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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영화 <얼굴>을 보다

by 영자의 전성시대

"오늘은 영화 보는 건 어떨까요? <얼굴>이라는 영화가 보고 싶은데 남편이랑 보면 깊은 이야기를 못할 것 같아서 선생님들과 보고 싶어요."


한 분의 제의로 급작스럽게 영화를 보게 됐고 나도 내심 보고 싶던 영화이기도 해서 반가웠다. 다른 영화들에 밀려 이 영화는 하루에 오전과 밤늦은 시간 2번만 상영했고 우린 선택의 여지없이 늦은 밤, 심야에 영화를 관람했다. 와우, 이리 늦은 밤 영화를 보는 게 얼마만인지, 하긴 늦은 밤에 비단 영화만이 아니라 무얼 해본 게 없었구나!


영화는 시종일관 어두웠다. 내용도 어둡지만 화면도 어두워 자야 하는 내 뇌와 끊임없는 사투를 벌여야 했다. 그렇다고 영화가 졸리다는 뜻은 아니다. 이 영화는 부산행의 연상호 감독이 2억 원의 제작비로 3주 만에 만든 영화라고 하는데 과연 이 감독은 천재인가 싶다. 아니면 박정민 배우가 연기 천재인 것인가? 아니, 권해효 배우의 눈알과 얼굴의 주름까지도 펼쳐내는 연기가 천재일지도.


어릴 적 집을 나갔다는 엄마의 시신이 발견되며 시작하는 이 스릴러 영화는 무언가 자꾸 튀어나올 것 같은 공포감을 바닥에 깔아 아무것도 없는 데도 관람자를 긴장하게 만든다. 실체 없는 두려움 속에 두 손을 꼭 쥔 채, 아들과 기자가 밝혀내며 이야기에 주목한다. 3개의 인터뷰 형식으로 진실은 밝혀지는데 딱히 큰 반전은 없다. 그러나 아버지 연기를 하는 권해효 배우의 연기가 반전이랄까?


그의 대사가 내 뇌리에 박혀 며칠째 생각하고 또 기억하게 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괴롭힘 속에 무시받고 살았지"로 시작하는 복선, 늘 무시받아서 그게 상처이자 사람처럼 인정받고 싶다는 결핍을 드러내며 자신의 모든 행동의 당위성을 부여한다. 아내가 예쁘다는 말을 듣고 호감을 갖게 되는 미련함도, 아내가 못생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부들부들 떨어대던 분노도, 결국에는 죽이고야 말았던 폭력성마저 타당한 이유였음을 변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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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서웠다. 다른 공포영화처럼 귀신이 나오거나 이유 없는 살인마가 나오면 그 순간만 무섭다. 그러나 이 영화의 빌런은 나이기도 하고, 내 옆의 그이기도 하다. 그래서 언제 어느 때 미련해질지, 분노할지, 폭력성이 튀어나올지 모르기에 무섭다. 이 모든 감정이 내 세포 안에 고스란히 들어 있어 무섭다. 내 옆의 사람도 동일하기에 함께 있음이 무섭다.


그러나 적어도 그게 얼굴은 아니기를, 내 겉모습은 아니기를, 내가 보여내는 겉표면으로 내가 판단되는 세상이 아니기를 바란다. 내 가치가 얼굴이나 사회적 위치나 소유한 부가 아니기를 바란다. 이 가치기준이라면 특정 몇몇을 제외하면 우리 모두는 영화의 살해당한 어머니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적 인식과 인정에 목이 마른 살인자 아버지와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영화의 잔상은 참 질기다. 대사 몇 줄이, 인물의 표정 한 줌이, 뒷모습만 보이던 작지만 강했던 어머니의 모습이, 죽이고도 자신의 결핍만 자랑하던 괴물이 된 아버지가 자꾸 생각난다. 그리고 결국 이 모든 사실을 자신의 욕심을 위해 울며 덮어야만 한 아들에게 던진 한마디 "아버지랑 진짜 닮으셨네요." 나도 그 아버지와 닮아있을까 봐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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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영화는 이미 손익분기점을 훌쩍 넘고 장기 흥행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 어두운 영화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묵직함을 거북함으로 받기보다는 의미 있게 받아내는 관람객들이 많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움직임을 통해 앞으로 살아낼 후손들은 참 의미를 찾아가며 타인이 세운 기준보다는 본질적인 가치기준을 찾아가는 분위기가 이루어 지길 기대한다.


나 또한 그런 사람으로, 자신의 결핍이 결국은 든든한 자존감의 동력이 될 수 있도록 훈련해야지. 결핍은 부끄러움도 숨겨할 것도 내세울 것도 아니지만 못남의 당위적 이유가 될 수 없음을 인식하고 결핍에서 자유로울 수 있도록 내 결핍을 바로 보자. 그리고 근원적 뿌리를 찾고 그것부터 제대로 바로 보는 연습을 하자. 닳도록 봐서 결핍이 진짜 닳아 없어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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