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은 물이 사방에 가득한 곳이었다. 빼곡한 산과 산 사이마다 거대한 호수가 존재했다. 정작 그 호수보다 더 많이 보고 지낸 건, 호수 때문에 생긴 5m 앞도 안 보이는 짙은 안개였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보다 잔잔한 물결의 호수의 모습을 많이 보고 지냈을 테다. 호수의 물결은 잔잔하다. 계곡의 힘찬 물줄기도, 바다의 거센 파도도 없다. 미끄덩해서 손으로 찍으면 녹아날 것 같은 희미하고 잘은 출렁임만 존재한다. 집에서 조금만 걸어 나가면 하천과 연결된 호수가 나왔다. 복잡한 마음이면 호수를 향해 걸었다. 탁 트인 호수를 바라보면 잔잔한 물결처럼 마음도 어느새 잔잔해졌다.
대학 진학하면서 상경한 서울에는 고향에 없는 것이 무척이나 많았다. 서울은 고향보다 훨씬 거대했고, 사람들은 더 많았고, 모든 것이 복잡했고, 모두가 바쁘게 지나갔다. 그리고 나 역시 그 거친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가곤 했다. 특히나 대학원 생활은 매일매일 태풍을 만난 바다와 같았다. 하루종일 거센 물살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겨우 조각배를 붙들고 있다가, 새벽에 집으로 걸어가다 보면 오랜만에 육지에 발을 붙인 듯 심한 뱃멀미를 느끼곤 했다.
그렇게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 고향에 있던 것들이 의외로 서울에 없기도 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매일 같은 계속되는 안개도 없었지만, 거대하고 잔잔한 호수 역시 없었다. 무해한 그런 고요하고 잔잔한 시간이 그리웠다. 그럴 땐 대신 한강으로 향했다. 그래도 그 고향의 호수에서 흘러내려온 커다란 한강은 제법 호수 같은 물결을 품고 있었다. 휘황찬란한 서울의 불빛을 받아 반짝이게 만들어주는 물결을 바라보며 멀미 가득한 마음이 비슷한 진동을 찾을 때까지 걸었다. 그렇게 또 다음 폭풍우를 견뎌 낼 마음을 되찾아 돌아가곤 했다.
그렇게 폭풍 같던 시절은 박사를 때려치운 것으로 끝났다. 그 후 선택한 군 생활의 첫 근무지는 서해 바닷가 마을이었다. 쉬는 날에도 부대 근처에 있어야 할 때면, 항상 바닷가를 찾았다. 피서철이 지난 해변은 항상 고요했다. 오랜 꿈을 버렸다는 울렁거리고 불안한 마음은 차분한 서쪽 바다에 조금씩 떼어내 두고 왔다. 물결 위 반짝이는 윤슬처럼 다시 반짝일 용기를 찾아냈다.
잔잔한 호수 같은 마음이 필요할 때면 큰 물가를 찾는 것이 버릇이되었다. 전역하고 취직한 지 오래된 지금에도 힘들고 지칠 때면 한강으로 간다. 크게 숨을 들이쉬고, 느긋하게 진동하는 물의 표면을 바라본다. 일렁이는 불안과 철썩이는 감정을 고요한 물결에 맞춘다. 아직도 여전히 표류하는 마음이지만, 언젠가 꼭 호수처럼 잔잔한 물결의 마음을 가지길 바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 물결을 보내줄 사람이 되길 바라면서. 모두에게 폭풍 가득한 날들이 없어지길 바라면서. 마음속 새로운 물결을 가지고 다시 하루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