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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도영 May 24. 2022

야 너두 뿔이 있어

내가 만난 유니콘들—3.7

지난 글이 내가 K 선생님의 첫 수업날 그가 유니콘임을 직감했다는 말로 끝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건 사실과 약간의 거리가 있다. 그 당시 나는 유니콘이 뭔지 몰랐다. 유니콘에 대한 개념은 없는 상태로, 혹은 그 개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K 선생님의 자기소개를 들으면서 ‘이 사람은 보통 사람들과는 뭔가 다르다’ 하는 강렬한 인상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나는 곧 선생님에게 끌리기 시작했다. 이상할 건 없었다. 그는 여중의 희귀종, 젊은 남자 선생님이었으니까. 20대 남자 선생님은 항상 학교에서 인기가 많았다. 그건 상상하기 쉬운 그런 간질거리는 이유 때문이라기보다는(아니, 다들 무슨 상상을 하시는 건지?) 그들이 항상 쾌활하고, 다가가면 반갑게 맞아주는 종족이었기 때문이다. K 선생님도 그랬다. 그래서 나는 처음에 이 감정을 대수롭게 여겼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 감정이 대수롭지 않아졌다. 그 수업 이후로는 대수롭게 넘길 수가 없었다. K 선생님과 함께하는 수업의 두 번째인가 세 번째 시간, 선생님이 풀이를 준비해온 문제들 중 ‘다각성의 대각선 개수 공식’을 알아야만 풀 수 있는 게 나왔다. 그러자 선생님은 잠깐 문제풀이를 멈추고, 칠판에 다각형들을 간단한 것부터 복잡한 것 순서대로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서툰 손놀림으로 물백묵 색을 바꿔가면서 대각선을 그리고, 그 개수를 썼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물었다. “근데 이렇게 다 그려서 세기에는 대각선이 너무 많아지잖아. 그래서 우리가 공식을 알아야 되는데, 그 공식은 도대체 어떻게 알지?” 선생님의 질문은 순진하다 싶을 정도로 진지하게 들렸기 때문에, 공식을 이미 외우고 있더라도 대답해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이윽고 선생님은 내게 너무나도 익숙한 대각선 개수 공식 유도 과정을, 고통스러울 정도로 천천히 짚어나갔다.


먼저 다각형의 한 꼭짓점에서 그을 수 있는 대각선 개수를 알아야 한다. 그러면 그걸 전체 꼭짓점 개수에 곱해서, 전체 대각선 개수를 알 수 있을 테니까. 대각선이라는 건 다각형에서 나란히 있지 않은 꼭짓점들—즉 변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꼭짓점들—을 잇는 선을 말한다. 따라서 한 꼭짓점에서는, 자기 자신과 양 옆 꼭짓점을 뺀 다른 모든 꼭짓점에 대각선을 그을 수 있다. 그러므로 한 꼭짓점에서 그을 수 있는 대각선의 개수는 (전체 꼭짓점 개수)-3이 된다. 이건 어떤 다각형에서든 마찬가지로 성립한다. 삼각형에서는 3-3=0, 사각형에서는 4-3=1, 오각형에서는 5-3=2, 육각형에서는 6-3=3. 이런 식으로 계속 헤아릴 수 있다.


 이렇게 대각선을 그을 수 있는 꼭짓점이 그 다각형의 꼭짓점 개수만큼 있으므로, 한 꼭짓점에서 그을 수 있는 대각선의 개수에 총 꼭짓점의 개수를 곱하면 총 대각선의 개수가 나온다. 정말 그럴까? 확인해 보면 일단 삼각형에서는 맞는 듯하다. 3*0=0이니까. 그런데 사각형에서부터 뭔가 이상하다. 4*(4-3)=4, 5*(5-3)=10, 6*(6-3)=18. 개수가 하나도 안 맞는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관찰해 보면, 식으로 계산한 대각선의 개수는 단순노동으로 그려서 센 개수의 딱 두 배다. 이 말은 계산값이 정확히 두 배 크게 잘못 나왔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계산값을 2로 나누면 해결된다. 그런데 왜 그래야 하는 걸까? 분명 한 꼭짓점에서 생기는 대각선 개수에, 전체 꼭짓점 수를 곱하면 총 대각선 수가 나와야 하는데 말이다.


그 답은 ‘중복’에 있다. 한 꼭짓점에서 그을 수 있는 대각선의 개수는 (전체 꼭짓점 개수)-3이 분명하다. 하지만 여기에 전체 꼭짓점 개수를 곱해 버리면, 모든 대각선을 두 번씩 세는 셈이다. 모든 대각선은 한 쪽 꼭짓점에서 시작해서 다른 쪽 꼭짓점에서 끝나는데, 이렇게 계산해 버리면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그은 대각선’과 ‘다른 쪽에서 한 쪽으로 그은 대각선’으로 한 대각선을 두 번 세는 거니까. 와, 이렇게 말하니까 너무 복잡하다. 그림을 쓰자. K 선생님이 그날 그 수업에서 그랬듯이.

K 선생님이 그린 오각형은 그의 글씨체만큼 삐뚤빼뚤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개의치 않고 노란색 백묵으로 꼭짓점 B에서 그을 수 있는 대각선들을 그렸다. 오각형이니까 5-3=2, 2개 맞다. 마찬가지로 꼭짓점 A에서도 2개, 꼭짓점 C에서도 2개…… 이런 식으로 꼭짓점 E에서도 2개다. 그런데 꼭짓점 E에서 그을 수 있는 대각선들을 파란색으로 표시하면, 노란색과 파란색이 한 번 겹친다. 중복이다. 따라서 각 꼭짓점에서 그을 수 있는 대각선의 개수를 모두 더하면, 이런 식으로 같은 대각선을 두 번씩 중복해서 세는 셈이다. 다르게 말하면, 대각선 BE와 대각선 EB를 한 번씩 구분해서 세는 오류를 범하는 거다. 사실 B에서 뻗어나간 노란색 대각선과, E에서 뻗어나간 파란색 대각선은 같은 선분인데 말이다.


이는 대각선 BE(혹은 대각선 EB라고도 부를 수 있다)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모든 대각선이 그렇다. 어떤 대각선이든 오각형의 ‘한 꼭짓점’에서 시작해서 ‘다른 한 꼭짓점’에서 끝나는데, 우리는 그걸 ‘한 꼭짓점’ 기준으로 세고 나서 ‘다른 한 꼭짓점’ 기준으로 다시 한 번 세기 때문이다. 결국 올바른 값을 구하려면, 한 꼭짓점에서 그을 수 있는 대각선의 개수에 그 다각형의 꼭짓점 개수를 곱한 뒤 이를 2로 나눠줘야 한다.


이 길고 긴 이야기를 K 선생님은 친절하게 풀어냈다. 그의 설명이 끝났을 때 칠판의 모습은 이랬다.

모든 설명을 끝낸 그는 반복해서 강조했다. “이 과정을 아는 게 중요해. 공식 외우는 것보다 이게 더 중요한 거야.”

난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저 쌤과는 무조건 친해져야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건 그냥 느낌이 아니라 신탁이고 계시였다. 다각형의 대각선 개수 공식 같은 주제에 그렇게 진심일 수 있는 사람은 정말 극소수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이렇게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너무나도 명확하게 광고하고 다니다니. 이게 신의 계시가 아니면, 신은 커뮤니케이션을 다시 배워야 하는 거다. 이렇게 극적으로 등장한 K 선생님이 한 학기 뒤 그냥 사라지게 둘 수는 없었다.


하지만 운명을 감지하는 것과 그 운명을 실행하는 것은 별개다. 나는 누군가와 친해지는 재능을 임의의 미소량 엡실론(대충 0.0000001보다도 더 작은 양이라는 뜻이다. 해석학 증명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인데, 나는 평소에 ‘1도 없다’라는 표현의 대체제로 쓴다)만큼도 타고나지 않았을 뿐더러, 상대는 (자의로든 타의로든) 갓 데뷔한 학교의 아이돌이었다. 나 말고도 친해지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그런 사람한테 어떻게 접근하지?


“야, 저번에 누가 동물 잠옷 입고 엑소 콘서트 갔대.” K 선생님과 친해질 방법을 강구하던 어느 날, 엑소 팬인 내 친구가 급식을 먹다 말고 말했다. “왜?” 내가 조건반사적으로 물었다. 진짜로 궁금해서 물어본 건 아니었다. “팬들 사이에서 튀려고. 근데 그게 통해서 콘서트 내내 백현이랑 열 번도 넘게 아이컨택했대.” 다들 일상복을 입고 있는데 그 사이에서 동물 잠옷 차림의 사람이 있으니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공연하는 가수의 시선이 쏠렸다는 거였다. “그래서 나도 이번 콘서트 옷 진짜 신기하게 입고 가려고. 근데 뭐 입지?” 친구의 말에 갑자기 머리가 돌아가는 듯했다. 튀자! 평범한 팬들 사이에서 튀자!


하지만 나에게는 동물 잠옷이 없었다. 대신 래리 고닉이 쓴—만화책이니까 ‘그린’이라고 해야 하나—책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미적분”이 있었다. 이거면 중학교 문제집을 들고 찾아온 다른 팬들 사이에 파묻혀서도 K 선생님과 ‘아이컨택’을 하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한 나는, 그날부터 책을 독파하면서 질문이 생길 때마다 메모지에 정리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서 선생님이 학교에 올 때마다, 그 질문들을 가져가서 하나씩 해결했다.

래리 고닉 저, 궁리 펴냄.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미적분” (사진 출처: yes24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미적분”)

고닉 아저씨의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미적분”은 제목만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지 그 속은 극악무도했다. 고등학교 수준을 넘어서, 대학교 교재에나 나오는 증명들이 난무했다. 더 미치겠는 점은 그 어려운 내용이 만화로 그려져 있으니 이 내용이 진짜로 어려운 건지, 아니면 귀여운 내용을 내가 멍청해서 못 이해하는 건지 구분이 안 되는 거였다. 그래서 매주 질문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K 선생님은 “그건 너무 어려워서 아직 몰라도 돼”라는 말 대신 고닉 아저씨보다도 친절한 설명과 명확한 증명을 제공했다. 어느 날은 연쇄법칙의 증명 과정이 하나도 이해가 안 됐다. K 선생님은 내 푸념을 듣더니, 다음 쉬는 시간에 다시 오라고 했다. 한 교시 뒤, 교무실로 찾아가자 선생님은 자기 방식대로 새로 한 연쇄법칙의 증명을 적어놓았다. 그것도 가정통신문 뒷면에, A4용지 한바닥 가득히. 선생님은 내가 오기 전에 채워둔 그 종이를 보여주면서, 합성함수의 미분이 왜 연쇄법칙을 따르는지 차근차근 증명해 주었다. 다각형의 대각선 개수 공식을 유도할 때와 같은 친절함과 열정으로. 그러자 연쇄법칙의 증명이 대각선 개수 공식만큼 직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날 이후로, 미적분 문제를 풀 일이 없는 지금까지도 연쇄법칙이 뭔지를 잊어버린 적이 결코 없다. 그건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다음 글에서 또다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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