하는 게 제일 좋아. 불확정성의 원리에서 나온 이 델타 p를 보다가 충격량을 떠올리는 게 되게 신기한 거거든.” 대답을 마친 기획님은 보어 역할을 맡은 배우 분을 불러서 설명했다. “광자가 눈금자를 때리면서 측정값이 불확실해진다는 걸 표현하는 그림을 그릴 때, 꼭 화살표를 수평으로 그릴 필요가 없어요. 광자의 방향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눈금자에 이렇게 대각선으로 화살표를 그리셔도 돼요.” 그리고 하이젠베르크와 보어를 맡은 배우 분들 모두에게 말했다. “이 장면에서 보어랑 하이젠베르크가 수식을 같이 쓰는 건, 과학자들이 대화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거예요. 수식은 과학자들의 언어거든요. 그래서 서로 이런 수식을 쓰면서 아 그렇구나, 와 너 진짜 대단하다, 이걸 여기서 생각해내다니, 이렇게 인정도 하고 감탄도 하면서 연기해주셔야 돼요. 안 그러면 관객들은 이해할 수 없는 수식이랑 뒤통수밖에 못 보거든요.”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생각했다. 이 어려운 이야기를 감히 무대에 올리겠다고 기획하고, 실제로 이 이야기가 연극으로 올라가게 하는 사람이 바로 기획님이었구나. 세상의 모든 직속상관이 그렇듯이, 기획님은 내가 일을 그르치면 혼을 냈고 바보 같은 실수를 하면 놀렸다. 함께 공연 홍보 메일을 돌리고, 관객들에게 표를 나눠주었으며, 밥을 먹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한 번도 기획님이 멋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 날, 기획님이 멋있어 보였다. 처음으로.

기획님이 직접 한 판서. 좌측 상단에 충격량과 운동량이 등장하는 부등식이 있고, 그 아래 눈금자와 대각선으로 그린 화살표가 있다. 매 공연에서 배우들은 이를 완벽하게 재현한다.

 그러나 이 환상은 오래가지 않았다. 같은 날 밤, 인터파크에서 예매자 명단을 확인하려는데 극단 계정으로 로그인하라는 창이 떴다. 그런데 내가 극단에 들어오기 전 만들어진 이 계정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당장 다음 날 공연이 시작하기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우리는 아이디를 찾고 비밀번호를 맞춰보기 시작했다. 기획님은 지금까지 극단에서 만들었을 법한 모든 비밀번호를 고안해냈다. 대문자가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 특수문자가 한 개일 경우와 두 개일 경우, 그 특수문자가 #일 경우와 *일 경우. 그리고 그것들을 하나하나 쳐 보기 시작했다.

 모든 조직의 막내가 그렇듯이, 스스로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데에 경각심을 느낀 나는 뭐라도 돕기 위해 기획님이 말한 경우들을 핸드폰 메모 앱에 정리했다. 모든 경우의 수는 2^3=8이었고, 비밀번호를 다섯 번 틀리면 1분을 기다려야 하므로 3분 이내에 비밀번호를 찾는 것이 이론적으로 가능했다. 이러한 나의 분석을 이야기하다가 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고, 내가 말하는 동안 무작정 비밀번호를 넣어 보던 기획님도 웃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는 한참을 웃다가, 본격적으로 비밀번호를 찾기 시작했다. 기획님이 비밀번호를 하나 쳐 보면, 나는 메모 앱을 연 채로 옆에 서서 그 비밀번호에 체크 표시를 했다.

 놀랍게도—혹은 전혀 놀랍지 않게도—리스트 상의 모든 비밀번호를 시도해 봤지만 로그인에 실패했고, 결국 내가 인터파크 측에 이메일을 보내서 다음 날 점심시간쯤 새로운 계정을 발급받았다. 기획님은 정말 오랜만에 내게 “잘했어요.”라고 칭찬해 줬다. 언제나 그렇듯이, 어느 정도는 놀리기 위해서 한 말이었다. 그렇게 기획님에 대해 잠깐 느낀 경이감은 깔끔하게 사라졌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내가 연극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연극은 곧 바스러질 환상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한 편의 연극을 올리기 위해서 들어가는 노력은, 무대 위의 환상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지하 연습실에서 매일 리허설을 해야 하고, 가끔은 바퀴벌레가 그 리허설에 찬조 출연을 하며, 연습실에 딸린 화장실에서는 항상 암모니아 냄새가 난다. 우주와 양자에 대한 수식을 쓰고 관객들이 사고실험을 보며 느낄 카타르시스를 상상하다가도, 잊어버린 비밀번호를 찾기 위해 경우의 수를 계산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상과 현실의 괴리를 그토록 극명하게 느끼며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생생한지. 그런 괴리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일하는 것이 얼마나 살아 있다고 느끼게 해 주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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