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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독날 Sep 23. 2022

아가씨는 대학에서 도대체 뭘 배웠길래?


지금부터 시간여행을 떠나려고 한다.

가끔씩 그리울 때가 있다. 나의 24살. 다시 돌아간다면 좀 더 지혜롭게, 좀 더 현명하게, 좀 더 밝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내 기억 속에 잠자고 있던 나의 과거. 지금의 내가 꺼내 주지 않으면 영원히 무덤 속으로 사라질 나의 과거.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다고, 열심히 잘 살았다고, 24살 앳된 아가씨에게 40살 두 아들의 엄마가 위로해주고 보듬어주고 싶다.

노트북 앞에 앉아 옛 기억을 떠올려본다. 떨리고 설레고 두렵기까지 하다. 그래도 용기 내어 본다. 어렴풋한 기억은 나만의 상상력으로 그럴듯하게 한 번 채워보는 것도 괜찮겠지?




첫 출근부터 멘붕

저기 멋지고 커다란 6층 건물. 구청장님께 임용장을 받고 있는 내가 보인다.

정숙해 보이는 어두운 색 정장에 뾰족구두. 어려 보이지 않으려고, 나이 들어 보이려고 애쓴 흔적이 보인다. 동기들과 직원들의 축하를 한 몸에 받은 후 안내하시는 분을 따라 올라간 4층. 25명 남짓 직원들과 함께 근무하는 사무실 저기 저 맨 끝에 내 책상이 보인다. 난 우리 과의 막내. 나이로나 직급으로나. 구청에서도 제일 막내라 직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이제 그럼 내 자리로 가 볼까?

매번 주인이 바뀌는 자리, 너무 어지럽고 지저분하다. 정리를 하고 싶지만 뭐가 중요한지 알 수 없다. 나중에는 알게 되었다. 책상이 왜 그렇게 지저분하고 더러울 수밖에 없었는지... 주사님들의 몸에서는 왜 그렇게 참을 수 없는 냄새가 났었는지... 그 냄새가 익숙해지기까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 냄새는 곧 나의 냄새이기도 했으니까... 



인사발령으로 며칠 뒤 다른 사업소로 떠나는 사수가 뭘 할지 몰라 눈만 껌뻑거리고 있는 나에게 슬그머니 다가온다. 가슴이 두근두근. 자기는 이제 필요 없다는 듯, 앞으로 죽도록 봐야 할 거라며 한가득 책을 안고서.

수질환경보전법(현. 물환경보전법)

오수분뇨 및 축산폐수의 처리에 관한 법률(현. 하수도법, 가축분뇨의 관리 및 이용에 관한 법률)

대기환경보전법

토양환경보전법

소음진동관리법

실내공기질 관리법

알 수 없는 자치법규(조례, 규칙), 행정규칙(훈령, 예규, 고시)까지

       .

       .

       .

"이거 시간 날 때마다 읽어보세요. 당장 다 알아야 일할 수 있어요. 열심히 공부해야 돼요. 대학교 때 공부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랬다. 나는 환경공학을 전공하고 수질환경기사 자격증을 땄다. 그리고 졸업한 그 해 환경직 기술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머리가 한창 잘 돌아갈 때라 내친김에 대기환경기사, 소음진동 기사 자격증 공부도 했다. '그런데 저기요 사수님... 대학교 때 공부는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나보고 또 열심히 공부하라고요? 그러니까.. 아직도 공부할 게 남았다는 말씀이신가요?' 내 젊은 시절 다 바쳐 하루 15시간씩 공부만 했는데, 드디어 바라던 공무원이 되었는데 이제 좀 쉬어도 되는 거 아니었어? 칼퇴해서 취미생활도 하고 연애도 하고 돈도 팍팍 쓰고 막 그러는 거 아니었어?




첫 출장. 엄마야 나 살려.

아직 환경직 공무원의 실체에 대해 잘 모르던 철없던 시절. 하늘하늘 프릴 스커트에 하얀 블라우스. 키 작은 나의 자신감 상징인 하이힐까지. 오늘 패션은 대만족. 일주일 출근이 힘들었지만 토요일만큼은 오전 근무이기에 기분은 하늘을 찌른다.




"○○씨! 오늘 현장 확인할 곳이 몇 군데 있어요. 같이 가보죠!"

"네?? 네!!"



허둥지둥 주사님을 따라나선다. 신분증을 주섬주섬 목에 걸고, 수첩과 필기구를 챙겨서. 참, 그 시절 디카(디지털카메라)는 출장 필수품.


"오늘 어디 가는 거예요?"

"정화조 청소 미실시자 과태료 부과 전 현장 확인이요. 갈고리목장갑 챙기세요."






출장용 스타렉스 차에 올라타는 순간 오늘 패션은 최악임을 깨달았고, 우리는 바닷가 근처 멋진 어느 별장 앞에 도착했다. 낯선 우리를 보고 짖어대는 주인 개. 이 세상에서 개를 제일 무서워하는 나는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주사님 앞에서 눈물, 콧물을 보이며 그만 엄마를 부르짖고 말았다.



처음 일할 당시 오수분뇨 및 축산폐수의 처리에 관한 법률(현. 하수도법) 시행규칙 제30조(오수처리시설 등의 관리 기준) 제1항 제3호에 따라 단독정화조는 연 1회 이상 내부 청소를 실시하여야 하고, 미이행 시 과태료 처분 대상이었다. 따라서 과태료 처분 전 단독정화조 설치 소유자와 연락도 전혀 안 되는 시설물에 대해서는 정화조 내부 상태 현장 확인 후 빈 집이거나 화장실 사용량이 너무 적을 경우로 확인될 시 과태료 처분을 유예해 줄 수가 있었다.




할아버지의 질문에서 오는 현타

여기서 정화조 내부 상태 현장 확인이란... 이런 걸 말한다.



그림과 다르게 현실 속 정화조 뚜껑 안의 모습은 아름다운 달과 반짝이는 별이 아니라...

참을 수 없는 냄새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굳이 안 봐도 될 둥둥 떠다니는 남의 ×이다.



너무 놀랐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초승달같이 생긴 남의 ×을 보며 디카 셔터를 열심히 누르고 있었다. 그때 막 도착하신 주인 할아버지.

정화조 뚜껑 안의 그 집 ×을 다 같이 바라보다 주인 할아버지께서 내게 던진 이 한마디!

 


"아가씨는 대학에서 도대체 뭘 배웠길래 남의 집 × 보는 일을 하노?"

"그러게요, 선생님. 저도 제가 이런 일을 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하고 피식 웃고 말았다.



그렇게 난 두꺼운 환경법과 법제처와 한 몸이 되어 남성도 여성도 아닌 중성의 삶을 살기로 했다.

무서운 척, 약한 척, 힘든 척할 수 없었고, 언제나 강한 척, 자신 있는 척, 안 힘든 척해야 했다.



24살 앳된 아가씨는 이제 공무원이란 신분으로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매일 등산복에 등산화를 신고 출근하기로 했다.

오직 학교에서 배운 대로, 법에서 말하는 대로 환경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젊은 시절을 다 불태우겠다고 다짐했다.








사춘기 두 아들아.

네가 언제 이 글을 읽을지는 모르겠구나.

엄마의 첫 직장생활 이야기 어땠니?

학교에서 배우는 것과 현실에서 겪게 되는 일은 이렇게 많이 다르기도 하단다.

아직 무엇을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잘 모르는 거 당연한 거야.

너무 마음 급히 먹을 필요 없단다.


그때 일은 힘들었지만, 엄마는 배운 것도 참 많았어.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엄마의 마음 그릇이 참으로 작다는 것도 깨달았지. 그 이후에 환경분야에서는 더 전문가가 되기 위해 학교 다닐 때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세상에 대한 편견도 점점 버리고 다른 사람의 입장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단다.


환경직 공무원으로서 더럽고, 위험하고, 힘든 일 하면서 강한 척, 안 힘든 척했던 경험이 너희 둘 낳아 키울 때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몰라.

성인이 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야. 학창 시절이 제일 행복했다면 지금은 안 믿기지? 나도 너만 할 땐 그랬으니까... 미래를 향해 노력하고 달려가는 건 맞지만 너무 앞을 내다보지는 않아도 돼. 지금 현재 주어진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하다 보면 결국 네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을 테니까... 너무 걱정 말고, 불안해하지 말고, 너만의 인생을 펼쳐나가렴. 엄마는 그저 너의 곁에서 든든히 지원군이 되어줄게.


사랑한다. 두 아들아.

  

                                                                                                        2022. 9. 23. 금. 엄마가.






차차 천천히 하나씩 써나가 보려고 합니다.


아들 키우기는 껌. 나의 3D 직업

위험천만 자동차 배출가스 단속

증거 확보 비산먼지와의 싸움

몇 년간의 끈질긴 소음 민원
똑같은 시기 참을 수 없는 악취 신고

구수한 축사 이야기

의외로 자주 기름 유출 사고

인력 동원 비상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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