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동아리 시절 후배랑 우리 집 냉장고에 모아둔 맥주를 홀짝이며 바닥에 대자로 뻗어 이야기했다. 9월의 중간을 넘어가는 가을날인데도 시간을 잊은 듯한 뜨거운 여름 햇살이 길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창밖은 아직도 여름이었다. 안 그래도 신입생 전시회 준비하던 여름 속 동아리방이 기억난다던 후배는 13도짜리 시꺼먼 한정판 맥주를 꺼내 마시더니만 어느새 두루마리 휴지를 베고 잠들어버렸다. 왜 대꾸가 없나 했다. 유리잔에 남은 진한 깜장 맥주를 마저 비웠다. 온갖 쓴맛이 입안을 채웠다.
눈이 크면 겁이 많다고 했던가? 출처를 알 수 없는 예전 어르신들의 이야기는 적어도 어릴 적 눈이 컸던 나에게는 딱 맞는 이야기였다. 무서운 놀이기구도, 무서운 공포영화도, 단지 무서울 뿐. 독수리 요새와 사탄의 인형 그 어디가 즐길 수 있는 포인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똥그란 눈을 더 똥그랗게 만드는 것 이외에는 꼼짝할 수 없었다. 세상엔 모르는 것들이 너무 많았고, 커다란 눈에는 더더욱 많이 들어왔다.
그렇게 커다랗던 눈은 어느새 작아지고, 모르는 것들이 아는 것들로 들어오면서 무서움도 어느새 작아졌다. 사람이 만든 놀이기구는 아무도 다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고, 사람이 만든 유령 역시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음을 알고 있다. 무서움은 어느새 호기심이 되었고, 호기심은 용기가 되었다. 좌충우돌 직접 부딫치며 살았고, 비록 엎어지더라고 곧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술을 마시고 밤새워 놀아도 곧 회복하던 20대 초반처럼, 마음의 탄력도 젤리처럼 탱탱하게 돌아왔다.
하지만 잘 몰라서 무섭기도 했지만, 잘 몰라서 용감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며 아는 것은 조금 더 늘어났지만, 오히려 무서움은 변곡점에 도달한 뒤 다시 커지기 시작했다. 독수리 요새도 사탄의 인형도 무섭지 않지만, 이젠 그걸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더 무섭다. 이제는 알게 되어 단단해지고 자신 있는 부분이 생긴 만큼, 더없이 아픈 상처 입기 쉬운 부분 역시 알게 되었다. 그리고 밤새우면 일주일 넘게 골골대는 몸뚱이만큼, 눌리면 쉽사리 돌아오지 않는 플로랄 폼같이 푸석한 마음까지도. 어느새 문제에 뛰어들어 마주하고 더욱더 튼튼하게 만들 방법을 찾기보다는, 덜 아픈 방법부터 찾는 나 자신을 보게 된다. 거북목처럼 비뚤어진 균형은 변화를 회피하게 만든다. 대꾸없는 혼잣말만 잔뜩 만들고 만다.
균형을 되찾는 방법은 약하고 아픈 부분을 마주하는 것. 아무 데도 도착하지 않는 혼잣말 대신 잘못 가닿을지라도 끝내 전할 말을 하고 마는 것. 무엇보다 그동안 모든 무서움을 이기고 여기 내가 이렇게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
“어우 진짜 잘 잤네요. 이제 좀 개운하다!”
그 사이 잠들었던 후배가 흐리멍덩한 눈으로 일어났다. 30분만에 돌아온대꾸다. 그래서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 문을 다시 연다. 맥주 잔도 이야기도 역시 대꾸가 있어야 재미나기 마련이다.
“둘이 마시기에 저건 너무 독하다. 마지막으로 이거 하나 마시자!”
이번엔 산딸기가 잔뜩 들어간 새콤하고 달콤한 맥주로 잔을 채워야겠다. 그렇게 겁없이 새 맥주병의 코르크를 잡아댕기자 경쾌한 “퐁”소리가 먼저 방안을 채웠고, 창밖은 여전히 여름 한낮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