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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센세 May 22. 2023

두 눈이 다시 근질근질

 “다른 사람들의 작업물을 책으로 만들어주는 걸 하고 싶은 건가요? 아님 자신의 작업을 하고 싶은 거예요?”


 방금 처음 만난 선배님의 거침없는 질문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 둘 중에 내가 진정으로 원한 건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착각해 온 걸 수도 있다는 생각에 머리가 ‘땡!’ 하고 울렸다. 둔탁한 ‘띵’이 아니라 경쾌한 ‘땡’. 지금 갤러리 창문으로 들어오는 부산의 상쾌한 바닷바람처럼.


 사진 동아리를 하면서 못난 내 사진에 분통 터지던 대학생 시절. 펼쳐야 할 유체역학 책은 굳게 닫아놓고, 도서관에 사진 책만 뒤적거리다가 <필립 퍼키스의 사진 강의 노트>란 책을 읽게 되었다. 사진 기술을 상세히 설명하거나, 개념을 명쾌하게 제시하던 다른 책들과는 달랐다. 오히려 읽으면 읽을수록 꼬리에 꼬리를 무는 아리송함이 가득해졌다. 그렇게 생각과 고민이 가득해지는 이 책에 푹 빠지고 말았다. 사진은 세상을 구석구석 보는 눈을 기르는 일이구나 알게 되었고, 나도 나만의 세상을 구석구석 섬세하게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싶어졌다. 두고두고 읽고 싶어서 서점으로 향했다. 하지만 정작 책은 절판. 그 길로 신촌 바닥에 있는 헌책방을 돌아다녔다. 정작 구하지 못하고 두 손에 들리게 된 건 안셀 아담스의 흑백사진 이론서인 <The negative>와 <The print>의 절판된 번역서였지만. <필립 퍼키스의 사진 강의 노트>의 출판사가 바뀌어 재출간된 건 수년이나 흐른 뒤의 일이다. 원래 옮긴이와 바뀐 출판사의 대표가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그 둘이 동일인이고, 필립 퍼키스의 제자이자 사진가라는 사실도. 그리고 우리 사진 동아리의 선배님이었던 사실도.


 SNS를 보다가 안목 출판사가 부산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갤러리 겸 서점으로 문을 열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알 수 없이 생긴 내적 친밀감과 사진과 사진집이 가득한 공간 모습에 찾아가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서다가도, 괜히 안면도 없는 사람이 후배라고 찾아가는 건 좀 그렇지 않을까 하는 소심함에 차일피일 미루고 말았다. 그러다 부산 국제 록 페스티벌을 보러 간 지난 주말, 10월인데도 여름 같은 날씨 때문이었는지 들뜨게 만드는 라이브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소심한 가슴에 용기의 불꽃이 일어나서 공연장을 뛰쳐나왔다. 부산 정반대 편에 있는 안목 갤러리로 향했다.


 두 달 정도 시간을 되돌린 듯한 여름 햇빛 아래에서 가파르기 그지없는 부산의 고갯길을 끝없이 올라가다 보면, 그 변곡점에 안목 갤러리가 있었다. 어딘가 익숙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는 곳을 따라 올라간 2층에는 필립 퍼키스의 <At Twilight> 전시 사진이 주르륵 걸려 있었고 그 옆에는 책장 가득히 사진집이 꽂혀있었다. 그리고 그 가슴을 콩닥 거리 게 하는 사진집들 너머 창문을 통해 푸르른 수평선과 짭짤하고 시원한 바닷바람이 갤러리를 감싸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공간을 휙 돌아보니 필요한 것이 있으면 소리 내 달라고 적힌 조그만 황동빛 종이 카운터위에 올려져 있었다. 종을 울리기 전에 사진을 먼저 보기로 했다. 카메라 렌즈 너머 항상 세상을 보던 오른쪽 눈을 잃은 노년의 필립 퍼키스가 자동 카메라와 왼쪽 눈으로 남긴 흐릿한 흑백 사진을. 아마도 본인의 마지막 사진 전시가 될지도 모를.


 종을 울리자 뒤쪽 작업실에서 대표이자 선배님으로 보이는 그 분이 나오셨다. 책을 한 권 사면서 대표님이 맞는 지 확인한 후에, 마지막처럼 용기를 내서 동아리 후배인 것을 고백했다. 그리고 이번에 동아리 사람들을 모아 책을 냈다고 내 책도 한 권 드리면서. 그렇게 얼결에 책도 커피도 공짜로 대접받게 되었다. 뜬금없이 찾아온 후배를 반갑게 맞이해주시며 내가 만든 책을 보면서 가볍게 시작된 이야기는 이미지와 사진 매체에 대한 이야기를 지나 생각보다 더 솔직한 감상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그러던 중 선배님은 내가 찍은 사진을 유심히 보시면서 질문을 그렇게 던지셨다. 출판사와 사진가 모두를 하는 본인의 이야기 함께 양립은 어렵다고 말씀해주시면서. 가뜩이나 별도의 본업이 있는 사람인데 더욱 그렇다고.


 여전히 사진은 어렵고 두렵다. 어느 순간 몰입해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그 찰나는 매번 찾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 순간 속에서 좋은 결과물이 만들어지긴 하지만 언제나 약속해주는 건 또 아니다. 무엇보다 비전문가로서 취미 생활자로서 나 홀로 찍고 있는 내 사진의 방향이 맞는지조차 막막하고. 그래서 온전한 내 작업물을 만드는 걸 미뤄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질문을 듣는 순간 가장 먼저 ‘내 사진’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부터 앞선 나 자신을 만나고 나니, 다시 설레기 시작했다. 역시 사진을 더 찍고 싶다는 생각과 의욕이 밀물처럼 들어왔다.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잊고 있었다.


 “자기 작업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세요. 예술가에게 돈은 시간이랍니다.”


 본인이 욕심도 있고, 좋은 사진 찍는 것 같은데 시간은 절대 무한정 주어져 있지 않다는 조언과 다음번에는 찍은 사진을 좀 더 보여달라는 이야기를 가슴 가득히 안고 갤러리를 나왔다. 두 눈으로 보이는 풍경이 다시 근질근질해져서 카메라를 가방에서 꺼내 손에 들고, 아직도 여름 같은 언덕길을 두리번거리며 내려갔다. 아직 갈 길은 멀지만, 이제 가야 할 길은 알 것 같다. 마음 속도 시간을 되돌린 듯 쨍쨍한 여름 같다.


2022. @anmoc_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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