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에세이모음#5
퇴근 후 오랜만에 서랍장을 열었다. 지나온 삶의 의미가 담긴 물건을 모아둔 서랍장에서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반가이 인사를 건넨다. 고장 난 MP3, 처음으로 산 휴대전화, 기업 면접자 명찰, 취업 후 처음 받은 명함. 그리고 이내 손길은 바람 빠진 낡은 노란색 풍선을 잡고 멈춰 섰다.
쪼그라들어 있었다. 그 언젠가는 무언가로 가득 차 있었던 풍선이었다. 그러나 단단히 묶여 있던 바람구멍 사이로 세월 따라 조금씩 새어 나왔던 것이 어느 날 마지막 숨을 다 뱉어내고 이제는 바싹 쪼그라진 채로 마찬가지로 쪼그라든 내게 인사를 한다. 그 시절의 그 마음은 발가락을 가려버린 뱃살과 바꾼 것이냐고.
7년 전 겨울,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길었다. 졸업하면 곧장 취업할 수 있다던 나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취업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모든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없지만, 열심히 살았다고 자신할 수 있었던 나의 대학 생활은 얼어붙은 고용시장에서 수없이 열심히 살아온 대학생의 한 명에 다름없었다.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문고리를 잡고 늘어서기를 수십 차례, 몸과 마음은 넝마가 되어갔다. 자신감은 독이 되어 나를 가두고, 부끄러움은 나를 밑창으로 끌어내렸다. 나는 그렇게 고향으로 내려왔다. 아버지는 그저 고생했다며 못난 아들을 안아줄 따름이었다.
집으로 내려온 지 일주일, 출근하는 아버지의 뒤를 배웅하며 그의 기술을 배우겠노라고 말하였다. 아버지는 배관사였다. 나는 그를 존경하여 높이 받들어 철의 세공사라고 치켜세웠지만, 사람들은 그를 노가다꾼이라고 불렀다. 아버지에게 있어 제일 큰 바람은 자신의 자식은 자신과 달리 여름에는 에어컨이 나오고 겨울에는 난방되는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만 여름에 땀으로 목욕하고 겨울에 추위로 기침을 달고 사는 그에게 그것은 너무도 먼 바람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삶과 바꾼 돈으로 나를 공부 시켰다. 대학입학 소식에 자신의 인생 최고의 날이라며 눈물을 흘렸던 그에게 4년제 경영학과의 아들은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빠지지 않는 자랑거리였으며 자신의 인생을 반추(反芻)하는 상징이었다. 나는 그런 아버지에게 그의 일을 배우겠다 말하며 그의 지난 삶을 부정했다. 그날 밤 부엌에서 들리는 아버지의 자작(自酌)소리를 들으며 한참을 숨죽여 울어야만 했다.
그 후로 아버지와 아들의 불편한 동거가 며칠간 이어졌다. 그날 이후로 아버지는 말을 잃으셨고 나는 방구석 더욱 깊숙이 침잠했다. 그리고 그해 연말, 퇴근 후 아버지는 방문을 두들겨 여전히 잠든 나를 깨우고는 새해 해맞이 행사 참여를 제안했다. 한국에서 가장 해가 빨리 뜨는 간절곶에서 신년의 힘찬 출발을 시작하자는 것이었다. 작은 변화라도 만들어주기 위해 고심했을 아버지의 마음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그렇게 아버지와 나는 새해 해맞이 행사로 가는 차에 몸을 실었다.
차 안에서 아버지는 며칠간 참고 인내했던 재도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그간 쌓아온 공부가 적지 않고 이렇게 좌절해 무너져 내리기에는 아직 젊고 기회가 많다는, 취업에 실패한 아들에게 아버지가 통상적으로 하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의 끝은 으레 그러하듯 58년 개띠, 베이비붐 세대로서 한국의 현대사를 정면으로 뚫고 온 아버지의 세대가 겪은 고생, 끈기와 투지, 자식 세대와의 차이로 이어졌다. 나는 그저 극심한 단절을 느끼며 고요한 적막, 창밖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나의 미래를 보고만 있었다.
새벽 이슬길을 달려 도착한 간절곶에서는 해맞이 행사가 한창이었다. 제일 큰 행사는 소원풍선 날리기였는데 소원을 작성한 종이를 풍선에 매달아 일출 시간에 맞춰서 날리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언제 갔다 오셨는지 취업 성공이라는 글씨가 크게 쓰인 풍선 하나를 내게 건넸다. 아들이 좋아하는 노란색 색깔을 받았다고 웃는 아버지의 미소가 눈에 밟혀 못 이긴 척 풍선을 받아 손에 쥐었다.
잠시 후 까마득한 어둠을 지우며 새해의 첫 해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간절곶을 가득 메운 인파는 새해가 밝았다는 사회자의 지휘에 따라 그 일출을 배경으로 형형색색의 소원풍선을 날려 하늘을 수놓았다. 각자의 간절한 염원을 담아 수만 개의 풍선이 하늘로 날아올랐지만, 그중 몇몇 풍선은 날아오르지 못하고 땅으로 떨어졌다. 풍선 안의 헬륨가스가 부족한 것이었다. 그리고 취업 성공이라는 소원이 묶인 나의 노란 풍선 역시 하늘을 향해 날아가지 못하고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이것마저도 날리지 못하는 내가 무슨 취업을 한다는 말인가. 다른 풍선들처럼 시원하게 날아가지 못하고 땅바닥에서 바둥거리는 것이 나를 닮아 속상함이 솟구쳤다. 속상함이 짜증으로, 짜증이 미움으로 변해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때 아버지는 땅에 떨어진 풍선을 주워들고 묶인 풍선의 바람구멍을 풀어 자신의 숨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헬륨가스가 아닌 아버지의 숨을 품은 풍선은 더 무거워져서 더 빨리 땅에 떨어질 것이 자명했다. 그러나 그 잘난 대학공부로 설명할 수 없는 아버지의 숨을 불어넣는 행위를, 볼이 터지도록 한가득 숨을 모아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뱉어내는 그 일련의 모습을 단지 바보스럽다고 말리기에는 해를 등진 그가 눈이 부셨다. 한숨에 아들이 세상을 비상하길 바라는 간절함과 한숨에 쪼그라들어버린 아들에 대한 걱정과 또 한숨에 아버지의 인생이 담겨갔다.
모든 풍선이 하늘의 점이 되어 사라질 때쯤이 되어서야 아버지는 내 가슴만큼이나 커진 풍선을 들고 더 빨리 가라앉는다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거칠어진 손에 용케 풍선이 터지지 않아 다행이라며 풍선과 함께 그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해 나는 다시 도전했고 다시 실패했으며 그러나 또 도전하여 마침내 취업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5년이 지났다. 매일매일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그 시절 가졌던 그 벅찬 마음과 타오르던 끈기는 언제 잃어버렸는지도 모른 채,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서랍장을 뒤척이는 30대가 되어버렸다. 다행히 비록 바람은 빠졌지만 여전히 서랍장에 노란 풍선은 남아 있었다. 아버지께 이 낡은 풍선에 숨을 넣어달라고 하면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하는 즐거운 상상을 하며 힘껏 내 숨을 불어 넣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