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를 봐주던 J의 목소리가 맑은 햇빛이 들어오는 새하얀 진료실에 퍼졌다. 추나 베드에 눈감고 엎드려 있는 나에게는 온통 컴컴한 세상이었지만, J의 목소리는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내 귀를 통해 온몸으로 퍼졌다.
“어 그래요? 저는 전혀 생각 못…”
순간 갸우뚱한 마음에 말을 덧붙이다가 급하게 말을 삼켰다. 수많은 반례가 기억 속에서 두둥실 떠오르고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분명 둔한 사람일지 모르겠지만, 반대로 분명 이성과 게으름, 다소간의 사회화로 억누르고 있던 예민한 구석도 존재했다. 나를 잘 알고 있는 J가 당연히 모를 수 없다.
“아 아니다. 맞는 것 같아요. 아닐 수 없지!”
이어지는 추나 베드의 덜컹거리는 소리에 맞춰, 예민함에 대한 생각도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순간 왜 예민하지 않다고 생각한 걸까? 그리고 이내 그 예민함이 그리 싫게 느껴지지 않은 걸까? 지금의 나와 예전에 나의 예민함은 어떻게 하면 다를까? 그 와중에 몸에 다른 사람이 손대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긴장해 버리던 내가 어느새 익숙해진 J의 추나 진료에 편안히 몸을 맡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안정감은 J가 가지고 있는 몸에 대한 예민한 감각 덕분일까?
나에게는 확실히 예민한 구석이 있다. 맥주를 좋아하고, 맥주에 까다롭다. 음악을 좋아하고, 음악에 까다롭고. 책이나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무엇보다 직접 무언가의 만드는 일에는 특히 더 예민하다.
대학교 동아리 시절에도 신입생 사진 전시를 위한 흑백 대형 인화의 최종 점검을 자청해서 맡았다. 대형 인화는 오랜 시간과 노력이 드는 일이기에, 조별로 정해진 할당량만큼 인화를 진행했다. 하지만 모두가 같은 실력도 아니고, 다른 사진과의 연관성을 생각하며 톤을 잡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최종 점검을 진행하며 잘못된 사진을 다시 뽑는 건 아예 할당량이 없는 마지막 조의 몫. 당연히 기약 없는 노동이 예고되었지만, 나는 엉망인 흑백 사진을 더 참을 수 없었다. 내 사진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무엇이든 만들어 나갈 때면 커다란 방향부터 조그만 디테일까지 신경이 쓰이게 된다. 내가 맡기로 마음속에서 결정해 버리는 순간, 작은 것까지 크게 보이게 된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도, 어느새 마음속에 크게 자리 잡고 만다. 나의 통제안에 두고 싶어 진다. 다른 사람 손에 맡겨두고 싶지 않다. 마음이 쓰이는 것보다 나의 노동이 훨씬 편안하다.
당연히 모든 일을 그렇게 처리할 수 없다. 수많은 협업이 필요한 회사 일부터 그렇고. 그런 상태라면 나는 너무나 뾰족뾰족해지고 만다. 나에게나 남에게나 모두. 적당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불쑥 뛰어나 버리고 마는 나의 기질을 다독이며 진정시킨다. 어떻게 보면 사회생활은 예민함을 진정시키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예민함은 한편으로 사랑스럽기도 하다. 예술가나 뮤지션의 예민함은 우리에게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된다. 다프트 펑크가 <Giorgio by Moroder>를 녹음할 때,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가사를 녹음하기 위해 60년대, 70년대 그리고 현재의 마이크를 준비했다고 한다. 노래 속 주인공인 조르조 모로더 가 녹음 전 도대체 이걸 누가 구분하냐는 말에 아무도 구분 못 하지만 토마스는 한다고 답한 음향 엔지니어의 일화처럼, 우리가 좋아하는 다프트펑크 노래에는 알 수 없는 디테일로 가득하다. 날카로운 예민함의 결과물은 매끈하고 부드럽다. 예민함은 우리가 미처 몰랐던 공백을 찾아내고, 빈 공간을 빼곡히 채워준다.
예민함은 세상을 받아들이는 센서의 분해능 같은 것일지 모르겠다. 더욱더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는 센서는 분명 우리가 모르는 부분을 채울 수 있다. 반대로 그만큼 연약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폭도 적고, 외부 환경에 민감하다. 엔지니어로서 설계할 때 우리가 원하는 목적에 맞춰서 적당한 센서를 선정하는 일은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우리의 예민함은 너무 성능 좋은 센서를 탑재했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고 설계하듯 나 자신의 센서를 선택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이 센서가 가치 있게 이용될 방식은 존재한다. 예민함은 다른 사람과는 다른 나 자신의 특징과 개성의 증거이고,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자칫 나와 내 주변을 찌를 수도 있지만, 나의 센서를 적절하게 이용하는 방법을 알게 된다면 세상에 몰랐던 공백을 채울 수 있다. 단조로운 일상에 맞춰 억누르고만 있었던 멋진 성능의 센서를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방향이 어딘가 존재해야 하지 않을까? 비싸고 정밀한 센서에는 그에 맞는 역할이 필요하다. 활용하지 않기에는 너무나 아깝다. 예민함은 분명 가치 있다. 우리에게는 미처 풀어내지 못한 예민함을 펼쳐낼 각자의 방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