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HD #상담센터 #문제아 #양극성_장애
올챙이와 찾아간 상담센터에서 꽤 오랜 시간을 들여 갖가지 검사를 마치고 일주일 후 다시 센터를 찾았다.
ADHD 검사 소견상 점수가 평균에 비해 다소 높게 나타나기는 했으나 ADHD라고 판명하는 기준 점수에는 미달이므로 올챙이는 ADHD가 아니다는 결과를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내면을 조금 더 알아보기 위해 놀이치료를 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고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물론, 엄마인 나도 상담을 받기를 자원했다.
나는 내 내면에 내재된 문제점을 알고 있었다.
가정폭력과 알코올 중독인 아버지 밑에서 신체적 정신적 학대를 받고 자란 상처받은 어린 시절 올챙이 마더가 내면 아이로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
내가 성인이 돼서는 '아버지의 모습을 닮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하고 다짐했건만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올챙이 앞에서 매를 들고 인상을 쓰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야겠다고 결심했다.
평소에 악을 쓰며 대들다가 매만 들면 한 없이 착하고 순한 아이로 되돌아오곤 했던 올챙이...
착하고 순한 올챙이로 되돌아오는 것이 아니고 아이가 내면적으로 곪아 썩어서 문드러지고 있었음을 깨닫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이는 ADHD도 아니고 또래보다 언어력이 뛰어나고 예술적 지능도 뛰어나다는 사실을 여러 가지 검사 결과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올챙이는 놀이치료를 몇 번 들어가더니 나중에는 놀이치료를 안 가겠다고 했다.
이유를 물었다.
놀이치료 선생님이 자기를 돈으로만 보는 것 같다고 했다.
무슨 말이냐 되물었더니 놀이치료시간에 자기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자꾸 시계만 보더라는 대답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짜리 여자아이의 영민한 대답에 난 수긍할 수밖에 없었고 올챙이의 의견을 존중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상담은, 상처받은 내면 아이를 만나 상처를 보듬고 다독거려 일으켜 세우기 위해 그 후로 2년간 계속되었다.
상담 센터를 다니고 었었던 2013년 가을, 서대문도서관에서 '행복'을 주제로 백일장이 열렸고 그 백일장의 수상작품집에 수록된 나의 반성문 같은 글을 옮겨 담아 본다.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아파트 벽면엔 커다란 글씨로 '홈타운'이라고 쓰여있다. '홈타운' 이름만 들어도 얼마나 포근하고 따뜻함이 전해지는가?
그러나 우리 집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퇴근해 돌아온 남편은 침대 위에서 이어폰을 꽂은 채 혼자만의 세상에 빠져 있고 이제 초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큰 딸은 내 눈치를 살피며 제 방 책상 앞에 앉아 붙박이로 한 시간째 제 방에서 꼼짝을 하지 않는다. 우리 집 막내딸은 또 다른 방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컴퓨터 앞에 앉아서 넋을 놓고 만화영화를 감상하고 있다.
작은방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만화 캐릭터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괴기스럽게 들리기까지 한다. 답답한 마음에 쓰레기라도 버리고 바람 좀 쐬면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아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집안 분위기만큼이나 무거운 기분으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데 '푸하하, 호호호, 하하하'하고 앞집에서 행복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익숙한 소리였지만 낯선 소리였다. 그랬다. 적막한 우리 집 현관문을 열고 한 발만 내딛으면 앞집에선 항상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래서 익숙한 소리였다.
분명 우리 집에서 들려오는 만화 캐릭터들이 내는 웃음소리와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기에 낯설게 느껴졌다. 우리 집에서도 가끔씩 커다란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큰 아이와 작은 아이가 싸우는 소리, 내가 아이들을 야단치며 고래고래 지르는 소리, 그 소리가 듣기 싫다는 의사 표시로 텔레비전 소리를 크게 틀어버리는 남편이 만들어내는 소음까지...
이런 환경 속에서 난 행복과는 담을 쌓은 채 살고 있었고 아이들을 화풀이 대상처럼 여기며 소위 잔소리 대마왕의 타이틀을 거머쥐고 있었다. 잔소리를 해서 먹히지 않으면 단골손님인 매를 들고 큰소리로 윽박지르기 일쑤였다.
가끔씩 앞집 엄마와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는 날이면 '어젯밤에 내가 애들을 쥐 잡듯이 잡았는데, 혹시 앞집까지 들리지 않았을까? 혹시 그 소리가 들려서 저 엄마가 나를 이상한 엄마로 생각하는 게 아닐까?' 하는 자기 불안에 시달리는 일이 점점 잦아져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매를 들고 아이를 인정사정없이 때리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툭하면 매를 들던 아버지의 모습과 겹쳐져 보였다.
내가 어릴 적, 그토록 싫어했던 아버지의 행동들을 그대로 따라 하고 있다는 사실은 깨닫게 되는 순간 내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렇다면 나의 사랑하는 딸들도 나중에 나와 똑같은 행동을 하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자 끔찍했다. 아이들을 학대했던 나 자신이 너무 싫어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대로 마냥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주변인을 통해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주는 상담코칭 지원센터를 소개받게 되었다. 처음엔 '내가 정신적으로 이상이 없고 다른 엄마들도 자식이 잘못하면 다들 매를 드는데 굳이 비싼 돈 들여가며 이런 곳을 다녀야 할 필요성이 있을까?', '과연 뭐가 달라지기는 하는 걸까?' 하는 의구심이 들어 상담소에 가는 것이 꺼려졌다. 하지만 그대로 폭력적인 엄마로 살며 폭력을 대물림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큰 용기를 내서 찾아간 상담소에서 난, 어린 시절 가정폭력에 짓눌려 살고 있는 10살짜리의 나 자신과 대면하게 되었다. 10살짜리의 나 자신은 너무나 예쁜 얼굴에 눈물범벅이었고 몸 곳곳에는 폭력의 상흔이 고스란히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다. 난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위로받지 못한 10살짜리 나 자신을 꼭 안아주고
네 잘못이 아니야, 넌 너무 사랑스러워, 누구도 널 이렇게 만들어서는 안 돼
하고는 두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가만히 돌이켜 보면 부모가 아이한테 매를 들 때, 정말로 아이가 대단한 잘못을 저질러 매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기보다는 스스로 억눌렸던 화가 자신도 모르게 만만한 아이를 향해 화풀이를 해댔던 일이 많았던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 역시 가정폭력의 피해자임과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제 겨우 10살짜리가 아무리 대단한 잘못을 저질렀을 지라도 그토록 맞아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초등학교 3학년인 내 아이가 어렸을 적 폭력에 익숙해진 내 모습과 겹쳐져 보이기 시작하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여러 차례 상담을 되풀이하면서 다시는 아이에게 매를 들지 않겠노라 다짐 또 다짐을 했다.
매를 들고 욕을 하는 대신 기다려 주고 참는 법을 배웠다. 내 안에서 시작된 작은 변화는 우리 집의 작은 변화를 가져왔다. 악다구니를 쓰던 아이들의 고함 대신 앞집에서 들려오던 웃음소리들이 우리 집에서도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했다.
'행복'이라는 것이 무언가 특별하고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와 우리 집과는 거리가 먼 일이라고 만 여겨졌었다. 그러나 폭력이라는 괴물을 내 속에서 내보낸 순간부터 행복이 가까이 있음을 느낀다.
나의 눈을 맞추며 웃어주는 아이의 눈동자 속에 비친 환한 웃음을 띤 내가 행복해 보였다. 가족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행복을 느끼고 만화영화를 보며 즐거워하는 아이들의 얼굴에서도 행복을 느낀다. 하교 후, 집에 들어서며 "학교 다녀왔습니다."하고 외치는 큰 딸의 목소리에도 행복이 담겨있다.
실상 아이들의 행동이나 남편의 생활패턴이 바뀐 것은 크지 않다. 다만 내가 세상을 보는 눈이 좀 더 유순해지고 인내심을 기르자 행복이라는 것이 멀지 않았음을 깨닫고 가정폭력이 사라지자 행복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진저리 치게 싫었지만 몸으로 익히고 배워 내 몸에 고스란히 남아있던 폭력이라는 괴물, 이 녀석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고 나를 따라다녔으며 우리 아이들에게도 대물림할 뻔했던 무서운 괴물이다.
자녀를 양육하다 보면 불가피하게 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이 많은 것으로 안다. 하지만 경험자로서 말하지만 매를 들었을 때,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의 매인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가정폭력이다. 가정폭력이라는 괴물은 행복을 잡아먹고 산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반성문과 같은 나의 글을 마친다.
어쨌든 올챙이의 검사 결과는 ADHD가 아니라는 확진을 받았고 당당하게 담임선생에게 통보했다.
"올챙이는 ADHD가 아니랍니다. 선생님!"
결과를 들은 후 한편으로는 통쾌한 쾌감이 찾아왔고 내 아이를 문제아로 바라본 담임선생을 내심 원망했다.
'뭐야 자기가 미국에서 아동심리학 전공한 걸 이런 식으로 자랑하고 싶었던 거야 뭐야?'
머지않아 올챙이의 학년이 바뀌었고 숙제를 하지 않고서는 했다고 거짓말하는 올챙이와 나의 실랑이는 계속되었다.
숙제는 선생님과 의 기본적인 약속인데, 기본적인 약속을 지키지 않는 올챙이가 나로서는 용납이 되지 않았다.
숙제를 잘해가지 않는 아이가 또래 집단에서 잘 어울리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늘 모둠활동에서 소외돼서 어떨 때는 혼자서 도맡아서 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같이하고 싶은 모둠에 들어가지 못해 속상해하는 올챙이가 안쓰러웠다.
숙제를 가지고 실랑이하는 모녀를 보고 올챙이 아빠는 내게 최대한 아이의 숙제에 대해 관심을 끊으라 했고 아이가 창의력이 뛰어나다 보면 대인관계가 어려울 수 있다고 위로해주었다.
올챙이는 초등학교 6학년이 될 무렵까지 취미로 수영과 피아노를 즐기고 있었고 그 무렵 매드클라운이라는 힙합가수를 좋아하게 되었다.
매드클라운의 생일을 앞두고 선물 준비에 분주한 올챙이에게 내가 한마디 건넸다.
"가수한테 최고의 선물은 노래 선물일 텐데... 올챙이 너는 음악적 감각도 있고 글도 잘으니까 멋진 노래를 만들어서 매드클라운님께 선물하면 되겠네..."
순간 올챙이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그때 그 순간이 지금의 올챙이가 '작곡가'라는 꿈을 키우는데 기폭제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