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 보스턴 여행하기 2일 차
한국의 서울대학교를 가본 사람은 잘 알 것이다. 서울대학교에 가려고 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에 내려서 두리번거려도 서울대학교는 코빼기도 안 보인다. 버스를 타고 언덕을 넘어야 비로소 서울대학교의 엠블렘이 세워진 정문을 볼 수 있다. 고등학생 시절 "좀만 더 가면 입구가 나올 거야"라는 그릇된 생각으로 서울대입구 역에서 내린 후 30분남짓 걸어서 '진짜' 서울대학교 입구에 비로소 도달했던 아찔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미국에서 이 정도면 양반이다. 그래도 한국은 도시에서 대학교로 가는 지하철이나 버스라도 있지 않은가? 미국에서 내가 다니고 있는 학교는 시골에 있어서 시내버스 밖에는 움직이는 대중교통이 없다. 물론 미국은 보통 개인이 차를 사서 자차로 움직이는 경우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굳이 대중교통의 유무라는 동일한 잣대로 놓고 보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의 요지는, 보통의 미국 대학과는 달리, 대중교통이 잘 구비된 보스턴에서 하버드 대학교를 가기 위해서는 보스턴 지하철인 'T'를 타고 'Harvard' 역에 내리면 10분 정도 걸어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하버드를 가기 위해서는 내가 머물던 숙소에서 총 3가지 노선을 거쳐야 했다. Blue line으로 시작하여 Green line을 거쳐 Red line에 있는 Harvard 역에 내리면 된다.
지하철의 생김새가 노선마다 다른 건 한국도 똑같지만, 보스턴의 Green line 은 처음 봤을 때는 좀 신기했다. 나름 지구촌 여러 곳을 다녀봤다고 생각했는데 기차도 아닌 지하철 차량에 계단이 있는 것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막상 하버드 역에 내리고 나니, 어딜 가야 할지가 좀 애매했다. 사실 하버드를 구경하겠다는 막연한 목표만 있었지, 정확히 어떤 건물을 가야겠다는 식의 뚜렷한 목적이 없었기에, 내 머릿속 나침반은 한동안 갈 곳 잃은 채 헤매고 있었다. 한국과 달리 미국 대학들은 대학교의 입구가 딱히 있어서 어떤 경계선부터는 학교 지역이라는 개념보다는, 도시와 대학교 건물들이 혼재되어 있는 느낌이 더 크다. 그래서 그 대학교의 얼굴이라고 할만한 웅장한 입구 같은 게 딱히 없다.
그래도 나도 알고 누구나 알만한 장소가 하나 있다면, 하버드 도서관이다. '하버드 도서관의 새벽 4시'라는 책도 있고, 하버드 졸업사진에 보면 종종 배경으로 등장하는 장소가 하버드 도서관이다. 도서관 내부에 들어가서 '하버드 도서관의 오전 10시'는 어떤지 알아보고 싶었으나, 학생증이 없으면 출입이 안 되는 탓에 일찌감치 단념하였다. 하버드에 지인이 있었더라면 학교 곳곳을 둘러보면서 학교의 전통과 역사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을 텐데, 그것은 그냥 아쉬움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점심에 뭘 먹어볼까 찾던 중, 보스턴에만 있는 햄버거 체인인 Tasty burger 가 근처에 있는 걸 봤다. 보통 In-N-Out, Five guys, Shake shack처럼 서부, 동부 혹은 전국적으로 점포를 운영하고 있는 버거가 아니라면 나름의 단점이 있어서 전국적으로 흥하지 못했다는 선입견이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이 지역에서 밖에 접할 수 없는 브랜드라는 생각이 들어 결국 지갑을 열게 만들곤 한다. 무엇을 주문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배고팠던지라 육중한 녀석들로 주문했던 기억이 난다.
나름 이 지역에서는 인기 있는 햄버거 레스토랑인지, 오픈하자마자 사람들이 매장 안에 줄을 섰다. 햄버거 맛은 꽤 준수한 편이었고, 감자튀김과 양파튀김은 처음엔 맛있다가 나중에는 좀 느끼해서 결국 먹다가 버렸다. 그래도 햄버거만 놓고 보면 괜찮은 브랜드였다.
적당히 배를 채운 후에는 이공계 탑스쿨로 유명한 MIT로 향했다. 하버드와 MIT는 사실 이웃학교라고 해도 무관할 만큼 가까이 있다. 걸어서 20분이라니, 미국에서 이 정도면 사실상 같은 캠퍼스 지역이라고 해도 믿을만한 짧은 거리다.
학교 부지 자체가 크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Charles River를 따라서 강 옆에 길쭉하게 위치한 캠퍼스 지역은 사실상 이렇다 할 랜드마크가 하버드보다도 없었다. 어쩌면 전 세계의 석학들만 모인 이곳에서 랜드마크 타령이나 하는 내가 바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하나 유명한 건물이 있다면 바로 Great Dome(그레이트 돔)이다. 예로부터 이 돔 꼭대기에 MIT의 학생들이 온갖 장난을 쳐놓기로 유명하다. 일례로 1994년에는 저 돔 위에 경찰차를 올려놓기도 하고, 비교적 최근인 2019년에는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를 만들어놓기도 했다.
내가 갔을 때는 장난 같은 건 없었고, 학생이 없는 시기에 맞춰 열심히 보수공사를 하고 있었다. 역시나 학기가 아니라서 학교는 텅텅 비어있었지만, 건물 안에 들어가 볼 수 있었다. 내부라고 해서 대단한 건 없고 역시나 전형적인 학교의 모습이었다. 모두가 최고라 일컫는 학교라서 무의식적으로 마음속에 큰 걸 기대하고 있었지만, 그게 오히려 어리석은 생각이었던 것 같다. 최고의 학교는 건물이나 외관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그 학교를 이루는 교직원과 학생에서 비롯되는 것일 테니까.
MIT를 적당히 둘러보고 나니, 아침부터 땡볕 아래 걸어서 더위를 먹었는지 이상하게 어지럽고 피곤했다. 다음 목적지를 가기 위해서는 햇볕이 쨍쨍한 Charles River 사이를 잇는 다리를 건너서 가야 했으나, 도저히 그럴 엄두가 안 났다. 결국 "에라 모르겠다"라는 심정으로 홈리스처럼 벤치 위에 누워 잠깐 눈을 붙였다. 1시간 정도 지났을까? 옆에서 누가 지나가도 모를 정도의 숙면을 끝내고 나니, 어느새 해는 살짝 구름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고, 내 체력도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긴 여행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인지 몸이 많이 지친 것 같았지만, 보고 싶은 건 참을 수 없어서 다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다음으로 간 곳은 Acorn Street(아콘 스트리트)였다. 사실 대단한 곳은 아니고, 길바닥이 평범한 벽돌이나 아스팔트가 아닌 돌로 되어 있는 데다가 오르막길이라서 사진 명소로 유명한 곳이다. 큰 걸 기대하고 가면 눈앞에 펼쳐지는 모습에 다소 실망을 하게 되지만, 그래도 명색이 사진 명소라서 그런지 사진이 꽤 만족스럽게 나온다. 하늘이 좀 더 맑았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보스턴의 예쁜 거리를 사진에 담아 갈 수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
점점 날씨가 우중충해지는 게 딱 비가 올 날씨였고, 아니나 다를까 1시간 후면 비가 올 예정이라서 일찍이 여행을 마쳐야 할 모양이었다. 그래도 숙소로 돌아가기 전에 인근에 위치한 Boston common(코먼 공원)에 잠깐 들려서 산책을 했다. 사실 전날에 날씨가 좋았을 때 잠깐 입구만 들려서 대충 훑고 지나갔었는데, 오늘 날씨가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좀 더 열심히 봐 뒀어야 했다. 공원 안쪽에는 면적에 비해서 기념비나 동상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곳곳에 미국의 역사를 기념하는 조형물들과 동판들이 있었고, 몇 걸음 안 걸어도 바로 다른 것들이 내 옆에 보이곤 했다.
코먼 공원을 어느 정도 둘러봤는데도 비가 오질 않아서, 근처에 있는 Long wharf에 가서 바다 구경을 좀 하다 왔다. 말 그대로 기다란 선착장이다. 유람선을 비롯한 요트와 각종 보트들이 정박해 있었고, 바로 옆에는 보스턴 다운타운의 건물들이 보이는 곳이다. 부두와 도시가 붙어있는 모습이 굳이 한국으로 비유하자면 부산이랑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반박 시 당신 말이 맞습니다).
Long wharf에서 잠깐 바다를 보며 멍을 때리면서 이번 여행을 되짚어 보고 있던 찰나에 비가 오기 시작했다. 마지막 남은 나의 지하철 탑승권을 써서 숙소로 향하는 지하철을 탔다. 다음날 복귀하는 항공편이 새벽 5시에 출발이다 보니, 오늘은 무리하지 말고 어서 들어가서 일찍이 잠을 자 둬야 했다.
돌아가면서 보다 보니, 보스턴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매사추세츠 주의 자동차 번호판에는 대부분 "The spirit of America"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직역하면 "미국의 정신(?)"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는데, 참 잘 지은 것 같다. 미국의 많은 역사적 순간들이 자리했던 이곳 매사추세츠, 그중에서도 보스턴은 정말 미국의 역사와 전통이 어느 곳보다도 깊게 뿌리내린 곳이다.
여행을 마무리하며 생각해보니, 보스턴은 미국의 역사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갖고 있거나 갖춰진 지식이 있다면 좀 더 재미있는 장소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처럼 멋진 사진을 찍는 걸 좋아하거나 뇌리에 강한 시각적, 청각적 인상을 남기는 것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다소 흥미가 떨어지는 곳이다.
그래도 뉴욕과는 달리 차분하고 신사적이고 여유로운 이 도시의 분위기는 충분히 만끽했고, 만족스러웠다. 다만,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들에게 미국의 역사에 무지한 여행가가 역사의 도시를 탐방하고 쓴 무미건조한 여행기로 보스턴을 알아 가기엔 아쉬울 것 같아 다소 미안할 따름이다. 아무래도 여행 막바지에 내 텐션이 떨어진 것도 한몫한 것 같다.
보스턴은 그렇게 "보스턴만 보러 가기에는 아쉬운, 하지만 뉴욕이나 인접 도시를 가는 김에 들리면 좋은 그런 장소"로 내 기억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